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74화 (74/231)

074화

아니, 얘가 큰일 날 소리를!

“예? 아니, 아니에요!”

타이밍 좋게 서지한이 끼어들었다.

- 따라 해. 예전 충왕류 던전에 갇혔을 때 내가 구해준 적이 있다고. 사실이잖아? 그때 옆에서 싸우는 걸 봐서 안다고 해.

그는 혀를 차며 슬쩍 조언을 남겼다. 나는 얼른 그의 말을 받았다.

“그냥 예전에 충왕류 던전에 갇혔을 때 서지한 헌터가 저를 구해준 적이 있어요. 그때 싸우는 것도 봤고요. 워낙 강렬한 기억이라 아직도 기억하는 것뿐이에요.”

“으흠.”

“진짜예요!”

잠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차가운 사막 바람이 식은땀에 젖은 등을 때렸다.

한동안 말없이 나를 바라보던 유은담은 갑자기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일단 알겠어요. 뭐, 그 형이야 어디 가서 잘 살아 있을 테니 신경 끄죠. 솔직히 제가 아는 사람 중 제일 강한 인간이라, 혼자 보스 던전에 들어가도 가볍게 죽이고 나올 것 같은 인물이거든요.”

유은담은 가볍게 웃었으나 나는 따라 웃을 수 없었다.

그의 곁에 선 죽은 서지한이 유은담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너무 쓸쓸한 느낌에 갑자기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으음, 그런데 아직까지 놈들이 왜 이렇게 큰일을 벌이는지 이유를 모르겠네요. 서지한 헌터도 그렇고, 저도 그렇고 건드리기 만만한 상대는 아닌데.”

동의한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여주자 유은담이 약간 쑥스러운 듯 말을 이었다.

“게다가 국가적으로도 꽤 유용한 전투 자원이라 제거할 이유가 없거든요. 지한이 형도 마이웨이 타입이긴 해도 비상사태 때는 협조해주는 편이고.”

그 말에 나도 같이 생각에 잠겼다.

서지한과 유은담은 확실히 한국에서 손에 꼽힐 만큼 강한 헌터이고, 그만큼 국가가 아끼는 인재였다.

그런 사람을 왜?

회유해서 이용하는 게 차라리 더 낫지 않나?

어차피 언론을 주무를 정도의 권력자에게 서지한이 대항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 텐데.

아, 혹시 그래서 여론을 악화시키는 건가?

서지한에 대한 이미지가 어마어마하게 나빠져서 그가 갈 곳도 없고 세력도 만들 수 없을 정도로 외톨이가 되도록?

“아.”

“네?”

“저와 지한이 형의 공통점이 하나 있긴 해요.”

“뭔데요?”

“보스 몬스터를 잡는 것에 찬성하는 편이라는 거요. 그리고 보스 몬스터를 잡을 수 있을 정도로 강한 공격력을 가지고 있다는 거.”

강한 공격력?

유은담이 그런 걸 가지고 있던가?

아까 바르기스 다 못 잡아서 내가 잡았잖아.

나는 굳이 그 점을 지적하지 않았다.

뭐, 바르기스가 느린 상태였을 때는 한번 죽였으니 화력이 있다고 볼 수 있겠군.

그나저나, 보스 몬스터를 잡는데 반대하는 사람이 적이라고 생각하니 갑자기 한 사람이 떠오른다.

천공 길드 길드장 반서후.

서지한의 친구였던 사람.

서지한이 천공 길드를 탈퇴하고 반서후와 척을 진 것은 반서후는 던전을 유지하며 그 아이템으로 앞으로 벌어질 일에 대처하기를 바랐고, 서지한은 위험물인 던전을 빨리 제거하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어느 한쪽을 악이라고 규명하기 힘든, 나름대로 타당한 이유를 가진 의견 갈등이었다.

하지만 반서후가 정말로 보스 몬스터를 죽일 만한 화력을 가진 헌터를 모조리 제거하기로 마음먹었다면 그의 저울추는 명백하게 ‘악’으로 기울게 된다.

게다가 거대 길드의 이익을 위해 중소 길드의 공략 팀을 살해하고 타 길드의 길드장을 납치하고 여론까지 주무르며 옛 친구에게 누명을 씌워 그 사람을 계도조차 할 수 없는 악인으로 만든다?

이건 정말로 선을 넘은 행동이다.

생각할수록 점점 반서후가 배후라는 확신이 생겼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도 종종 서지한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는 짓을 했다고 들은 것 같다.

서지한은 복잡한 표정이었다.

틀어진 사이라고 하나 옛 친구였다.

비록 의견 차이 때문에 갈라서긴 했지만 그래도 끔찍한 형태의 절교는 아니었다.

그런데 그 친구가 자신을, 그리고 친한 동생마저 죽이고 싶어 한다면…….

- 아직 확실한 건 아니니까.

내가 반서후를 떠올리고 있다는 걸 눈치챘는지 서지한이 작게 중얼거렸다.

그래, 너무 섣불리 짐작하지 말자.

“으음, 딱히 떠오르는 사람이 없네요. 아니, 너무 많은가? 던전 아이템으로 장사하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다 의심이 가는데요.”

유은담은 반서후와 서지한이 다툰 사실을 모르는지 태평하게 이야기했다.

하긴, 반서후뿐만이 아니긴 하지.

거대한 이해관계가 얽혀 있다고 했으니 반서후는 그냥 수많은 적들 중한 명일지도.

“그 카메라, 영상은 그게 끝인가요? 슬슬 가야 할 것 같은데, 가기 전에 정보 좀 더 얻을 수 있으면 좋겠거든요. 역시 심문을 했어야 했는데, 바르기스가 나타나서 다 망쳤네.”

깍지 낀 팔을 늘리며 유은담이 나를 돌아보았다.

그 말을 듣고 영상 목록을 살펴보니 바깥쪽에 별도로 분리된 폴더 하나가 더 있었다.

들어가 보니 몇 개의 동영상이 더 있었는데, 대부분 최근 일자였다.

썸네일을 보니 모두 충왕류 던전에서 찍은 것인 듯하다.

“더 있네요.”

유은담이 냉큼 다가왔다.

복면인들끼리 나눈 비밀대화라도 찍혀 있으면 일이 좀 쉬워질 텐데.

“재생할게요.”

첫 번째 영상은 내가 모르는 내용이었다.

아마 바르기스 던전인 것 같은데 에비타니스 같은 것이 잔뜩 자라 있었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누군가에게 감시받으며 에비타니스를 채집하고 있었다.

화면이 작아서 잘 보이지는 않지만, 채집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뭔가 소란이 일어나더니 몇몇이 감독관에게 항의하는 듯했다.

그리고 이어서 채찍과 주먹이 그들에게 날아들었다. 두들겨 맞는 소리가 이어지다가 영상이 끝났다.

“이게 뭐죠?”

내가 지금 뭘 본 거지?

내가 생각하는 그거 맞나?

유은담도 매우 충격받은 표정이었다.

그리고 이게 무엇인지 좀 더 확실하게 알고 있는 듯했다.

“뭔지 알고 있는 표정이신데.”

“이건, 농장이에요.”

입술을 깨문 유은담이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내가 부연설명이 필요하다는 얼굴을 했는지, 뭐라 말하지도 않았는데 유은담이 설명을 덧붙였다.

“저도 소문으로만 들었는데, 비전투계 헌터들을 납치해서 채집 노예로 쓰는 범죄 조직이 있다고 합니다. 국내 던전은 우리가 계속 공략하고 있으니 저런 범죄를 숨길 수 있을 리가 없는데. 그래서 헛소문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영상 속의 목소리는 작긴 했지만 확실히 한국어였다.

“그럼 국내 던전이 아니거나, 아니면 그쪽 눈을 피해서 하고 있다는 거네요.”

“말도 안 돼요. 던전 공략을 얼마나 자주 하는데요. 길드원들의 눈을 다 피할 수는…….”

말을 하던 유은담이 멈칫했다.

암현 길드 길드원들이 별로 믿음직한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낸 모양이었다.

애초에 그가 감금된 이유도 그렇게 믿던 길드원에 의한 짓이었잖아.

그나저나 진짜 채집 노예가 있었구나.

이것도 모르고 내 스킬을 만천하에 밝히며 살았다면 나도 이 영상 속에 있었을지도 모른다.

정말 노예로 잡혀갈 뻔했다는 생각을 하니 새삼 오싹해졌다.

역시 능력을 감추고 살수록 좋은 거야.

앞으로도 조심, 또 조심하자.

와, 그나저나 내가 각성하지 않았다면 세상에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꿈에도 몰랐겠네.

아무것도 모르면서도 몸을 잘 사려서 무사히 살아 있는 나 자신에게 칭찬을…….

잠깐, 지금 이 상황이 무사히 살아있다고 해도 되는 상황인가?

에이, 채집 노예 상태보다는 훨씬 낫지 뭐.

“그런데 여기 이 던전, 어디인지 알겠어요? 그냥 보기에는 충왕류 던전 같은데.”

내 말에 유은담이 다시 화면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바르기스 은신처 근처의 에비타니스 꽃밭 같네요. 음, 아마 제 마력으로 저기까지 결계를 쳐서 농장으로 만들어 뒀나 봐요.”

“던전 안에 다른 패거리도 있었겠군요. 그러니까, 농장 담당이요.”

“그렇죠.”

“그러면 저 사람들, 바르기스가 죽고 생겨난 게이트로 탈출했겠죠?”

“아마도요.”

부디 그랬으면 좋겠다.

“이 영상들은 쓸모가 있겠어요. 잘 가지고 있으세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카메라를 인벤토리에 잘 보관해두었다.

사실 마음 같아서는 지금 바로 언론에 이 영상을 제보하고 싶다.

하지만 제보한다고 해도 정상적으로 방송될지 확신이 없다.

이 영상뿐만이 아니다. 농장에서 탈출한 사람들이 채집 노예 생활을 직접 호소한다고 해도 통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다.

최악의 경우 역으로 언론 플레이에 당할 수 있다.

거기에 제보자를 찾다가 내가 살아있는 걸 들키기라도 하면 내 가족들도 위험해진다.

영상을 사용하는 건 배후를 모두 밝히고 가족들을 안전한 곳에 피신시킨 다음이었다.

“그럼, 일단 저는 암현 길드에 복귀해서 다른 길드장들과 접촉해볼게요.”

유은담이 떠나려는 듯 운을 띄웠다..

“아, 그리고.”

그가 갑자기 인벤토리에서 무엇인가를 꺼냈다.

잘 포장된 작은 과자 두 개였다.

녹색과 분홍색.

그걸 각각 반으로 파삭 쪼개더니 한쪽씩을 나에게 내밀었다.

과자? 갑자기?

“보안 처리 안 된 일반 휴대폰은 도청될 가능성이 있으니까 연락은 이거로 하죠.”

맥락상 아무래도 이 과자로 연락을 하자는 것 같은데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

왜 두 개를 꺼내서 온전한 하나를 주지 않고 굳이 반으로 쪼갠 거지?

맛이 다른가?

“녹색은 제가 먹을게요. 여기, 나머지 반쪽 보관하세요.”

내가 과자를 받아 들자 유은담이 가지고 있던 녹색 한쪽을 날름 먹어버렸다.

“분홍색 유과는 손모아 헌터가 먹고요.”

그렇게 말하며 유은담은 나에게 먹으라고 내민 분홍 과자의 절반을 가져가 인벤토리에 넣었다.

과자는 파삭파삭한 질감의 검지 손가락만 한 크기의 유과다.

손에 찹쌀가루까지 묻어난다.

엄청 맛있어 보이긴 하는데 이게 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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