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2화
내가 아이템을 챙기는 것을 기다려준 유은담이 게이트를 응시했다.
이글거리는 탈출 게이트를 보니 잠시 잊고 있던 문제가 떠올랐다.
바르기스를 죽인 건 잘되었지만 아직 끝나지 않은 일이 산적해 있다.
“잠깐만요.”
이대로 나가면 들어올 때 사용했던 던전 입구로 나가게 된다.
던전 관리청이 관리하는 던전 입구 말이다.
던전 관리청의 모든 인간들이 그 복면인과 같은 세력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정황을 보면 던전 출입 정도는 마음대로 할 수 있을 만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게 확실해 보였다.
그렇다면 던전을 관리하는 보안 팀에도 그들의 세력이 침투했을 가능성이 높다.
어쩌면 그들이 말하는 ‘외부 팀’ 자체가 보안 팀을 말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적의 실체를 모르는 이상 무방비하게 모습을 드러내는 건 무모한 짓이었다.
그렇다고 삼엄하게 관리되는 던전 출입구에서 모습을 감추는 것도 불가능하다.
던전 출입구는 사방이 봉쇄되어 도망칠 곳도 없고 투명화 아이템도 통하지 않으니까.
하지만 그건 던전이 통상적인 상태일 때의 일이다.
이 던전은 곧 소멸한다.
던전이 소멸한다는 것은 즉, 던전이 생성될 때 빨아들였던 공간을 다시 뱉어낸다는 뜻이었다.
던전이 소멸되기 직전 얼굴을 가리고 뛰쳐나가면 이어서 오그라들었던 공간이 확 팽창하며 소란이 일어날 테고, 그 틈에 몸을 빼면 도망칠 수 있겠지.
“아직 나가면 안 돼요. 던전 소멸 직전까지 기다려요.”
어른거리며 흐려지기 시작하는 게이트를 바라보며 나는 담요를 꺼내 몸과 얼굴을 가렸다.
유은담은 잠시 황당해하다가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던전이 소멸하면 영원히 사라진다는 건 알고 있죠? 실종될 수도 있는데 괜찮아요?”
“그렇게 되지 않을 거예요.”
- 오, 멋있는데.
그냥 아무 말이나 한 것인데 서지한이 감탄하니 좀 민망하다.
나는 잔뜩 긴장하고 게이트를 응시했다.
그리고 탈출 게이트가 사라지기 직전, 그 안으로 뛰어들었다.
성공했다.
게이트를 나온 직후에는 던전 관리청이 관리하는 던전 출입구였지만 담요가 한 차례 펄럭이고 나자 눈앞의 풍경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으스러진 건물 잔해와 박살난 자동차, 무너진 콘크리트가 가득한 폐허가 보였다.
대부분의 구조물이 파괴된 이곳에는 시야를 가릴 만한 것이 별로 없어서 탁 트인 폐허 저 멀리에 원래 던전 출구가 있었을 법한 장소가 보였다.
나는 유은담의 손을 잡고 연상형 공간이동 스크롤을 찢었다.
“사막?”
우리가 이동한 곳은 예전에 지나가듯 봤던 여행 책자 속의 한 사막이었다.
막연히 사람들의 눈을 피할 만한 장소를 찾다 보니 그냥 이곳이 떠올랐다.
그때 봤던 사진 속의 풍경은 황금빛으로 빛나는 대낮의 사막이었는데, 지금은 찬바람이 불어 닥치는 새카만 밤이다.
그래도 하늘의 별만은 밝았다.
그나저나 진짜 오랜만에 마시는 신선한 공기다.
독 섞인 충왕류 던전의 매캐한 공기만 맡으며 살다가 이런 광활한 대자연의 맑은 공기를 마시니 이제야 좀 살 것 같았다.
“여기는 어디죠?”
심호흡을 하며 신선한 공기를 가득들 이마시고 있는데 유은담의 질문이 들렸다.
어디더라?
그냥 사진으로만 본 곳이라서 정확한 위치는 모르겠다.
“저도 잘 몰라요. 그냥 예전에 본사진으로 떠올려서 온 거예요. 뭐, 어딘가의 사막이겠죠.”
솔직하게 대답했더니 유은담은 더 묻지 않았다.
하긴, 지금 여기가 어디 붙어 있는 사막인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나는 모래 언덕 너머로 보이는 불빛을 잠시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관광지와 그리 멀지는 않은 사막인가 보다.
하긴, 여행 책자에 있던 사진이니까.
“일단 인터넷이든 뭐든 검색해서 바깥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확인해보죠.”
자연스럽게 휴대폰을 꺼내려던 나는 순간 멈칫했다.
그런데 여기 외국이잖아.
로밍도 안 해둔 휴대폰이 터질 리가 없다.
이런, 저기 멀리 보이는 마을에 가봐야 하나?
하지만 다행히 유은담이 제 휴대폰을 꺼냈다.
로밍이 되어 있는지 그의 휴대폰에는 한국 포털 사이트가 떠올라 있었다.
“신문기사? 이 던전에서 있었던 일이 벌써 기사화되었을까요?”
대답 대신 유은담은 휴대폰을 나에게 넘겼다.
화면에 나열된 글자를 확인하자마자 나는 홀린 듯이 스크롤을 내렸다.
- 〈속보〉 반서진 헌터 던전에서 팀원 살해, 긴급 체포.
- 중소 길드의 참극, 아이템 욕심이 불화 불렀나. 공략 인원에 괌의 영웅 손모아 헌터도 있는 것으로 알려져…….
기사 아래쪽에는 손발이 구속된 채 입마개를 하고 있는 반서진의 사진이 있었다.
누군가의 손이 그녀의 뒤통수를 억세게 눌러 고개를 숙이게 하고 있다.
덕분에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확실히 반서진 헌터 본인이었다.
속보라서 별다른 내용은 없었다.
우리가 바르기스를 죽이고 던전을 닫은 사실은 아직 알려지지 않은 모양이다.
아래쪽에는 벌써 눈을 어지럽히는 댓글이 잔뜩 올라와 있었다.
an**** 06:51:03
개무섭네. 어떻게 죽인 거임?
⇧ 18 ⇩ 3
nyt**** 06:51:03
생긴 대로 논다. XX 기 세게 생겼네.
⇧ 64 ⇩ 23
ha**** 06:51:03
손모아 인가 걔도 죽은 거임?
⇧ 90 ⇩ 13
↳ rain**** 06:52:04
그런 듯?
⇧ 1 ⇩ 0
sae**** 06:51:03
손모아는 뭐 한 거지? 얘가 걔보다 더 셈?
⇧ 17 ⇩ 3
↳ rae**** 06:52:04
기습해서 뒤통수친 거 아닌가.
⇧ 19 ⇩ 5
yo**** 06:51:03
헌터라고 봐주기 처벌하지 말고 엄벌하길
⇧ 32 ⇩ 2
him**** 06:51:03
또 헌터라고 집행유예 뜨겠지.
⇧ 43 ⇩ 1
dul**** 06:51:03
손모아랑 싸웠나? 손모아도 유명해서 싹수없게 했을 거 같은데.
⇧ 89 ⇩ 2
↳ do**** 06:52:04
손모아랑 트러블 있어서 그런 거 맞는 듯.
⇧ 94 ⇩ 2
da**** 06:51:03
손모아 싸가지 보면 서로 긁다가 터진 듯. 그니까 자업자득.
⇧ 45 ⇩ 23
gu**** 06:51:03
손모아 미국 갔다더니 아직 한국에 있네.
⇧ 17 ⇩ 0
↳ jam**** 06:52:04
미국에 비비다가 실패한 거 아님?
⇧ 34 ⇩ 4
↳ dl**** 06:52:04
길드도 중소 길드 들어간 거 보면 거품임 ㅋㅋ
⇧ 6 ⇩ 0
더 보지 않고 휴대폰을 돌려줬다.
서지한이 내 표정을 살피는 게 느껴져서 살짝 웃어주었다.
내가 미국에 망명했다는 루머는 이미 기정사실로 굳어진 모양이다.
자세한 내용은 모르지만 아무래도 우리가 습격당한 사건을 반서진 헌터가 모두 덮어쓴 것 같은 느낌이었다.
게다가 우리가 습격당한 상황을 말하지 않았을 리가 없는데 그 내용만 쏙 빠져 있다.
역시 ‘외부 팀’이 뭔가 작업한 결과가 틀림없었다.
만약 이 상황에 내가 모습을 드러내면 나에게도 뭔가 작업이 들어올 가능성이 높겠지.
“으음. 한참 작년 사진인데 이걸 어제 일자로 보도했네.”
그새 자신의 이름을 검색해 그간의 기사를 살펴보던 유은담이 낮게 앓았다.
그의 휴대폰에는 이곳저곳 놀러 다니고 있는 유은담의 사진이 떠 있었다.
아무래도 언론도 유은담의 납치를 은폐하는데 협조하고 있나 보다.
일반 길드원들은 유은담이 정말로 길드를 방치하고 놀러 다닌다고 생각할 수 있겠다.
바르기스를 죽이고 적들의 눈을 피해 탈출에 성공하는 쾌거를 올리긴 했지만 아직 완전히 안전해진 것이 아니었다.
나만 그런 게 아니라 유은담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결국 비슷한 처지였다.
“유은담 씨는 이제 어떻게 할 거예요 ?”
솔직히 나는 이런 상황이 처음이라 뭘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하지만 유은담은 그래도 헌터 업계에서 이런저런 일을 많이 해봤으니 뭔가 방법이 있지 않을까?
“손모아 헌터는 어떡하려고요?”
휴대폰을 움켜쥐고 뭔가 생각하는듯하던 그가 질문을 되돌려 주었다.
나는 순순히 고개를 적었다.
“솔직히 잘 모르겠네요.”
“그럼, 어떻게 하고 싶은데요?”
어떻게 하고 싶냐, 라.
지금 머릿속에 떠오르는 건 나의 안락한 집과 가족들뿐이었다.
내가 습격당한 것처럼 가족들도 습격당한 건 아닐까 하는 걱정뿐이다.
“가족들을 찾아가서 안전한 걸 확인하고 싶어요.”
“으음, 마음은 이해하지만 혹시 찾아갈 거라면 조심해서 가세요. 던전이 닫혔으니 그 사이 손모아 헌터가 살아서 탈출했을 가능성도 계산하고 있을 거예요. 그때를 위해서 가족분들을…….”
예의 바르게도 유은담은 노골적인 뒷말을 생략했다.
하지만 나는 그 뒷부분을 상상하는 것만으로 심장이 뛰었다.
“죽일 거라고요?”
“예? 아뇨, 아니요! 손모아 헌터를 구슬리려고 인질로 삼거나 그럴 수 있다는 거죠. 아니면 손모아 헌터가 가족들에게 찾아올 거라고 예상하고 기다리고 있거나 그럴 수 있다는 거죠.”
다급하게 나를 진정시키는 말에 나는 약간 누그러졌다.
하지만 여전히 불안했다.
이유 없이 공략 팀을 죽이려던 놈들이…… 엄밀히 말하자면 이유가 없는 건 아니었지만.
아무튼 그런 놈들이 가족을 해치지 않을까?
- 괜찮을 거야. 이번 일로 다른 사람들도 네 가족을 주시하고 있을 텐데 그런 일이 일어나면 누군가 의심을 품겠지. 그렇게 눈에 띄는 짓 은 하지 않는 게 그들 입장에서도 좋아. 그리고 만에 하나 네가 살아 있을 경우 협상 카드로 쓰기 위해서라도 해치지 않을 거야.
나는 간신히 고개를 끄덕이고 납득했다.
하지만 그것 외에도 걱정되는 건 잔뜩 있었다.
언론에서는 나의 죽음을 기정사실화하고 있는데 엄마가 얼마나 슬퍼할까 생각하면…….
하지만 지금은 숨어야 한다.
섣불리 몸을 드러냈다가는 ‘손모아 헌터, 던전 공략 팀 살해범 반서진 공범’이라는 뉴스가 뜰지도 모르니까.
“생각보다 상황이 되게 복잡하네요. 솔직히 별거 아닐 거라고 생각했는데……. 안에 있는 놈들이나 길드원 몇 명 붙잡아서 족치면 대충 상황 다 정리될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근데 이게.”
유은담은 끝없이 나오는 자신의 합성 사진을 보고 있었다.
지금 그가 보고 있는 건 벌써 몇 달이나 지난 기사다.
저것조차 합성이라면, 유은담은 대체 얼마나 오래 감금되어 있었던 건지.
“솔직히 실종신고 정도는 되어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최악의 경우에는 제 측근들이 다 넘어갔을 수도 있겠네요. 아니면 아까 처단한 배신자들처럼 그쪽에 의해 몰살당했거나.”
그의 말에 잊고 있던 잔인한 광경이 떠올랐다.
내 안색이 나빠졌는지 유은담이 내 눈치를 살피며 덧붙였다.
“그,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저 원래 그렇게 사람 막 죽이고 그러지 않아요. 아까 그놈들은 뒤통수까지 치고 날 죽이려고 했으니까 순간 눈이 돌아가서 그런 거고…….”
우물쭈물 변명하는 유은담을 서지한이 재미있다는 듯 응시했다.
나도 좀 의외였다.
그가 나에게서 악감정을 사기 싫어 전전긍긍하는 것처럼 느껴지면 착각인가?
“괜찮아요. 충분히 이해해요. 다만 그냥, 그런 장면에 면역이 좀 없어서…….”
딱히 유은담을 비난할 생각은 없다.
내가 구하지 않았다면 몇 달 동안 거기서 물건처럼 포장당한 상태 로 마력을 빨아 먹히다가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