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6화
승주는 대학가 빌라촌 1층에 살고 있었다.
버스를 타려면 20분 정도는 걸어야 하고, 좁은 골목이 굽이굽이 이어진 미로 같은 구 시가지다.
주변에 대형 마트나 편의 시설이라곤 없지만 그나마 편의점이 하나 있어서 감지덕지하며 산다고 했다.
나는 그 좁은 골목길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투명화 스크롤을 찢었다.
죽은 듯이 조용했던 엄마 집과 달리 여기는 대학가라 그런지 늦은 시간인데도 여기저기서 인기척이 들렸다.
불 켜진 집도 꽤 보인다.
투명화를 마친 뒤 조용히 걸어 승주의 자취방 창문으로 다가섰다.
방충망 너머의 방은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그리고 그 바로 앞에 놓인 책상. 이승주가 자주 쓰는 책상이다.
다행히 이사를 가지는 않았는지 창 너머로 보이는 풍경이 친숙했다.
“어어, 밥 먹었지. 여기 새벽 세시 다 됐어, 엄마.”
창문가로 다가서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창문 아래에 바짝 붙어 흘러나오는 승주의 목소리에 귀 기울였다.
마침 엄마와 통화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다행히, 엄마도 아직 무사한 것 같다.
“나 원래 이 시간까지 안자잖아. 게임 좀 하다가 자려고. 응, 에이. 오래 안 해. 그동안은 아르바이트하느라 시간이 없어서 못 한 거고 이제 알바 안 해도 되니까 조금씩 친구들이랑 하고 있는 거야.”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에 가슴이 저려오는 기분이다.
어차피 투명화 상태니까 모습이 보일 리 없으니 나는 조금 더 대범하게 창문 너머로 승주를 찾아보았다.
“엄마는? 아, 지금 바르셀로나라고? 아, 바르셀로나〜 재밌어? 응응. 그래, 나중에 같이 가. 어? 누나?”
태연하게 통화하던 승주가 멈칫했다.
방충망 너머로 보이는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있다.
“그래, 누나랑 같이 가자. 응. 아직 안 나왔나 봐. 응, 알았어. 귀국하면 내가 공항으로 갈게. 응, 엄마 재밌게 놀다가 와. 사진 많이 찍고〜응, 응, 끊을게〜”
통화를 마친 승주는 잠시 휴대폰을 바라보다가 마른세수를 했다.
그리고 한숨을 푹 쉬는데 전화가 끊기기 무섭게 다시 또 전화가 울렸다.
이번에는 친구인 것 같다.
“여보세요? 어. 어. 누나 뉴스 봤다고?”
봤구나.
반서진 헌터가 나를 포함한 다른 팀원들을 모두 죽였다는 속보.
너무 태연해서 승주는 뉴스 속보를 못 본 줄 알았다.
“응. 걱정해줘서 고마워. 술? 에이, 지금은 그럴 기분 아니야.”
잠시 승주는 휴대폰 너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저쪽에서 이런저런 위로를 하고 있는 모양이다.
그나저나, 백광 길드에 있을 대리님과 차장님은 어쩌고 있을까.
집도 모르는 데다 지금 백광 길드로 찾아갈 수도 없으니.
별 소식이 없는 걸 보니 무사하시겠지?
백광 길드로 간다던 반서진이 그대로 잡혀 버렸으니 길드장도 아직 살아 있을지도.
신문에 얼굴이 나오지 않는 건 좀 이상 하지만.
“어, 그래. 고마워. 걱정해줘서. 근데, 나는 괜찮아.”
의연하게 말하던 승주는 잠시 말을 끊고 감정을 갈무리하더니 다시 담담하게 이었다.
“누나도 괜찮을 거고. 네가 못 봐서 그래. 우리 누나가 얼마나 강한데. 그 반서진 헌터인가 하는 사람도 본인이 죽였다고 직접적으로 증언은 안 했다며. 응, 그러니까 다른 소식 더 나올 때까지 기다려보려고.”
다시 승주가 말을 끊었다.
친구도 그제야 생각이 미쳤는지 괜찮을 거라며 승주를 다독이는 소리가 작게 들렸다.
“그래. 엄마한테는 아직 말 안 했어. 걱정하실까 봐. 귀국할 때까지는 말 안 하려고. 그래, 너도 쉬고. 에이, 안 좋은 생각은 무슨. 내가 그런 거 하는 사람으로 보여? 아무튼 알았어. 누나 욕하는 악플 보면 신고 좀 해 주고. 그래, 고마워.”
통화를 마친 승주는 다시 책상 앞으로 다가앉았다.
그리고 키보드에 손을 올리고 뭔가를 집중해서 타이핑하기 시작했다.
모니터에 뭐가 떠 있는지 궁금하지만 각도상 볼 수가 없어서 답답했는데, 서지한이 쓱 들어가서 보고 나왔다.
- 인터넷 기사 보고 있는데?
그리고 때마침 승주가 분통을 터뜨렸다.
“와, 개자식들. 댓글 진짜 더럽네. 알지도 못 하는 것들이……. 내가 너네 다 신고 넣는다.”
씨근덕거린 승주는 다시 집중해서 작업에 몰두했다.
어쩐지 흐뭇하게 그걸 보던 서지한이 다시 나에게 상황을 알려 주었다.
- 너 욕하는 글마다 얘가 맞서 싸우는 댓글 달고 다닌다. 동생 잘 뒀네.
솔직히 좀 감동했다.
지금 본인 심정도 말이 아닐 텐데 날 생각해서 이렇게까지 해주다니.
그런데 서지한은 왜 또 뿌듯해하는 거야.
약간 어처구니없는 기분으로 서지한을 흘끔거리는데 그가 돌연 얼굴을 굳혔다.
- 누가 온다.
갑작스러운 말에 느슨하게 풀려 있던 경계심이 단번에 치솟았다.
얼른 건물 옆 틈으로 모습을 감추자 검은 세단 한 대가 좁은 골목길을 비집고 들어오더니 승주의 빌라 앞에 쓰윽 멈췄다.
그리고 그 안에서 누가 봐도 수상해할 법한 차림의 남자들이 튀어나왔다.
새카만 정장은 그렇다 쳐도, 이 밤중에 선글라스까지?
- 아무래도 그놈들 같지?
“승주를 납치하러 온 걸까요? 그러면…….”
- 쉿. 조금만 지켜보자.
생각 같아서는 단숨에 방으로 뛰어들어가 승주를 낚아채서 이동 스크롤을 찢고 싶었지만 뒷일을 생각하면 아직 참아야 한다.
나는 언제든 스킬을 쓸 수 있게 준비하면서 남자들이 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바로 승주의 방으로 들어갈 줄 알았는데 남자들은 의외로 승주에게 들키지 않으려는 듯 조심조심 움직였다.
집 주변에 감시 카메라 같은 것을 설치하더니 바닥에 수상한 가루를 뿌렸다.
그리고 마지막이라는 듯 아이템 하나를 꺼내어 승주가 있는 집 벽에 붙였다.
그 아이템이 벽에 붙자마자 서지한이 다급하게 외쳤다.
- 너 투명화 풀렸어!
저 아이템의 정체는 투명화 감지 아이템이었던 모양이다.
나는 뭔가 생각할 틈도 없이 모습이 드러나자마자 바로 이동 스크롤을 찢어 사람이 없을 만한 곳으로 돌아왔다.
아무래도 내 무의식에서 사람이 없는 장소는 이 사막으로 굳어진 모양이다.
나는 아까 유은담과 피했던 그 사막에 다시 돌아와 있었다.
너무 놀라서 아직도 가슴이 쿵쿵 뛴다.
한숨 돌리며 사막 모래에 털썩 무릎을 찧는데, 서지한이 다가와서 나를 다독였다.
- 괜찮아. 안 들켰을 거야. 어쨌든 가족들이 무사한 거 봤으니 괜찮지?
“그러게요. 그리고 감시 카메라 같은 거 붙이는 거 보니까, 당분간은 감시만 하고 해치지는 않을 것 같아요. 또 찾아가는 건 좀 힘들겠지만.”
투명화 감지 아이템이 설치된 이상 지금 같은 방법은 안 된다.
다시 가족들을 찾아가려면 다른 방법을 강구해야 했다.
그래도 두 사람이 무사한 걸 확인하니 한결 안심이 되었다.
- 그래. 이제 너도 좀 쉬어. 입술이 파란색이야.
“그냥 방금 좀 놀라서 그래요.”
- 농담하는 거 아니야. 안색 진짜 안 좋아.
나는 결국 어깨를 으쓱였다.
그리고 사방을 둘러보다 저 멀리 보이는 불빛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마침 내가 걷는 방향으로 동이 터오기 시작했다.
어슴푸레하게 금빛으로 물드는 사막은 굉장히 장관이었다.
* * 半
“랭킹보드!”
멍하니 누워 있던 내가 다급하게 몸을 일으키자 서지한이 깜짝 놀라 다가왔다.
맙소사, 이걸 왜 지금 떠올렸지?
“랭킹보드요! 저 바르기스 잡았잖아요!”
- 진정해. 안 올라갔을 거야.
“아니, 제가 바르기스에게 마지막 일격을 날렸다니까요? 사실상 제가 바르기스 죽인 거나 다름없잖아요. 보스 급을 단독으로 잡았으니 랭킹보드에 이름이 올라갔을 텐데!”
유은담과 헤어진 후 숙소를 구해 한 숨 자고 일어날 때까지도 나는 이걸 전혀 떠올리지 못 하고 있었다.
랭킹보드는 아주 오랫동안 나와 상관없는 항목이었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이야기가 다르다.
랭킹보드에 당당하게 ‘손모아’라는 이름이 찍혀 있으면 죽은 척 숨어 사는 계획은 물 건너가는 셈이다.
- 10위까지만 표시되니까 네 이름은 안 나타날 거야.
서지한의 말을 귓등으로 흘리며 나는 허겁지겁 마켓을 열고 랭킹보드로 진입했다.
위쪽부터 꼼꼼하게 순위를 확인해보니 다행히도 내 이름이 없었다.
“없네요.”
약간 허탈하기도 하고 안심되기도 해서 다시 털썩 주저앉았더니 서지한이 거보라는 듯 눈을 깜빡였다.
- 없다니까.
“그러게요.”
- 근데 지금 순위는 몇 등이야?
“149등이요.”
- 거 봐.
이해가 안 된다.
보스 몬스터를 잡았는데 순위가 이렇게 낮을 수 있나?
내 표정을 본 서지한이 피식 웃으며 설명했다.
- 너는 이제 겨우 던전에 다니기 시작했잖아. 5년 동안 부지런히 던전을 다녀서 몬스터를 죽이면서 포인트를 쌓아 온 헌터들의 누적 점수를 한 방에 이기기는 힘들지.
“음.”
내가 납득하지 못한 얼굴을 했는지 덧붙여 설명했다.
- 그리고 엄밀히 말하자면 혼자 잡은 건 아니었지. 유은담의 공헌도 있었으니까 실질적으로 많은 점수를 먹지는 못했을 걸.
으음, 하긴.
그렇긴 하지.
랭킹 보드의 점수 시스템, 생각보다 여러 가지를 고려해서 측정해주는구나.
어쨌든 이름이 안 올라가서 잘 됐다.
“다행이네요.”
- 그렇지. 진정할 겸 바깥공기라도 마셔.
괜찮은 생각이었다.
진짜, 아직까지 심장이 펄떡거린다.
랭킹보드를 떠올린 그 순간 진짜모든 걸 다 망친 줄 알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정말 온갖 생각이 다 들었다.
내가 잠들어 있는 동안 가족들이 벌써 잡혀가서 고초를 당하고 있는 건 아닐까 등등.
그의 말대로 나가서 바람도 쐬면서 마음을 가라앉혀야겠다.
“센베노. 배고파요?”
문을 열고 나가기 무섭게 어눌한 한국어가 들렸다.
내가 묵고 있는 숙소 주인의 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