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79화 (79/231)

079화

다행히도 간밤에는 별 일이 없었다.

서지한의 지푸라기 손이 내 귀에 들어올 일이 없었다는 뜻이다.

눈을 뜨자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눈부신 햇빛이 딱 좋게 방을 비추고 있었다.

- 좋은 아침.

창가에 서서 밖을 내다보던 서지한이 슬쩍 돌아보더니 인사했다.

부스스하게 몸을 일으키며 고개를 까딱거리자 그가 창문 너머를 가리켰다.

- 까마귀가 있어.

비척비척 일어나서 창가로 다가서니 그 말대로 진짜 무슨 독수리 만한 까마귀들이 호수에서 물고기를 잡아먹고 있었다.

“배고프네요.”

- 낚시해볼래? 물고기가 많은 것 같아.

“아뇨.”

그냥 해본 말이었는지 서지한은 더 권하지 않았다.

슬슬 잠이 깨니 시장기가 극심하다.

하긴, 던전을 나온 후 제대로 식사를 한 적이 없긴 했다.

몽골에서 고깃국물 몇 그릇을 마신 것이 전부인데, 그나마도 입에 안 맞아서 먹는 둥 마는 둥 했지.

인벤토리에서 즉석 밥과 통조림 반찬을 꺼내 놓고 대충 허기를 채우기로 했다.

일회용 발열 팩도 가지고 있어서 그냥 그 위에 올려놓기만 하면 데울 수 있으니 편하다.

식탁 대용으로 창문 옆에 있는 나무 책상에 물건들을 올렸더니 뽀얀 먼지 탓에 그릇 모양대로 자국이 남았다.

지난 던전 생활로 무뎌졌는지 이걸 봐도 딱히 더럽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대충 먹을 준비를 마치고 창밖 풍경을 TV 삼아 식사를 시작했다.

창밖에서는 까마귀들이 커다란 물고기를 물어다 잔치를 벌이고 있었다.

정말 야생이네.

그 모습을 멍하니 보며 입에 밥을 떠 넣다가 문득 어제 사 온 휴대폰이 떠올랐다.

사실 어제 바로 켜서 확인하고 싶었는데, 어차피 충전도 되어 있지 않아서 포기해버렸다.

그나저나 이 휴대폰 충전하려면 집에서 전기를 쓸 수 있게 해야겠는데, 발전기가 있다고 했던가?

하긴, 이런 전신주 하나 안 보이는 외딴곳에 전기선이 깔려 있을 리 없으니 자가 발전기는 필수겠네.

“밥 먹고 할 일이 많겠어요.”

- 어떤 거?

까마귀가 사냥하는 걸 흥미진진하게 보던 서지한이 나에게 시선을 던졌다.

“일단 발전기부터 찾아야겠어요.”

- 휴대폰 때문에?

“그것도 있고, 꼭 그렇지 않더라도 전기는 필수잖아요.”

- 그건 그렇지.

“여기서 얼마나 길게 지낼지 모르는데 최대한 인간다운 삶은 가능하도록 준비해둬야죠.”

서지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계속해서 밥을 먹으며 할 일을 꼽아보았다.

전기, 수도, 가스.

전기는 발전기가 있다고 했으니 괜찮겠고, 여기 온수는 나오나?

- 발전기는 지하에 있더라.

“어떻게 알아요?”

영혼 상태의 서지한은 영혼석에서 3미터 이상 떨어지지 못한다.

바닥을 다 통과해서 가더라도 지하까지는 닿지 않았을 것이다.

서지한은 대답 대신 지푸라기 인형을 향해 턱짓했다.

- 심심하더라고. 너 자는 사이 집을 좀 둘러봤지.

그 말대로 문가에 기대어 있는 지푸라기 인형은 하얀 장갑과 하얀 양말이 회색으로 더러워져 있었다.

이 집안의 모든 먼지를 몰고 다닌 것이 분명했다.

밥을 다 먹고 밖으로 나가 봤더니 진짜로 인형이 돌아다닌 크기만큼 먼지가 닦여 있었다.

계단으로 이어지는 작은 발자국.

계단을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올 때 짚은 듯한 규칙적인 두 개의 손자국과 발자국들.

흠.

“서지한 씨.”

- 응?

“부탁 하나 해도 될까요?”

- 내가 할 수 있는 거라면 뭐든.

싱긋 웃는 얼굴을 보며 나는 정중하게 말했다.

“청소를 해야 할 것 같은데, 걸레질 좀 도와줄 수 있을까요?”

아주 잠깐 얼빠진 표정을 짓던 서지한은 곧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바로 비닐과 고무줄을 꺼내 인형이 젖지 않도록 비닐장갑과 양말을 덧씌우고 물티슈 한 통을 꺼내놓았다.

이거라면 서지한도 충분히 방을 닦을 수 있을 거다.

“하실 수 있겠어요?”

- 당연하지. 나만 믿어! 아, 그런데 지하 발전기 확인하러 갈 거 아냐? 무서울지도 모르는데 같이 가줄까?

“으음, 그래요. 같이 가요.”

- 그래. 별건 없었는데 아무래도 좀 밀폐된 공간이니 혼자 가기에는 기분이 나쁠 수 있을 것 같더라고. 지금 갈 거지?

“네.”

아래층으로 내려와 지하실로 통하는 문을 본 뒤 나는 왜 서지한이 그렇게 걱정했는지 깨달았다.

새카만 공간으로 이어지는 좁은 계단이라는 건 공포를 느끼게 하는 상상을 자극하는 구석이 있었다.

내가 아무리 헌터로 각성했더라도 이건 어쩔 수 없다.

고맙게도 서지한은 나를 배려해서 쉼 없이 말을 걸어주고 있었다.

계단을 조심하라는 등, 불빛으로 아래를 비추라는 둥, 지하실 아래는 다 비어 있고 발전기는 오른쪽 벽에 붙어 있다는 그런 이야기들.

덕분에 무섭지 않게 지하로 내려왔다.

지하실의 발전기는 기름을 넣어 쓰는 종류였는데, 다행히 남은 기름이 좀 있어서 켜기만 하면 됐다.

하지만 오래가지는 못 할 것 같았다.

유량계는 거의 5분의 1 정도만 차있었다.

“기름도 사 와야겠네요.”

- 그러게. 꽤 오래된 발전기 같네. 그래도 잘 돌아가서 다행이다.

발전기를 켜자 지하실 전등에 불이 들어왔다.

전기가 안 되면 곤란할 뻔했는 데 다행이다.

일단 지하실에서의 용무를 끝내고 우리는 다시 2층으로 돌아왔다.

서지한을 지푸라기 인형에 넣기 위해서다.

“진짜 괜찮겠어요?”

- 당연하지. 나만 믿어. 정말 반짝반짝하게 닦아 둘 테니까.

어느새 인형 안으로 들어간 서지한이 바스락바스락 가슴을 두드리며 한 팔을 내밀어 파이팅을 외치는 듯한 자세를 취했다.

이 먼지들을 언제 다 닦나.

인형이 다닌 바닥의 먼지가 닦인걸 보니 걸레질이 잘 되겠다 싶어 무심코 입을 열었는데 서지한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나설 줄은 나도 몰랐다.

전직 랭킹 1위에게 이런 허드렛일을 시켜도 괜찮을까 하는 뒤늦게 생각이 드는데, 뭐, 괜찮겠지.

어차피 이 집을 다 치우려면 인형 손이라도 빌려야 하는 처지다.

본인도 좋아하는 것 같으니 감사히 도움받아야지.

서지한의 작은 지푸라기 인형이 물티슈를 뽑아 두 손으로 열심히 방을 닦기 시작했다.

뽈뽈거리며 움직이는 작은 몸이 아주 귀엽다.

나는 일단 2층의 모든 방을 다 확인했다.

욕실 하나와 침실 세 개다.

욕실은 예쁜 욕조까지 놓여 있어서 꽤 근사했다.

창밖으로 호수를 내다보며 씻을 수 있는 구조였다.

수도꼭지를 돌리자 다행히 물은 나왔지만 얼음같이 차가웠다.

지하수인 것 같았다.

아래층의 욕실도 마찬가지다.

그래도 온수관이 어딘가로 연결된 걸 보면 아예 뜨거운 물이 나오지 않는 구조는 아닌 듯한데.

여기 살던 마약상이 모닥불을 피워 물을 데워 씻지도 않았을 테고.

아예 안 씻었을 가능성도 있긴 하지만 제발 그것만은 아니길 빈다.

던전에서도 내내 물티슈로 좀 닦기만 했고 몽골에서도 못 씻어서 엄청나게 씻고 싶단 말이야.

게다가 근사한 욕조까지 봐버렸으니 오늘은 꼭 저기에 물을 채워 씻고 말겠다.

다행히 집안과 밖을 샅샅이 수색한 결과 구석에 놓여 있던 프로판 가스통을 발견했다.

한국에서도 도시가스가 연결되지 않는 곳은 이런 식으로 가스를 쓰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한때 내가 살던 거제도 집에서도 이런 가스통을 썼었지.

낯설지 않은 물건이라 조작하는 게 어렵지 않았다.

꼭지를 돌려 가스 파이프를 열 고관을 따라가니 온수용 보일러가 있었다.

보일러까지 켰더니 드디어 욕실에 온수가 나온다.

전기, 온수는 일단 끝났다.

이제 남은 건 청소와 물건 보충인가?

가스통도 거의 다 비어 있던데 저것도 한 통 사 와야겠군.

불도 켜지고 뜨거운 물도 나오니 이제야 좀 사람 사는 집 같았다.

흉가 같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보니 호숫가 요정의 집처럼 운치 있어 보이는 것 같았다.

라스베이거스에서 산 휴대폰을 꺼내 충전까지 시켜둔 후 나는 본격적으로 청소에 뛰어들었다.

2층은 서지한이 맡아주기로 했지만 1층은 온전히 내 몫이다.

부지런히 움직여서 1층 청소를 마치고 나니 벌써 날이 저물고 있었다.

오늘은 이쯤 하고, 2층은 어떻게 되어 가나 올라가 봤더니 마침 서지한도 계단을 닦고 있었다.

- 왔어?

한쪽에 쌓아둔 검게 변한 물티슈들.

그리고 먼지 한 톨 없이 매끈매끈한 복도와 방을 보니 내가 안 보는 동안 얼마나 부지런히 움직였는지 알겠다.

저 작은 몸으로 이만큼이나 했다는 것이 경이로운 지경이었다.

“와, 진짜 깨끗하네요.”

- 에이, 그 정도는 아냐. 적당히 쓸만하게 닦아둔 거지. 이제 여기만 닦으면 끝인데, 아래층은?

“아래층도 거의 끝났어요.”

말은 그렇게 해도 서지한은 이만저만 뿌듯한 게 아닌 모양이다.

작은 지푸라기 인형이 가슴을 활짝 펴고 흐뭇하게 복도와 방을 돌아보고 있었다.

그렇게 마지막 남은 계단까지 서지한과 함께 닦아내고 나니 드디어 청소가 대충 끝났다.

- 이제 물건 사러 갈 거야? 아니면 씻을래?

대청소하느라 땀을 흘렸더니 아주 간절히 씻고 싶긴 하는데, 아직 해야 할 일이 좀 남았다.

던전에서부터 내내 미뤄왔던 그 일.

드디어 자리 잡고 머물 터도 생겼으니 이제야 확인할 수 있겠다.

“그전에, 할 일이 있어요.”

- 청소? 아니면 한국 동향 확인하려고?

“아뇨.”

- 그럼?

의아해하는 서지한을 바라보며 나는 오랜만에 상태창을 열었다.

던전에서도 몇 번 확인해서 이미 어떤 내용인지는 알고 있지만, 다시 봐도 역시 가슴 뛰는 문구였다.

“김영길의 복수 퀘스트가 완료됐어요.”

- 어? 아, 그랬지.

“보상을 받아야죠.”

A급 소비용품 제작계 헌터를 통째로 얻는 어마어마한 보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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