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0화
바르기스의 이름을 보는 순간 눈앞이 아득하게 멀어지는 듯했다.
다른 헌터들에게도 메시지가 표시되었는지 다들 아연한 얼굴이다.
상황 파악이 빠른 몇 명은 벌써 절망에 빠져 있었다.
이어서 땅에서 잔잔한 진동이 느껴졌다.
이어서 모여 있는 헌터들의 발아래가 들썩이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깨달은 사람들이 뒤늦게 도망치려고 몸을 날렸다.
방금까지 적이었던 유은담이 마치 구세주처럼 보이는 모양이다.
살려 달라 외치며 이쪽으로 뛰어오는 그들을 유은담은 관망하기만 했다.
하긴, 바르기스에 비하면 유은담은 협상의 여지라도 있으니.
발밑이 점점 불안정해지고 있었다.
나는 간신히 위압에서 빠져나와 탈출석을 꺼냈다.
아무 생각도 없었다.
바르기스가 나타나기 전에 뭐든 해볼 생각이었다.
그리고 탈출석을 부수는 순간 나는 왜 게이트가 생성되지 않았는지 이해했다.
- 보스 몬스터의 영향권 안에서는 그 보다 하위 등급의 출입 권한을 행사할 수 없습니다.
그렇군.
예전, 간혹 던전에서 보스를 만나 전멸한 공략 팀에 대한 뉴스를 방송해줄 때가 있었다.
백이면 백 모조리 전멸, 마주치면 무조건 전멸이어서 한동안 던전 공략을 기피하는 헌터도 생기곤 했었지.
그 뉴스를 볼 때마다 좀 신기했다.
한 명 정도는 탈출석을 써서 살아 돌아오는 사람이 있을 법도 하는데 그런 경우가 없는 것이.
하지만 어차피 나와 상관없는 뉴스니까 그냥 자는 사이 습격당했거나 한 방에 죽었나 보다 하고 넘겼지.
이제야 그 이유를 알겠다.
뒤늦은 깨달음과 동시에 눈앞의 땅이 솟구쳤다.
흙먼지가 이쪽으로 뛰어 오던 헌터들을 삼켜버린다.
뿌연 시야로 무언가 거대한 것이 어른거렸다.
마침내 흙먼지가 가라앉은 후, 예상대로 그것이 거기에 있었다.
충왕 바르기스.
서지한이 말한 대로 바르기스는 지네였다.
온몸에서 독기를 뿜어내는 검은 지네가 마치 코브라처럼 몸을 세우고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자욱하게 번져오는 독무에 나는 반사적으로 코를 틀어막았다.
미처 피하지 못한 불운한 헌터가 바르기스의 독니에 꿰뚫려 바르작거렸다.
바르기스는 거대한 독니로 그 헌터를 조각 조각내어 삼켜버렸다.
충왕류가 사람을 먹는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목격한 건 처음이었다.
본능적인 공포에 나는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그런 내 어깨를 잡는 손이 있었다.
“괜찮아요.”
놀라울 정도로 의연한 표정의 유은담이었다.
그의 얼굴에는 5층 빌라만 한 몬스터를 앞에 둔 사람에게 당연한 공포심이나, 긴장감 같은 건 찾아볼 수 없었다.
나도 그럴 수 있다면 좋겠지만 나는 도무지 여유를 가질 수 없었다.
당연하지!
보스 몬스터잖아.
서지한이 바르기스는 약하다느니 말랑하다느니 했지만 그건 서지한의 기준이었다.
내가 알고 있는 보스 몬스터는 케르기스뿐인데, 서지한은 몸이 반쪽이 되는 상처를 입고서야 간신히 그 몬스터를 잡았다.
솔직히 말해서 자신만만한 유은담의 태도는 전혀 위로가 되지 못 했다.
현재 상황은 그때보다 더 나쁘다고 생각한다.
유은담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그는 아마 서지한보다 약할 것 같다.
서지한은 단일 대상을 상대로 한 전투의 일인자였다.
그런 그도 죽음을 면치 못했는데.
서지한에게는 악령 왕 실라기스에게서 계승한 s급 스킬도 있었고, 사자의 낫도 있었다.
하지만 유은담은 아무것도 없다.
게다가 마력계 헌터는 단일 대상 공격력이 약한 편이다.
지금까지 보여준 모습을 보면, 아무래도 광역 공격 특화인 것 같고.
심지어 얘는 한참 동안 묶여서 감금당해 있었으니 컨디션도 최악일 텐데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렇게 여유로운 거지?
어쨌든 여차하면…….
- 혹시나 해서 말하는 건데 사자의 낫은 꺼내지 마.
서지한이 차분하게 말했다.
진심이세요?
지금 상황이 어떤 상황인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일단 목숨부터 건져야 하는 거 아닙니까?
실제로 인벤토리에서 서지한의 장비 아이템을 모조리 꺼내 쓸 생각이었던 나는 황당해졌다.
유은담만 없었으면 그에게 말을 했을 텐데, 어쩔 수 없이 내 표정 만들기 재능을 모두 긁어모아 나의 어처구니없음을 표현하는 수밖에 없었다.
- 일단 마력 회복 포션에, 마력 증가 포션 다 꺼내서 마셔. 유은담에게도 나눠주고. 내 아이템을 쓰는 건……
잠시 말끝을 흐리던 서지한이 유은담을 흘긋 쳐다보았다.
- 그가 죽은 다음 고려해보는 게 좋겠어.
유은담이 나에게 협조적이라고 해도 사람 속은 모르는 것이니 조심하는 것이 좋다.
그런 면에서 서지한의 주장은 타당하다.
하지만 이 승산이 희박한 상황에 유은담이 쌩쌩할 때 모든 아이템과 여력을 쏟아부어서 전투를 하는 게 옳은 것이 아닐까?
유은담이 쓰러진 후 내가 저 보스를 상대로 뭘 할 수나 있을까?
서지한이 나를 과대평가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해서 좀 불안한데, 내 불안한 얼굴을 본 유은담이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슬슬 바르기스의 독무가 바닥 전체에 깔리고 있다.
나는 신발을 부식시키고 있는 검은 안개를 인지한 후 유은담의 손을 마주 잡았다.
유은담과 나는 독무를 피해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독이 닿지 않을 정도의 높이로 올라온 후 그가 담담하게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요. 저 정도는 이길 수 있으니까.”
평소였다면 이런 상공에서, 이렇게 믿음직한 말을 하면 멋있다고 생각했을 것 같은데.
하지만 지금의 나는 그 말을 그냥 귓등으로 흘려버리고 있었다.
유은담보다 훨씬 강하다고 평가받는 서지한도 단독으로 보스 몬스터를 잡다가 죽었다니까?
걔도 자신만만했거든?
이러다가 너도 죽으면 나는 랭커들의 사망 패턴이 자신만만해하다가 죽는 거라고 믿어버릴지도 모른다.
나는 걱정을 감추지 않고 두 번째 영혼석의 후보를 돌아보았다.
“이대로 날아서 보스 영향권 밖으로 도망친 다음 탈출석 쓰는 건 어때요?”
제발.
내 인벤토리에 두 개째의 영혼석은 사양이라고.
그나저나, 아래에 있던 헌터들은 전멸한 것 같은데.
저 독무에 오랫동안 노출되면 몸이 녹아 버리는 것 같다.
별다른 독 저항 아이템이 없는 나로서는 마냥 남 일이 아니었다.
해독 포션이 있긴 하지만 등급이 그리 높지 않아서 소용이 없을 것 같다.
나는 간절하게 유은담의 끄덕임을 기다렸지만 유은담은 고개를 저어버렸다.
“아니요. 잡을 겁니다.”
유은담의 시선이 바르기스를 향했다.
바르기스는 이미 땅에 있던 헌터들을 모조리 먹어치운 후였다.
그러고는 새카만 겹눈으로 우리를 노려보고 있었다.
이마에 솟은 두 개의 붉은 뿔이 놈을 마치 작은 용처럼 보이게 했다.
유은담이 이렇게 마음먹었다면 내가 할 수 있는 건 별로 없었다.
나는 인벤토리에서 마력 포션을 잡히는 대로 꺼내서 마시고 유은담에게도 내밀었다.
“잡겠다면 어쩔 수 없죠. 어차피 도망치려고 해도 무사히 탈출할 수 있다는 보장도 없고. 싸우기로 했다면, 최선을 다해서 하자고요.”
예상치 못한 반응이라는 듯 유은담이 멈칫했다.
아마 혼자 싸울 생각이었나 보다.
하긴, 그는 나보다 마력 수치가 높을 테니 내 마력이 얼마나 하찮은지 감지했겠지.
말하자면 사자 싸움에 햄스터가 끼어드는 꼴일지도.
“감사합니다.”
유은담의 감사를 대충 흘리며 나는 포션 뚜껑을 앞니로 물어 뽑았다.
뚜껑을 퉤 하고 뱉은 뒤 벌컥벌컥 마시고 있으니 그가 머뭇거리며 금빛 스크롤 한 장을 내밀었다.
“뭐예요?”
“마력 공격 증가 스크롤. 5분간 지속되니까, 스킬 시전 직전에 찢고 쓰세요.”
오, 뭐야.
나도 전투원으로 인정해주겠다는 건가?
그럴 상황은 아니지만 약간 고무된다. 인정받은 기분도 들고.
나는 다 마신 포션 병을 던져버리고 고맙게 스크롤을 받아 들었다.
“캬악!”
가만히 이쪽을 노려보고 있던 바르기스가 갑자기 날카롭게 울부짖었다.
공교롭게도 내가 던진 포션 병이 놈의 머리에 맞은 것 같다. 죄송.
충분히 탐색했다고 생각했는지 바르기스가 본격적으로 살기를 피워 올렸다.
놈의 기세에 부응하듯 독이 더욱 짙어졌다.
이런 상황에 동굴이라는 환경은 최악이었다.
이대로라면 공간 전체가 독에 물드는 건 시간문제였다.
- 일단 너는 힘을 아끼고, 유은담이 싸우게 해.
나를 따라 허공에 둥둥 떠 있는 서지한이 매정한 조언을 했다.
그래도 힘을 합치는 게 좋지 않을까 싶은데.
하지만 유은담 본인조차 그럴 생각이 없어 보이긴 했다.
“일단 독부터 해결해야겠군요.”
그렇게 말한 유은담이 마력을 뽑아 올렸다.
넓게 퍼지는 마력.
광역 스킬이다.
아까 헌터들을 얼린 것과 같은 스킬 같은데, 땅이 아니라 허공에 시전 되었다는 것만 좀 달랐다.
금방 반응이 왔다.
꾸물꾸물 치솟던 독무가 무언가에 억눌린 듯 속도가 더뎌지더니 천천히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독에 냉기를 퍼뜨려서 얼린 것이다.
그나저나 유은담이 보스를 잡겠다고 한 이유를 좀 알겠다.
바닥에 있는 바르기스는 허공에 뜬 적을 상대할 방법이 없었다.
그나마 공간 전체에 독을 채우는 공격이 쓸 만했지만 그건 지금 유은담의 냉기 공격으로 무효화되었다.
“말했죠? 저 정도는 이길 수 있다고.”
- 그 말이 맞아. 바르기스의 독은 이미 연구가 많이 되어서 대처법도 확실하게 알려져 있지.
처음에는 바르기스가 나타났다는 사실 자체가 너무 충격이라 제대로 생각도 못 하고 도망치려고만 했는데.
차근차근 분석해보니 확실히 유은담의 스킬 조합이면 바르기스를 충분히 잡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럼 공략 관건은, 유은담의 대미지가 바르기스의 갑각을 뚫을 수 있느냐 인데.
유은담의 손에 심상치 않은 마력이 고이기 시작했다.
바르기스도 그것을 감지하고 몸을 낮추며 경계하고 있었다.
곧 허공에 거대한 얼음 창이 형성되며 맹렬하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거의 전봇대에 가까운 크기다.
이 정도라면, 저 거대한 바르기스에게도 충분히 통하겠지.
마침내 거대한 창이 바르기스에게 쏘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