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67화 (67/231)

067화

정신을 잃은 유은담은 거대한 노란 수정 속에 갇혀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 아래에는 같은 색의 마법진이 펼쳐져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는데, 마력 흐름으로 유추하건대 유은담을 가두고 있는 저 수정을 구현하고 있는 것 같다.

- 방 전체가 마력을 빨아들이는 형태로 만들어져 있어.

다시 눈을 돌려 방 안을 관찰하자 그 말대로 천장과 벽을 가리지 않고 보라색 문양이 빼곡하게 수놓아져 있었다.

마치 김영길의 원한 같은 꺼림칙한 기운이 느껴진다.

저주에 가까운 형태다.

빛의 수정안에 갇힌 유은담은 누가 봐도 강제로 잡혀온 모습이었다.

검은 쇠사슬이 전신을 칭칭 감고 있는데, 눈과 입에는 검붉은 부적이 붙어 안대와 입마개를 대신하고 있었다.

음, 정확히 뭔지 잘 모르겠지만 절대로 숙면안대로는 보이지는 않는다.

그나저나 분위기를 보니 이 세이프존을 유지하고 있는 마력 원천은 유은담이었던 것 같다.

“구해줘야겠죠?”

일단 웬 사람이 잡혀 와서 갇혀있으니 구해야 하는 것이 도의적으로 맞겠지만…….

말하면서도 사실 정확히 판단이 서지 않았다.

그를 구하는 것이 상황을 더 좋게 만들지, 아니면 나쁘게 만들게 될지 예측하기 힘들었다.

그보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지,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잘 모르겠다.

어디선가 신선놀음하며 유유자적 놀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암현 길드 길드장이 왜 이런 꼴로 여기 묶여 있는 거지?

복면인들은 분명 거대 길드의 이익, 을 위해서라고 말하며 우리를 습격했다.

'천공 길드'라든가, '대한 길드'라든가 특정 길드의 이름을 명명하지 않고 '거대 길드, 라고 묶어서 말했단 말이지.

그렇다는 이야기는 한국에 있는 3대 길드가 담합하여 음모를 꾸몄을 거라 추측할 수 있다.

그런데 왜 그 3대 길드의 길드장이 여기에 있는 거냐고.

나는 사실 우리를 죽이라고 지시한 사람 중에 유은담도 있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당연히, 얘도 거대 길드 길드장이니까.

우리를 습격하고 복면인들에게 지시하며 앞으로 변동될 헌터 업계에서 가만히 이익을 보고 있어야 할 대표적인 인물인데, 대체 왜 여기에?

서지한도 혼란스러운지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하지만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여유롭게 고민할 시간이 없다.

유은담을 구하거나, 버리거나.

빠르게 판단해야 한다.

나는 유은담을 구하기로 했다.

정확한 사정은 모르겠지만 여기에 잡혀 있는 걸 보면 우리를 습격한 복면인들과 우호적인 관계로 보이지는 않으니까.

“문 열어도 돼요? 경보장치 같은 게 붙어 있는지 확인할 수 있나요?”

내 물음에 몇 번 벽을 넘어 다니며 구조를 살핀 서지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 문을 여는 건 괜찮아. 하지만 마력 흡수 마법진이 파손되면 바로 알 거야. 세이프 존의 결계가 해제되는 감각이 느껴질 테니까.

“저 노란 마법진은요? 부숴도 돼요?”

- 잘 모르겠군.

서지한이 난감한 얼굴로 마법진을 관찰했다.

하지만 마력계 헌터가 아닌 그로서는 알아낼 수 있는 게 많지 않아 보였다.

사실 이만큼이나 파악하고 나에게 알려주는 것도 그가 헌터 생활을 하며 쌓아온 경험의 승리다.

일단 마법진은 아무것도 부수지 않는 방향으로 가야겠다. 괜히 부쉈다가 헌터들이 몰려오면 곤란하니까.

“그나저나 구한다고 해도 문제네요. 수정 안에 있는 것 같은데. 곡괭이질을 할 수도 없고. 저 속박, 어떻게 해제하는지 알아요?”

- 나도 잘 모르겠지만, 저런 종류의 속박은 보통 마법진에서 끌어내거나 외부에서 손을 대면 깨지던데.

“그렇게 되길 바랄 수밖에 없네요.”

나는 일단 문을 열었다.

잠겨 있긴 했지만 약한 충왕포로 걸쇠 부분을 부숴버리자 손쉽게 열렸다.

육중한 철문의 무게도 서지한이 준 힘 보정 반지를 껴서 그런지 크게 문제 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안으로 한 발짝 들어가는 순간 전신의 피가 다 빠져나가는 것 같은 현기증이 엄습했다.

버티지 못 하고 바닥에 무릎을 꿇자 서지한이 다급하게 나를 불렀다.

- 괜찮아?

“네. 갑자기 마력이…….”

온몸이 텅 비는 듯한 이 감각.

전에도 몇 번 느껴 본 것이다.

- 그렇군. 네가 감당하기에는 좀 버거울 거야.

그 말대로다.

유은담의 혈색이 나빠 보이지 않아서 마력을 빨아가는 양이 크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순식간에 마력이 고갈되어 버렸다.

예상을 월등히 웃도는 흡수력이다.

이대로 안으로 더 들어가면 나올 때는 정신을 잃을지도 모른다.

뭔가, 입에 마력 회복 포션이라도 달고 들어가는 게 좋겠어.

나는 엉금엉금 기어서 방을 나온 후 마력 증가 포션과 회복 포션을 마시고 다시 재도전했다.

포션을 마신 덕분인지 들어가자마자 무릎을 꿇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오래 버티기는 힘들었다.

방이 워낙 작아서 몇 발짝 들어가지 않아도 되어서 그나마 다행이다.

그가 갇힌 수정을 통째로 잡고 뜯어낼 생각이었는데 가까이 가보니 그건 수정이 아니라 반투명한 빛의 장막이었다.

손을 뻗자 아무런 저항도 없이 안으로 손이 쓱 들어갔다.

덕분에 별로 어렵지 않게 유은담의 팔을 잡을 수 있었다.

단단히 잡고 끌어내자 약간의 저항이 느껴지긴 했지만 가볍게 끌려 나온다.

그렇게 두 발자국 정도를 끌어내 자장 막이 해제되더니 허공에 떠 있던 유은담이 바닥으로 곤두박질 졌다.

“우왓.”

급하게 붙잡았기에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유은담의 머리가 깨질 뻔했다.

- 괜찮아?

“괜찮아요. 으, 힘든데 이거 끌고 나가야겠죠?”

당연히 고개를 끄덕일 줄 알았는데 서지한은 손을 뻗어 만류했다.

- 일단 안에 둬. 마법진이 파손되는 것도 안 되지만 갑자기 마력 원천이 사라지는 것도 안 돼. 둘 다 결계가 해제될 테니까.

지금 이 순간에도 마력이 쪽쪽 빨아 먹히고 있는 유은담에게는 매 우 매정한 처사다.

하지만 서지한의 말이 맞았다.

그를 끌어내서 결계가 깨지면 여기에 헌터들이 몰려오겠지.

나는 결국 문 바로 앞에 유은담을 내려놓고 문 밖으로 기어 나왔다.

손을 뻗으면 닿는 거리니까 언제든지 끌어낼 수 있다.

저 노란 마법진에서 끌어내린 정도로는 소란이 일어나지 않아 다행이었다.

장막 안에 갇혀 있는 모습도 불쌍했지만 바닥에 널브러진 유은담은 그것보다 더 불쌍한 모습이었다.

등 뒤로 당겨져 쇠사슬에 묶인 팔도 엄청 불편해 보이는데, 그 보다 심한 건 다리였다.

신발도 신지 않은 맨다리가 살이 파일 정도로 단단히 묶여 있어서 쇠사슬 모양대로 멍이 들어 있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다.

아주 딱한 광경이지만 그렇다고 아무런 대비 없이 그를 바로 풀어줄 수는 없다.

그가 나를 적으로 인식하기라도 하면 큰일이니까.

만약 풀어줬는데 다짜고짜 공격하면?

상대는 랭킹보드에도 올라가 있는 뛰어난 마력계 헌터다.

‘나를 납치하다니. 죽어라!’하고 공격하면 뒤늦게 ‘아닌데요!’라고 해봐야 나는 이미 죽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

손모아, 25세.

유언 ‘아닌데요’를 남기고 사망하다.

이런 묘비 문구는 사양이다.

나는 신중하게 그의 눈을 가린 부적에 손을 뻗었다.

일단 깨워서 사정 청취를 하고 도와달라고 부탁해보자.

그리고 그가 왜 여기에 갇혀 있는 건지도 들어본 뒤 풀어줄지 말지 결정하자.

“아, 깜짝이야!”

천천히 부적을 떼어낸 뒤 그를 깨울 생각이었는데 그럴 필요가 없었다.

유은담은 이미 정신을 차리고 있었다.

눈을 가린 부적이 사라지자 독기 품은 날 선 시선이 나에게 날아왔다.

와, 저 적대감 가득한 눈 좀 봐.

사슬부터 풀어줬으면 큰일 날 뻔했네.

“저기요. 지금 시간이 없어서 짧게 설명해야 하는데, 일단 제가 당신 가둔 거 아니에요. 저는 당신 가둔 사람이랑 아무 관련 없어요. 알겠다면 끄덕해주세요.”

유은담은 반응이 없었다.

대신 눈매가 의심을 머금고 가늘어졌다.

아, 입. 입 때문인가.

“입은 나중에 떼어줄게요. 갑자기 소리 지르면 제가 곤란해져서요. 여기 몰래 들어온 거라서. 상황 파악도 되시면 입에 붙은 종이도 떼어줄게요. 저도 사실 아는 거 별로 없어요.”

그제야 유은담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 생각보다 쉽게 믿어주네. 역시 진심은 통한다니까!

하지만 이 모습을 지켜보던 서지한이 팔짱을 끼고 고개를 끄덕이며 찬물을 끼얹었다.

- 네 착한 인상이 도움이 될 때도 있군. 어떻게 봐도 뭔가 나쁜 짓을 할 사람으로는 안 보이긴 하지.

그런 거였어?

아니, 서지한의 말은 틀렸다.

착한 인상은 대부분의 경우에 도움이 된다고.

유은담만 없었으면 대답해줬을 텐데.

그에게 서지한의 존재를 들켜도 괜찮을지 모르겠다.

일단 숨기는 게 좋겠지.

“저는 백광 길드 소속 손모아 헌터예요. 던전 공략 허가가 계속 안 나오던 작은 길드 소속인데 갑자기 급하게 허가가 떨어졌다는 연락을 받고 공략을 하러 이 던전에 들어왔어요.”

너무 처음부터 이야기했나?

유은담은 내 이름을 처음 듣는지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그런데 팀원과 던전 공략을 하던 도중에 복면인들에게 습격을 받았어요. 그중에 가짜 서지한이 있었는데, 그가 소규모 길드의 공략 팀이 던전에서 몰살당하면 여론을 부추겨서 거대 길드만 던전 공략 허가가 나오도록 법을 개정하는 게 목적이라고 하더라고요.”

유은담의 시선에서 적대감이 약간 누그러졌다.

대신 무언가 생각하는 듯한 눈빛이 되었다.

“그리고 그 습격 과정을 그들이 카메라로 찍었는데, 습격 때문에 저희 팀원 두 명이 사망했고 저 포함 세명이 생존해서 도망치다가 결국 잡혔어요. 그런데 어쩌다가 운 좋게 습격자를 퇴치했어요. 그 와중에 습격자 중 한 명이 도망갔고요. 카메라로 찍던 사람이요.”

김영길에 대한 건 설명하지 않는 게 좋겠지.

잠깐, 그러고 보니 이 사람 김영길이 죽은 건 아는 건가?

그때 암현 길드 병원에서 길드장이 오랫동안 안 보인다던가 하는 소리를 들었던 것 같은데.

그 이전부터 잡혀 있었다면 얼마나 오랫동안 여기 있었던 거야?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지만 나는 설명을 계속 이어나갔다.

“그 이후 살아남은 팀원 중 하나가 놈들이 심어둔 첩자인 걸 알게 되어서 죽였고, 다른 한 명은 탈출석으로 던전을 나갔어요. 저는 도망친 카메라맨을 찾아서 놈들을 미행하다가 여기까지 온 거예요.”

유은담의 얼굴이 점점 침착해지고 있었다.

나는 그가 내 말을 매우 주의 깊게 듣는 동시에 여러 가지를 유추해보고 있다는 걸 느꼈다.

“진실이 담겨 있는 카메라가 필요했거든요. 정확히는, 놈들이 한 말들이 담겨 있는 영상이요. 이 습격의 배후에 거대 길드가 있다면 그냥 나갔다간 뒷일을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았어요. 그 영상이라도 있으면 누명은 안 쓰겠다 싶었거든요.”

이 정도면 잘 정리해서 말한 거겠지?

유은담이 내 말을 어디까지 믿어줄지 모르겠다.

나는 불안한 얼굴을 감추지 않고 다시 입을 열었다.

내 진심이 최대한 전해지면 좋겠다는 심정이다.

“우리 공략 팀을 습격한 배후가 거대 길드라고 생각했는데, 그 거대 길드의 길드장 중 한 명을 이렇게 보게 되어서 저도 지금 굉장히 혼란스러워요. 제 사정을 다 말했으니, 이제 당신이 왜 여기 있는지 말해주겠어요? 최대한 짧게. 시간이 별로 없어요.”

유은담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의 입을 막은 부적을 떼어주었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