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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9화 (69/231)

069화

그 사이 몇 개의 스킬이 이쪽으로 날아왔지만 전부 유은담의 마력 소용돌이에 흡수되듯 사라져 버렸다.

마침내 그가 스킬을 시전 했을 때 나는 유은담의 여유를 이해했다.

유은담이 스킬을 시전 하자마자 세이프 존은 순식간에 얼음 지옥으로 변해 버렸다.

스킬이 지상에 작렬하는 순간 폭발적인 한파가 땅을 타고 번져나갔다.

방어 스킬도 소용없었다.

한파에 닿는 것은 무엇이든 얼어붙었다.

뒤늦게 도망치려던 헌터들과 제 몸이 얼어붙는지도 모르다가 비명을 지르는 자들.

모두 가리지 않고 완전히 얼어붙었다.

순식간에 백여 개의 얼음 동상이 생겨났다.

보고 있는 나는 소름이 돋을 지경인데 유은담은 무심하기까지 한 동작으로 가볍게 주먹을 쥐었다.

새로운 스킬을 시전 하는 것이다.

겉으로 보기엔 별로 강한 스킬은 아니었다.

아주 간단한 충격파 마법이었다.

하지만 얼어붙은 헌터들에게는 치명적이었다.

유은담의 손에서 시작된 작은 진동이 삽시간에 세이프 존 전체로 퍼져나갔다.

그리고 그 진동은 얼음 동상을 모조리 가루로 만들어버렸다.

- 너무 느려.

서지한은 혀를 찼지만 나는 그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저기, 좀 가만히 있어보세요, 서지한 씨.

으아아, 취소.

승주 친구 같다고 한 거 취소.

너무 놀랐다.

얼어버린 사람이 바삭바삭 부서져서 바닥을 붉게 물들인 광경에도 유은담은 아무렇지도 않은 기색이었다.

순식간에 거의 백여 명에 가까운 사람을 학살한 것인데, 비정상적 일정도로 감흥이 없어 보인다.

나도 각성한 후 죽음이나 잔혹한 모습에 면역력이 꽤 강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이건 정도를 넘었다.

배신감이 강할 테니 어떤 의미에서는 충분히 이해할 만하지만, 그래도 눈앞의 모습이 너무 잔인해서 어쩔 수 없이 거부감이 들었다.

솔직히 유은담이 좀 무섭게 느껴질 정도다.

그래도 모든 헌터들이 죽은 건 아니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잘 모르겠지만 세이프 존의 가장 외곽에 운 좋게 한파를 피한 몇몇이 살아남아 있던 것이다.

“혹시 물어보고 싶은 게 있을까 봐 몇 명 살려뒀어요.”

아니, 단순히 운이 좋은 게 아니었던 것 같다.

나는 소름을 내리누르며 생긋 웃는 유은담에게 어색하게 마주 웃었다.

- 으음, 역시 준비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 거리가 먼데다 저놈들이 워낙 엉망이라 그렇지, 조금만 실력 있는 놈들이었으면 그 사이 수 백번은 베여 죽었겠다. 쯧쯧.

서지한도 죽은 목숨들에게 별 감흥이 없기는 마찬가지인가 보다.

그가 꼬장꼬장한 태도로 유은담의 스킬을 평가했지만 그건 서지한에게나 해당되는 이야기다.

나는 절대 동의할 수 없었다.

유은담의 스킬은 충분히 빨랐다고 생각한다.

“앗, 저기!”

빨간 바닥에서 애써 눈을 돌려 살아남은 자들을 탐색하는데 그중에 익숙한 얼굴이 있었다.

카메라맨이다.

진짜 생존 운반 하나는 끝내주는 인간이네.

김영길 헌터의 원한에서도 혼자 살아남더니.

“왜요?”

“카메라맨이에요!”

유은담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양석일.”

아는 얼굴인가 보다.

그를 바라보는 유은담의 눈에 살기가 스쳤다.

꽤 먼 거리인데도 유은담과 눈이 마주친 양석일의 얼굴에서 혈색 이 빠져 나가는 게 보였다.

“여기 있었군.”

바닥에 내려선 유은담과 나는 양석일의 앞으로 이동했다.

사색이 된 양석일은 혼이 나간 얼굴로 유은담을 보며 연신 현실을 부정했다.

하지만 우리가 땅에 발을 딛고 피로 질척 질척한 바닥을 걷는 소리를 듣자 갑자기 정신을 차린 듯 땅바닥에 고개를 처박았다.

“사, 살려주십시오. 길드장님.”

“왜?”

유은담은 시종일관 차분했다.

심지어 약간 즐거워 보이기까지 했다.

즐거울 요소라곤 손톱만큼도 없는지 상황에 그런 모습은 당연히 무서웠다.

정상이 없어, 정상이.

“예?”

당혹감에 고개를 든 양석일의 이마는 바닥에서 묻어난 얼음물로 붉게 젖어 있었다.

“나에게 독을 먹인 너를 왜 내가 살려줘야 하는데?”

하필 독 먹인 사람이 이 사람이었나.

절망하는 양석일의 미간에 이마의 빨간 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본인의 피는 아니었지만, 나는 양석일이 죽은 모습을 미리 본 것 같은 느낌이었다.

“저, 저, 저도 협박을 받았습니다.”

“흠. 협박이라.”

약간의 희망이 보였는지 양석일의 얼굴이 밝아졌다.

유은담이 설득될 것 같았기 때문일까?

달달 떨리던 목소리가 갑자기 힘차게 바뀌었다.

“그렇습니다! 협조하지 않는다면 저를…….”

“관심 없어.”

“기, 길드장님?”

유은담을 당혹스럽게 올려다보는 양석일의 하반신이 서서히 얼어붙기 시작했다.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는 관용사가 아니라, 말 그대로.

그는 완전히 공포에 질려서 애타게 ‘길드장님, 살려주십시오’하고 외쳤다.

통할 리가 없을 것 같던 외침이었지만 발바닥, 발등, 발목, 정강이를 천천히 타고 오르던 얼음이 기적처럼 멈췄다.

그쯤에서 유은담이 나를 돌아보았다.

자연스럽게 양석일의 시선도 내게 향했다.

“카메라. 가지고 있지?”

나를 보고 있었지만 양석일에게 한 게 분명한 말이었다.

유은담이 딱히 달라는 소리도 하지 않았는데 양석일이 허겁지겁 인벤토리에서 카메라를 꺼냈다.

그 카메라로 제 목숨을 거래할 법도 하는데 너무 겁에 질려 있어서 그럴 정신도 없는 것 같다.

하긴, 그의 눈앞에는 양석일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최악의 미래가 전시되어 있었다.

얼음조각으로 변한 백여 명의 헌터들을 앞두고 침착하기는 힘들 것이다.

“여, 여기 있습니다. 제발 살려주십시오, 손모아 헌터님. 정말, 습격도 정말 고의가 아니었습니다.”

양석일은 이제 대상을 바꿔 나에게 빌기 시작했다.

글쎄, 고의가 아니라고 한 것치고는 꽤 즐거워 보였는데.

어쨌든 카메라는 고맙게 받겠어요.

사실 양석일이 죽어도 죽은 그를 루팅해 카메라를 입수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지만, 아무래도 인간의 형태를 유지하지 못 할 정도로 엉망이 되어도 루팅이 가능할지 확신이 없었다.

그리고 루팅 모습을 유은담에게 보여주고 싶지도 않았고.

혹시나 수틀려서 카메라를 부수거나 영상을 지우기라도 하면 어쩌나 했는데 양석일은 양손을 부들부들 떨면서 간곡한 자세로 카메라를 건넸다.

“제발, 제발…….”

하지만 양석일의 소망은 이뤄지지 못했다.

내가 카메라를 받자마자 그의 몸에 다시 얼음이 차오르기 시작했던 것이다.

뒤늦게 그것을 깨달은 양석일은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완전히 얼어붙었다.

나는 다음 과정을 보지 못 하고 돌아서고 말았다.

오늘 하루 만에 끔찍한 모습을 너무 많이 본 것 같다.

정신 건강이 나빠지는 게 느껴진다.

하지만 지금 나보다 더 정신 건강이 걱정되는 사람들이 있었다.

살아남은 사람은 양석일 혼자가 아니었다.

세이프 존 가장자리에 뿔뿔이 흩어져 있던 생존자들이 어느새 하는데 뭉쳐 모여 있었다.

최대한 살금살금 움직이던 그들은 돌아선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화들짝 놀라더니 행동을 서둘렀다.

그들 중 대표 격으로 보이는 남자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즉시 손에 들고 있던 무언가를 으스러뜨렸다.

익숙하게 생긴 아이템이다.

탈출석.

그 근처에 있던 다수의 헌터가 안심하는 모습을 봐서는, 아마도 다인용 탈출석.

잠깐, 저 사람들 도망치면 안 되잖아.

저들이 먼저 나가서 선수를 치면 곤란하다.

여기서 있었던 일 중 어느 것 하나 새어나가서 좋을 게 없었다.

“하하하, 방심하더니 꼴좋다! 나중에 두고 보자!”

완전히 살았다고 생각했는지 헌터 몇몇이 기세 등등하게 외쳤다.

안타깝게도 그 기세는 오래가지 못 했다.

게이트가 생성되지 않았던 것이다.

“뭐야. 왜 이래?”

“게이트가 왜 안 생겨?”

어리둥절해진 헌터들이 질문을 던졌지만 탈출석을 부순 남자에게서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대답 대신 가느다랗게 욕설을 내뱉었을 뿐이다.

“설마 가짜 탈출석이었나?”

왜 그러냐고 몇 번 다시 묻던 헌터들은 나름대로 이유를 유추하더니 납득했다.

가짜 탈출석이라는 충격 때문에 넋이 나갔다고 생각한 것 같다.

“어서 다른 거 꺼내! 비상 탈출석 없어?”

다급한 외침에 유은담을 힐긋 바라본 한 명이 꾸물꾸물 인벤토리를 뒤지더니 탈출석 하나를 꺼내 든다.

“제길, 내 개인 아이템인데.”

“지금 그거 따질 때야? 빨리! 빨리 쓰라고!”

“빨리 좀 해! 다 죽고 싶어?”

안색이 바뀐 헌터들은 금방이라도 유은담에게 살해당할 거라고 생각했는지 허둥지둥 자신들끼리 다투기도 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 소용없어.

두 번째 탈출석을 사용하지 못하게 막으려고 하다가 서지한의 말에 멈춰 섰다.

슬쩍 뒤를 돌아보니 유은담도 재롱을 보는 듯한 시선으로 그들을 주시할 따름이었다.

저들이 도망치는 건 유은담도 원하지 않겠지.

가만히 있는 건 뭔가 방법이 있다는 뜻이다.

서지한도 소용없다고 했으니, 나는 일단 카메라를 인벤토리에 넣고 좀 더 지켜보기로 했다.

“부숴!”

“빨리!”

결국 몹시 아까워하던 두 번째 탈출석까지 부쉈지만 첫 번째와 마찬가지로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빨리 갔어야지.”

유은담의 어조는 매우 담담했다.

그러나 마치 피비린내가 나는 듯섬뜩했다.

지금은 나름대로 같은 편인 나도 그렇게 느낄 정도인데, 저 헌터들이 보기에는 얼마나 무서울까.

그나저나 탈출 게이트가 만들어지지 않은 건 유은담이 한 것인가?

유은담이 탈출 게이트까지 막을 수 있단 말이야?

공격 스킬도 저렇게 강한데 이런 말도 안 되는 특수 스킬까지 있다고?

하늘도 날고, 충격 포도 쏘고.

스킬이 대체 몇 개야?

나는 감탄과 부러움을 담아 유은담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눈치 빠르게도 서지한이 내 오해를 정정해주었다.

- 탈출 게이트, 유은담이 막은 게아니야.

서지한의 말을 듣기라도 한 듯 유은담이 어깨를 으쓱했다.

자신이 한 게 아니라는 것 같다.

그럼 뭐지?

탈출석이 정말 불량이었나?

아리송해하고 있는데 갑자기 공기 중에 불길한 기운이 감돌았다.

피부가 찌릿찌릿하고 숨쉬기가 힘들어지는 느낌.

공간 자체의 압력이 올라가는 것 같은 압박감.

뭐지, 이 느낌.

되게 익숙한데.

예전에도 비슷한 경험을 했던 것 같은 기분이 든단 말이야.

대체 뭐였더라?

이상하게 불안한 느낌이…….

추측을 마치기도 전에 눈앞에 알림 메시지가 떠올랐다.

꽤 오랜만에 보는 알림 메시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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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왕 바르기스의 등장으로 ‘상태 이상: 위압’에 걸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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