소설리스트

082화 (82/231)

082화

* * *

반서후에게 재미있는 고민거리 몇 가지를 선물한 후 유은담은 암현 길드 옥상으로 향했다.

길드장 전용으로 사용되는 장소라서 대낮인데도 아무도 없었다.

오랜만에 보는 쭉 뻗은 대로변과 빌딩이다.

건물 사이로 부는 강풍이 머리카락을 마구 흐트러뜨렸다.

대충 반서후가 음모에 가담하지 않았다는 확신은 얻었다.

뭔가를 잘 감추는 타입도 아니니까 저 아무것도 모르는 듯한 반응은 아마 연기가 아닐 거다.

사실 반서후는 아닐 거라고 예상하긴 했다.

그의 반듯함에 대한 집착은 강박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런 인간이 납치나 음모 같은 구린 짓에 가담했을 리는 없겠지.

게다가 지금 언론에서 떠들어대는 살인범은 그의 하나뿐인 여동생이니까.

게다가 설령 음모에 가담하고 있었다고 해도 속아 넘어갔을 가능성이 높았다.

워낙 고지식한 성격이라 ‘대의를 위한 것’이라는 감언이설로 잘 구슬리면 충분히 속을 만한 인간이니까.

‘내가 너무 무르게 생각하는 건가?’

반서후와 알아온 시간은 짧지 않다.

자주 엮이지는 않았어도 세월 위에 쌓인 정이라는 것이 무서운 것이다.

유은담은 상대가 반서후가 아니었다면 어떻게 처리했을지 떠올려 본 후 순순히 인정했다.

‘뭐, 상관없지.’

조급하게 판단할 필요 없다.

만약 반서후가 자신의 납치에 가담했었다면 이미 천공 길드에 발을 디딘 순간 공격해왔을 것이다.

자신이 납치되었다는 사실조차 정말로 전혀 모르는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다른 건은 어떨까.

중소 길드의 공략 팀을 이용해서 거대 길드가 던전을 독점한다는 계획에 반서후는 찬성했을까?

아니면 자신처럼 전혀 모르고 있었을까.

천공 길드가 이 일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다면 그림이 매우 간단해진다.

세 개의 길드 중 둘이 모른다면 범인은 하나뿐이지.

대한 길드.

그렇게 생각하면 대충 아귀가 맞아떨어진다.

자신을 납치해서 제거하려고 했던 것도 거슬리는 다른 길드를 제거하는 맥락이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되었다.

반서후는 왜 그냥 뒀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유는 뭐, 여러 가지가 있겠지.

아니면 이제 제거하기 시작한 거라든가.

반서진을 이용해서 반서후의 입지를 약화시키면 고분고분 말을 따르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걸지도 모르고.

어쨌든 결국 반서후에게는 그 영상이 필요하게 될 것이다.

‘잘 있으려나.’

반서후는 자신이 영상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영상의 주인은 따로 있다.

영상은 일부러 받아오지 않았다.

최악의 경우, 반서후에게 돌진했을 때 다시 사로잡힐 수도 있었으니까.

그런 리스크에도 불구하고 반서후를 찾아간 건 조금 감정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그가 가담하지 않았다고 믿고 싶었기 때문이다.

추측대로 아무것도 모르는 듯했으니 다행이었다.

반서후에게도, 자신에게도.

만약 진짜 납치 사건에 일조했다면 그 비싼 천공 길드 건물은 새 부지를 알아봐야 했을 것이다.

자신이 죽는 한이 있더라도 천공 길드 박살내고 죽었을 테니까.

그럼, 반서후는 마무리되었으니…….

‘신중한 성격 같았으니까 일을 망치지는 않겠지.’

유은담은 자신을 손모아라고 소개했던 헌터를 떠올렸다.

눈을 뜨니 웬 순한 인상의 여자가 잔뜩 긴장해서 자신을 보고 있어서 좀 놀랐었지.

그러곤 구구절절 상황을 설명하는데, 도무지 꾸며냈다고 상상하기 힘든 진심 어린 얼굴 때문에 별 저항도 없이 그대로 믿어버렸다.

결론적으로 모두 사실이긴 했지만.

묶여 있는 내내 풀려나기만 하면 더 죽여 버리겠다고 이를 갈았는데, 덕분에 소원 성취할 수 있었다.

자신을 풀어준 당사자는 죽은 헌터들을 보고 안색이 나빠졌지만 생긴만큼 유순한 성격인가 싶었다.

결국 그게 신경 쓰여서 답지 않게 변명도 해버렸다.

평소에는 이러지 않는다니. 스스로 하고도 우스운 변명이다.

아무튼 유은담이 보기에 손모아는 수수께끼 같은 점이 무척 많았다.

자세히 설명을 하긴 했지만 어딘가 석연치 않은 부분도 많았고, 대표적으로 서지한과의 관계를 숨기고 있는 것도 좀 의아했다.

하지만 다그치고 추궁할 생각은 들지 않았다.

괜히 그랬다가 경계당하면 좀 슬플 것 같았다.

이미 뭔가를 숨기며 경계하고 있는 것 같긴 하지만, 알게 된 지 얼마 안 되었으니 그게 당연하겠지.

오히려 그런 최소한의 경계도 없이 묻는 대로 다 알려줬다면 도리어 불안했을지도 모르겠다.

어디 이상한 놈에게 잘못 걸려서 해코지당하기 딱 좋으니까.

한국으로 돌아온 뒤 개인적인 끈으로 뒷조사도 잠깐 했는데, 그녀 본인은 정말 평범한 사람이었다.

평범한 가정에서 자란 각성한 지 얼마 안 된 헌터.

약간 특이한 점이라면 막 각성한 것 치고는 좀 강한 편이라는 점?

그 선한 인상에 어울리는 무용담도 몇 개 가지고 있고, 대미지 랭크는 증폭 스크롤을 쓰면 보스 몬스터에게도 통할 정도로 쓸 만한 것 같다.

사실 실전 경험이 거의 없을 만한 프로필인데 바르기스를 상대로 꽤 잘 싸워서 놀랐다.

자신에게 바르기스의 움직임을 봉쇄하라는 전술 지시까지 했으니 각성한 기간과 경험에 비하면 놀라울 정도로 침착한 편이었다.

사실 변이 한 바르기스를 상대로 고전한 건 반쯤은 연기였다.

놈이 빨라진 덕분에 맞추기 어려워진 건 사실이지만 광역 스킬에 마력을 쏟아부어서 잡는 방법을 쓸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 새로운 인물의 전력을 좀 확인해보고 싶은 생각이 들어서 괜히 고전하는 척 했던 것이다.

결과는 기대 이상이었고.

그리고 손모아는 기대 이상으로 배포도 컸다.

그 서지한 헌터도 악령 왕 실라기스를 죽이고 겨우 뿔 조각을 얻었으니, 유은담이 알기로는 이 바르기스의 뿔은 온전한 상태로 드롭된 최초의 뿔이었다.

사실 바르기스의 갑각이나 다리 같은 부산물이나 떨어지겠지 하고 시체를 넘겼는데, 온전한 뿔이 나올 줄이야.

그것만으로도 놀라운데 그걸 자신에게 넘길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아무튼 여러모로 좀 걱정되는 구석이 많은 사람이었다.

나쁜 사람에게 잘못 걸렸다가는 신세 망치기 딱 좋을 만큼 사람이 너무 좋다.

‘뭐, 상황 해결하고 내가 지켜주면 되겠지. 암현 길드에 가입 권유해도 좋을 것 같네.’

먼 곳을 바라보던 유은담의 시선이 발 아래를 향했다.

이 아래는 길드장의 방이었다.

아까부터 조용히 그 방을 향해 귀 기울이던 참이다.

방주인인 자신이 없으니 비어 있어야 하는 것이 마땅한데, 인기척이 느껴지고 있었다.

간혹 말소리도 들렸다.

확인은 끝났다.

방 안에 있는 사람은 한 명이다.

말소리 때문에 여러 명인가 해서 지켜보고 있었지만 아무래도 전화통화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유은담은 천천히 날아서 조용히 목소리가 들리는 방의 창가로 다가갔다.

가까이 가자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그는 잔뜩 들뜬 톤으로 누군가에게 자랑을 늘어놓고 있었다.

“당연하지, 내가 이제 예전의 이태식이 아니라니까?”

이태식.

길드 내부에서 크게 비중 있는 인물은 아니었다.

유은담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암현 길드는 정부 소유의 길드이다.

이번 일이 내부적인 알력 다툼인지, 아니면 길드를 소유하고 있는 정부의 정식 입장인지 확인해야겠다.

일부만 변절했다면 청소를 해야 하고, 뿌리까지 다 썩었다면…… 그래도 청소는 해야지.

“그래그래. 내가 나중에 밥 한 끼 살게. 어, 끊어.”

실실 웃으며 통화를 마친 이태식이 뿌듯하게 휴대폰을 내려다봤다.

이래서 줄을 잘 타야 한다.

일개 길드원이던 자신이 이 방을 차지하게 될 줄이야.

창을 등지고 방 안을 휙 둘러본 이태식의 입가에 야망 어린 미소가 피어올랐다.

밑 작업이 다 끝나면 공식적으로 유은담의 사망이 발표될 테고, 그러면 암현 길드는 새로운 길드장이 필요해질 거다.

거기에 좀 더 민간인 친화적인 인물, 새로운 암현 길드의 얼굴로 이 이태식이가 딱 나타나는 거지.

“흐흐. 완벽하네. 완벽해. 길드장이 되기만 하면 제일 먼저 이 벽지부터 싹 바꿔야겠네. 칙칙하게 이게 뭐야. 아주 화려한 꽃무늬로 발라야겠어.”

“애석하네. 나는 마음에 들었는데.”

등 뒤에 바짝 붙어 속삭이는 목소리에 이태식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그가 너무나 잘 아는 목소리였다.

동시에, 절대 지금 이곳에서 들려서는 안 되는 목소리.

목덜미에 닿아오는 스산한 냉기에 이태식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히기 시작했다.

오후의 햇살이 쏟아지는 평화로운 길드장의 방에는 순식간에 스릴러 같은 긴장감이 가득 찼다.

“꽃무늬라니, 요즘 아저씨들 취향인가?”

그렇게 말한 유은담이 천천히 창문을 넘어 방 안으로 들어왔다.

이태식은 바퀴벌레처럼 허겁지겁 창가에서 물러나 믿을 수 없는 얼굴로 유은담을 마주했다.

“유, 유은담. 대체 어떻게?”

“이제 길드장님이라고 부르지도 않으시네.”

마냥 헤실거리던 평소의 생각 없는 어린애가 아니었다.

이태식은 이렇게 서늘한 유은담은 처음 본다.

그 살기를 마주한 이태식이 눈알만 굴려 책상 위의 전화기를 흘끔거렸다.

“나라면 그러지 않을 거야.”

유은담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이태식은 전화기를 향해 몸을 날렸다.

어차피 길드장이 여기까지 온 이상 일이 틀어져도 단단히 틀어졌다.

이대로라면 제 목숨은 사라질 판이니 일말의 가능성에 희망을 걸 생각이었다.

그러나 수화기를 뽑아 든 이태식의 손은 금세 유은담에게 붙잡혔다.

마치 두 손으로 악수라도 하듯 이태식의 손을 감싸 쥔 유은담이 조용히 말했다.

“이태식 헌터.”

이제 죽은 목숨이다.

낯빛이 꺼멓게 죽어 대답도 못하고 얼어붙은 이태식에게 유은담의 여상스러운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내가 부탁이 있는데.”

“마, 마, 말씀하십시오. 길드장님.”

죽일까, 살릴까.

발발 떠는 쥐새끼 보듯 이태식을 바라보던 유은담의 눈이 빙긋 웃었다.

“친구 소개 좀 시켜줄래?”

이게 진짜 친구를 소개해 달라는 뜻이 아님은 바보라도 알 수 있다.

그렇다고 진짜로 유은담을 데리고 갔다 가는 그들이 배신자가 된 자신을 어떻게 처리할지 생각도 하기 싫었다.

어떻게 해도 망한 것이다.

이태식은 차마 대답하지 못 하고 식은땀만 흘렸다.

그 여유가 유은담의 심기를 거슬렀다.

“히익.”

아직 손에 쥐고 있는 수화기 위로 성에가 끼더니 냉기가 훅 치밀었다.

제 손이 얼음에 둘러싸이는 것을 본 이태식이 다급하게 외쳤다.

“아, 안내! 안내하겠습니다. 모시겠습니다.”

그제야 유은담이 이태식의 손을 놓아주었다.

그리고 잔잔하게 웃는 얼굴 그대로 문을 턱짓했다.

“앞장서. 네 버러지 같은 친구들을 청소하러 갈 시간이니까.”

암현 길드의 썩은 부분을 모두 도려낼 것이다.

그로 인해 길드가 무너져도 상관없었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