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7화
내가 보일 때마다 이렇게 말을 걸곤 했는데 이 모습이 엄마에게 들켜 몇 번이나 혼이 났다.
손님을 귀찮게 하지 말라고.
그럴 때마다 괜히 양을 쓰다듬는 척 딴청을 피우는 모습이 무척 귀여워서 나는 이 여자 아이가 그리 싫지 않았다.
하지만 양을 내 게르 (몽골식 천막) 앞으로 괜히 몰고 오거나, 문 앞에서 나를 계속 기다리는 것은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엄청 신경 쓰이니까.
“센베노. 괜찮아요.”
지내면서 배운 몽골 인사에 곁들여 한국어로 대답하자 볼이 발갛게 되어 기뻐한다.
그러더니 양을 만져 보겠느냐, 말을 타 보겠느냐 하며 손짓 발짓으로 이런저런 것을 권해왔다.
나는 한숨을 쉬고 싶은 기분으로 고개를 저었다.
안에만 있기 답답해서 나오긴 했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안에 있을 걸.
평소였다면 고마운 호의를 받아들여서 신나게 같이 놀았겠지만 지금은 그럴 만한 기분이 아니다.
이래저래 할 일도 많고 걱정거리도 많은 상황이라.
여기는 고비 사막 인근에 있는 작은 마을이다.
고비 사막은 몽골과 중국 사이에 있는 사막이다.
사실 이집트나 아랍쯤에 온 게 아닌가 생각했는데 예상외였다.
불빛을 따라 걸어와서 게르 몇 개를 발견할 때까지만 해도 무슨 캠핑장소에 온 줄 알았다.
하지만 서지한이 여기가 몽골이고, 이건 그들의 전통 가옥인 게르라고 알려주었다.
몽골이라니.
솔직히 세계 지리를 배울 때 잠깐 들은 게 전부인 곳이라 이만저만 낯선 게 아니었다.
마뜩잖은 숙소 모습에 그냥 다른 도시로 갈까 싶었는데, 가축을 돌보러 이른 새벽부터 나온 거주민이 마침 나를 발견해버리고 말았다.
방금 던전을 나온 데다 사막을 걸어온 내가 무척 낡고 지친 차림을 하고 있었는지 게르의 주인은 얼른 나에게 고기 국물을 떠서 내밀었다.
얼떨결에 받아 들어 몇 모금 마셨더니 나는 어느새 이들이 내어준 게르에 숙박을 하고 있었다.
알고 보니 고비 사막 여행을 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숙박업을 하는 이들이었다.
비수기라 손님이 없었는지 나를 붙잡는 손길이 무척 극진했다.
내가 별다른 짐 없이 사막을 돌아다니는 걸 보고 조난당했거나, 아니면 헌터인 걸 짐작한 눈치였다.
하지만 돈만 제대로 내면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태도여서 오히려 편했다.
돈을 지불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던전을 나온 이상 헌터 마켓을 쓸 수 있으니까.
거기에서 몽골의 화폐를 좀 얻은 뒤 숙박비를 지불하는 건 쉬운 일이었다.
사실 처음에는 온통 낯선 것 투성이라 얼른 떠날 생각이었는데 생각보다 몸이 지쳐 있었는지 자리에 눕자 잠이 쏟아졌다.
하긴, 잠도 제대로 못 자고 계속 전투를 치렀으니 고단하지 않은 것이 이상하다.
- 여기서 얼마나 지낼 거야?
드높은 푸른 하늘에 풀 뜯는 양 떼들.
평화 그 자체인 풍경인데 서지한은 여기가 싫은 것 같다.
지루해서 견딜 수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음, 좀 심심하긴 하지.
나는 별 불만이 없다.
주인집은 친절하고 나를 잘 보살펴준다.
게다가 나를 알아보는 사람도 없어서 신경을 곤두세우지 않아도 된다.
한 가지 걸리는 점은, 여기 주인집 딸이 나에게 굉장히 관심이 많다는 것이다.
어찌나 붙임성이 좋은지 여기에 하루도 묵지 않았는데 벌써 몽골 인사말을 배워버렸다.
그 친절이 고맙긴 하는데, 지금은 좀 피하고 싶다.
바르기스의 뿔을 먹으려면 좀 더 혼자 있을 수 있는 장소가 필요했다.
그리고 여기는 종종 한국인이 찾아오기도 하는 곳이라 완전히 안심할 수 없었다.
듣기로는 고비 사막 투어가 여행지로 주목받으며 한국인 여행객이 부쩍 늘었다고 한다.
그 증거로 여기 주인집 딸의 한국어가 제법 유창했다.
게다가 나도 잘 모르는 한국 연예인 사진을 내밀며 열렬한 팬이라고 주장했다.
심지어 내가 못 본 드라마도 다 봤다고 한다.
TV도 없고 인터넷도 잘 안 터지는 장소인데 대체 어떻게 드라마를 봤냐고 했더니 말을 타고 큰 마을까지 가서 봤다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 어마어마한 열정이 그대로 나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져서, 솔직히 진짜로 부담스럽다.
나는 대충 주인집 딸에게 웃어준 뒤 게르로 다시 들어왔다.
그리고 문을 닫았다.
“오늘 떠나려고요.”
서지한은 반색하고 좋아했다.
어차피 오랫동안 한 자리에 머물 생각은 없었다.
- 어디로 갈 건데?
“음.”
나는 마켓에서 산 여행책자를 꺼냈다.
사실 휴대폰을 사고 싶었는데, 올라와 있는 매물이 없었다.
아이템을 판매하고 그 대금으로 휴대폰을 요구해서 구매할 수도 있었지만 나는 일부러 그러지 않았다.
구매라면 모를까, 판매할 때는 닉네임이 드러난다.
루터라는 닉네임을 걸고 손에 넣은 휴대폰의 보안을 믿을 수가 없다.
아마 높은 확률로 내 위치나 정체를 추적하기 위한 프로그램이 내장되어 있을 테니까.
S급 핵의 판매자.
유은담이 준 A급 공격력 증폭 스크롤도 그렇게나 성능이 좋았는데, S급 핵으로 만든 아이템은 얼마나 좋을까.
그걸 생각하면 루터를 찾는 사람이 한둘이 아닐 거라는 걸 예상할 수 있다.
통신 기기를 산다면, 내가 루터인지 모르는 사람에게 사야 한다.
으음, 일단 한국은 못 가고 일본?
나쁘지 않지.
PC방 비슷한 것도 있던 것 같고 돈만 있으면 인터넷 쓸 수 있잖아.
- 여기는 어때?
서지한이 가리킨 것은 미국 챕터였다.
페이지 첫 장부터 웅장한 계곡 사진이 보인다.
그랜드 캐니언?
확실히 황무지라 사람은 없어 보이긴 하는데 여기 인터넷 되나?
단순히 사람이 없는 것만 따지면 몽골도 나쁘지 않은데.
- 새우를 맘껏 먹을 수 있대.
“네?”
- 너 새우 좋아하잖아.
서지한이 가리킨 것은 그랜드 캐니언이 아니라 라스베이거스였다.
정확히는, 카지노.
“카지노에 가자고요?”
- 어딘가에 숨는다면 미국이 최고지. 땅은 넓고 신분 증명도 필요 없고. 다들 뚝뚝 떨어져 사는 동네잖아.
“아무리 그래도 카지노는…….”
- 그냥 잠깐 들르자는 거야. 너 통신장비 필요하잖아.
“통신장비랑 카지노랑 무슨 상관이에요?”
- 여기 뒷골목에 내가 아는 업자가 있어. 사실 전당포인데, 가끔 미국 고위 공무원들이 도박장에서 패가망신하고 대가로 이것저것 저당 잡히거든. 그중에 가끔 전 세계 어디서든 사용할 수 있는 대포 휴대폰이 들어와. 잠깐 들러서 그거나 사가자.
“아아, 그 업자 때문에 가자는 거였군요.”
전당포라.
서지한이 이런 곳을 어떻게 알고 있지?
으음, 혹시 라스베이거스에서 다 털려서 여기에 물건을 맡겨 본 적이 있는 걸까?
그럴지도 모른다.
그는 운이 없는 편이니까.
얼마나 탕진한 건지 좀 궁금하지만 상처 받을지도 모르니 묻지는 말아야지.
아무튼 내 시선을 받으며 서지한은 여행상품이라도 권유하듯 계속 라스베이거스의 장점을 말했다.
- 겸사겸사 랍스터랑 새우도 좀 먹고. 전에 괌에서 보니까 잘 먹던데. 좋아하는 거 아냐?
“좋아하긴 하는데…….”
- 그럼 결정됐네. 가자.
지금 이 시점에 카지노에 가도 되는 걸까?
놀러 가는 건 아니지만 미묘한 기분이다.
하지만 서지한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
게다가 전 세계 어디에서든 사용 가능한 통신기기, 그것도 추적당하지 않는 통신 기기는 진짜 매력적인 물건이다.
“그럼, 가죠.”
- 작별 인사는 하지 마. 괜히 나중에 행적 추적만 될 거야.
“그럴 생각이었어요.”
나는 침대 위에 약간의 몽골 돈을 내려놓고 여행 책자를 펼쳤다.
그리고 이동 스크롤을 찢었다.
이제 익숙해진 시야의 흔들림 뒤 젖은 공기가 훅 닥쳐왔다.
라스베이거스는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다.
몽골은 점심이 좀 지난 시간이었는데 여기는 완전히 한밤중이다.
너무 짧은 시간 동안 낮에서 밤으로 휙휙 이동했더니 약간 감각이 이상해지는 기분이다.
화려한 불빛을 한 바퀴 둘러본 뒤 나는 번쩍이는 내 머리 위를 올려다보았다.
WELCOME TO LAS VEGAS.
사진 속에서 봤던 환영 간판에 빗물이 부서지고 있다.
예상 이상의 환경 변화에 잠시 머리가 따라가지 못하는데, 서지한이 먼저 정신을 차렸다.
- 우산, 우산 없어?
내 인벤토리에 있는 물건은 공략을 위해서 챙겨둔 비축식량, 간식거리 같은 것뿐이다.
충왕류 던전에 비가 올 리가 없으므로 우산을 챙겼을 리가 없었다.
급한 대로 텐트 위에 덮는 방수천을 꺼내 썼다.
“저쪽이에요?”
턱을 타고 흐르는 빗물을 훔치며 묻자 서지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비가 얼마나 거센지 그 잠깐 사이에 몸이 쫄딱 젖어버렸다.
방수 천을 두르는 게 의미가 있을까 싶었지만 비를 맞고 싶지도 않았기 때문에 계속 쓰기로 했다.
- 저기, 번화가 뒷골목 쪽이야.
다행히 비가 와서 그런지 거리에 사람이 거의 없다. 어쩌면 밤 이어 서그런지도 모른다.
그래도 우산 하나 없이 천을 머리에 쓰고 다니는 건 이목을 모으고도 남았다.
나는 얼른 시선을 피해 뒷골목으로 숨어들었다.
여기가 정확히 어디인지는 모르겠지만, 거리가 화려할수록 뒷골목은 더욱 어두워지는 건 세계 공통인가 보다.
- 별로 멀지 않아. 이쪽으로.
서지한의 안내에 따라 걸을수록 길이 점점 으슥해졌다.
PAWN이라는 간판을 몇 개 지난 후 아무것도 안 팔 것 같은 구석진 뒷골목에 도착한 후에야 서지한은 한 가게를 가리켰다.
- 저기야.
“불이 꺼져 있는데요?”
- 아냐. 보안필름을 발라서 창문이 검게 보이는 거야. 열려 있어.
영 미심쩍었지만 그냥 돌아 나갈 수는 없어서 주춤주춤 가게로 걸어갔다.
귓가로 서지한의 작은 혼잣말이 들린다.
늘 열려 있지.
잠시 망설이다가 문손잡이를 잡고 밀었더니 정말로 문이 열렸다.
문 위에서 작게 종소리가 들렸다.
때마침 등 뒤로 번개가 번쩍여 가게 안을 확 밝혔다.
그 불빛에 맞춰 백발이 성성한 할아버지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주름이 자글자글한 눈가.
한쪽 눈은 실명했는지 허옇게 떠있는 할아버지가 멀쩡한 나머지 눈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제 앞을 턱짓했다.
들어오라는 뜻인 것 같다.
“What do you need? Money or stuff?”
당연하겠지만, 영어로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