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68화 (68/231)

068화

“여기는…….”

말문을 열던 유은담이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무척 오랜만에 말을 하는지 목소리가 말도 못 하게 쉬어 있었다.

제대로 알아듣기도 힘들다.

“이런, 잠깐만요.”

내 정신 좀 봐.

피골이 아주 상접해서 뭘 먹지도 못한 몰골인데.

나는 인벤토리에서 물을 꺼내 그의 입가에 대어 주었다.

나를 잠시 바라보던 유은담은 순순히 물을 받아 마시기 시작했다.

빨대라도 있으면 좋겠는데, 어쩔 수 없지.

꼴깍거리며 물을 받아 마시는 유은담을 가만히 보다가 새삼 좀 놀랐다.

눈과 입을 가리고 있을 때는 몰랐는데 이렇게 보니 무척 앳된 얼굴이다.

거의 승주와 비슷하거나 승주보다 좀 더 어릴 것 같다.

몇 살이라고 그랬더라? 승주보다 어리던가?

그나저나 이렇게 처참한 몰골인데도 얼굴이 환하게 느껴진다.

소문대로 잘생기긴 했네.

하지만 역시 뽀얀 얼굴 때문인지 어린 동생으로만 보였다.

에고, 이 또래의 동생이 있어서 그런지 마음이 쓰이네.

꼭 승주랑 PC방 다닐 것 같은 연배로 보이는데.

“여기는 던전 안입니까?”

내 이야기를 다 듣고도 이렇게 묻다니.

하지만 몰라서 물었다기보다 확인하려고 던진 질문에 가깝게 보인다.

“네.”

대꾸하며 나는 유은담의 입가로 흐르는 물을 대충 닦아주었다.

덕분에 내 옷 소매가 좀 젖었지만 딱히 신경 쓸 일은 아니다.

“한국의 던전입니까?”

“바르기스가 있는 충왕류 던전이에요.”

“바르기스…….”

암현 길드 길드장쯤 되면 흔히 드나들었을 테니 아마 익숙한 던전이겠지.

유은담의 얼굴이 좀 더 차분해졌다.

그리고 잠시 망설이다가 천천히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던전 공략 도중에 길드원에게 배신당했습니다. 불침번 교대를 하면서 같이 마신 차에 독이 들어 있었고, 정신을 잃은 다음에는 이런 처지였어요. 보다시피 안대와 입마개 때문에 저도 아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배신요? 그것도 길드원이 길드장을? 대체 왜요?”

유은담은 대답 대신 곤란한 얼굴로 시선을 피했다.

본인도 모르는 건지, 아니면 말할 수 없는 건지.

하긴, 오늘 처음 본 나에게 자세한 길드 내부 사정까지 말하는 건 꺼려지겠지.

아무튼 이 정도면 됐다.

사슬을 풀어줘도 그가 나를 공격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선다.

그래도, 확답은 받아야지.

“음, 그러면 서로 적이 아니라는 건 확인됐고. 이 사슬 풀어줘도 저공 격하지 않을 거죠?”

“네. 하지만…….”

나는 손을 뻗어 사슬을 쥐었다.

어디 보자, 자물쇠도 없이 그냥 통짜 사슬이네?

어떻게 감아둔 거지?

뭐, 열쇠가 없으면 부수면 되겠지.

방 안에 설치된 마력 흡수진 때문에 약간 힘들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사슬은 봉쇄의 백금 사슬입니다. 저 같은 강한 마력계 헌터를 잡아두는 용도로 사용된 것이니까 어지간한 방법으로는 안 될 거예요.”

그래? 그럼 손으로 쏘는 ‘충왕폿!’으로는 안 되고 적어도 머리에 힘을 모아서 ‘추우웅와아앙포!’를 써봐야겠군.

어차피 사슬 한쪽만 부수면 되니까 조준은 어렵지 않았다.

나는 사슬을 잡아 늘린 뒤 충왕포를 쓰더라도 유은담이 다치지 않을 만한 각도로 조준하고 힘을 모았다.

뜨거워지는 이마를 느끼고 있는데, 옆에서 다시 목소리가 들렸다.

“사슬의 주인이 가지고 있는 열쇠가 필요해요. 열쇠가 아니면 불가능합니다. 이렇게 등급이 높은 아이템은, 적어도 S급 스킬이 아니면 효과가 없을 겁니다. 그리고 s급 스킬은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얻을 수 없…….”집중, 집중.

실수하면 유은담이 다친다.

파삭.

유은담이 뭔가 말하는 사이 온 정신을 집중해 범위는 좁히고 파괴력을 모은 충왕포 한 줄기가 사슬을 스쳤다.

쇠사슬은 견고했던 모습이 거짓말같이 마치 설탕과자처럼 부서져 끊어졌다.

끊어진 사슬은 순식간에 반짝이던 빛깔을 잃어버리고 시커멓게 물들어버렸다.

힘을 잃고 볼품없어진 쇠사슬에 뿌듯한 기분으로 고개를 들자 넋을 잃은 유은담이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어? 왜 그래요?”

“아니…….”

“아, 근데 아까 뭐 말했어요? 집중하느라 잘 못 들어서.”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래요? 뭔가 말하는 것 같았는데.”

“이제 상관없습니다.”

“그래요?”

나는 유은담에게 둘러진 사슬을 훌훌 벗겨 주었다.

그는 어쩐지 혼란스러운 듯 흥미로운 듯한 눈으로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음, 약간 부담스러운 시선이네.

그나저나 등급이 높은 아이템 어쩌고저쩌고 했던 것 같은데 드문드문 흘려들어서 뭐라고 했는지 잘 모르겠다.

설마 이거 s급 사슬, 뭐 그런 건 아니겠지.

사슬에서 풀려난 유은담은 당연하게도 바로 방을 빠져나오려고 했다.

나였어도 그랬겠지.

마력이 계속 빨려나가는 기분 나쁜 방이다.

계속 있을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그는 아직 나오면 안 된다.

“잠깐만요.”

나는 다급하게 문을 막아서며 유은담을 제지했다.

다시 방 안에 갇혀버린 유은담이 굳은 얼굴로 나를 응시했다.

가늘어진 눈매에 ‘이건 무슨 수작이지?’라는 말이 흐르는 듯했다.

“아직 나오면 안 돼요. 마력 계속 빨려나가서 힘들겠지만, 일단 이것 좀 드세요.”

마력 회복 포션과 증가 포션 몇 개를 건넸지만 유은담은 받아 들 생각도 하지 않고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음, 밖의 헌터들이 아직 잠잠하니 설명할 시간은 충분할 것 같군.

“그 방에서 나와서 마력 공급이 중단되면 위에 있는 헌터들이 이쪽으로 몰려들 거예요. 이 일대에 유은담 씨 마력을 기반으로 한 결계 같은 게 쳐져 있는데, 그게 사라지면.”

“그렇군요.”

말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그제야 포션을 받아 들고 벌컥벌컥 마셨다.

“여기는 세이프 존입니까?”

와우, 이해가 정말 빠르다.

결계라는 말을 들었을 뿐인데 벌써 그 목적이나 현재 상황을 전반적으로 파악한 것 같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추가 설명을 덧붙였다.

“그리고 바로 탈출석으로 여기를 빠져나간다고 해도 곤란해요. 외부에도 팀이 있다고 하더라고요. 아마 나간다고 해도…….”

“그렇겠죠.”

“일단 어떻게 할지 정한 다음 움직여야 해요. 마력 흡수 마법진 때문에 힘들겠지만…….”

“이 정도는 괜찮습니다.”

유은담의 덤덤한 태도는 허세가 아니었다.

나는 잠깐 들어가 있었는데도 현기증이 날 정도였는데 그는 무슨 모기에게 피를 빨리는 사람처럼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마력치가 대체 얼마나 높기에.

“우선,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생각지도 못한 감사인사를 들었다.

역시, 미디어에서 떠들어대는 고랭커 헌터의 이미지는 믿을 것이 못된다.

미디어의 서지한이 깡패라면 유은담은 정말 철없는 바람둥이였다.

거의 일주일에 한 번 꼴로 새로운 여자와 열애설이 나곤 했으니까.

하지만 실제로 만나니 생각보다 예의 바르고 고분고분한 사람이라는 느낌이다.

음, 가끔 뉴스 볼 때 ‘어린 노무 새끼가 벌써부터 쯧쯧. 승주야 너는 저러면 안 된다’하고 이야기했던 게 갑자기 생각나네.

“별말씀을요. 좀 놀라긴 했지만, 별거 아니었어요. 그나저나, 어떻게 도망갈지 계획을 세워보죠.”

예상보다 유은담의 태도가 협조적이어서 갑자기 아군이 생긴 기분이다.

약간 든든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유은담은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로 반문했다.

“도망?”

“네. 위에 헌터가 엄청 많아요. 저한테 투명화 스크롤이 있긴 하는데, 당신이 사라지면 수색하려고 헌터들이 탐지 마법을 쓸 테니까 무용지물이 될 거예요. 그리고 나간 다음의 일도 문제고…….”

“아하.”

그는 뒤늦게 알아들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갑자기 빙긋 웃었다.

“날 수 있어요?”

뭐지? 이 뜬금없는 질문은?

날아서 도망가자는 뜻인가?

별로 좋은 생각 같지는 않은데.

어쨌든 나는 날 수 없다.

고개를 젓자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유은담이 손을 내밀었다.

“잡아요.”

뭐, 일단 잡으라고 하니 잡긴 하겠는데. 왜?

의문을 느낀 것은 아주 잠깐이었다.

내 손을 단단히 잡은 유은담은 다른 한 손을 위로 뻗었다.

동시에 강력한 마력 파동이 휘몰아치더니 폭음이 이어졌다.

쏟아지는 흙먼지에 눈을 질끈 감자 몸이 솟구치는 것 같은 감각이 찾아왔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 나는 유은담과 함께 허공을 날고 있었다.

아니, 뭘 하기 전에 말 좀 해달라고.

놀란 심정을 가라앉히며 아래를 보자 말 그대로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엎어진 카드 판에 뒤늦게 천막에서 뛰쳐나오는 자들, 어설프게 각종 병장기를 꺼내는 모습.

갑작스러운 일에 다들 상황 파악이 되지 않나 보다.

“뭐, 뭐야!”

“습격인가? 어디야?”

“찾아! 침입자가 있다!”

“탐지 마법 써! 보이는 거 있으면보고 해!”

“다들 흩어져서 찾아라!”

“아무것도 안 보이는……. 위쪽이다!”

뒤늦게 헌터 하나가 우리를 발견했다.

그리고 경악 어린 외침이 산발적으로 튀어나왔다.

“유은담이 탈출했어!”

“어떻게? 다시 잡아! 가둬!”

“제길, 다들 공격태세로!”

그 모든 소란을 유은담은 고요한 얼굴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헌터들은 나는 보이지도 않는지 유은담이 탈출했다는 사실에만 집중했다.

곧이어 곳곳에서 마력이 응집하는 것이 느껴졌다.

우리를 공격하려는 것이다.

나는 불안한 기분으로 유은담을 돌아보았다.

방어 스킬 있나?

아무리 랭커라고 해도 그들의 스킬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별로 없었다.

서지한이 이상할 정도로 자세하게 알려진 것이다.

아, 어쩌지.

내가 충왕뇌우를 먼저 써버려?

문득 나는 유은담이 무언가를 중얼거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처음에는 무슨 주문 같은 것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이름이었다.

“김두현. 김민수. 김선우. 최인호…….”

헌터 하나하나를 눈에 담을 때마다 유은담은 그들의 이름을 호명했다.

유은담이 이들의 이름을 다 알고 있다는 건, 이들이 모두 암현 길드 길드원이라는 것을 의미했다.

그와 동고동락했을 동료들.

이름 읊기를 멈춘 유은담이 바드득 이를 갈았다.

눈동자 위로 분노가 넘실거리더니 곧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처분을 결정한 것 같았다.

“감히.”

그리고 유은담이 천천히 손을 들었다.

곧 그의 손 안에서 무서울 정도로 거대한 마력이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