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6화
빛도 없이 발광 이끼에 의지해 어두운 굴을 걷는 것은 쉽지 않았다.
거기에 혹시라도 돌부리를 걷어차지 않을까 신경을 곤두세워야 한다면 더욱.
그렇게 두세 시간 정도 그들의 뒤를 쫓았을까.
문득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몇 시간이나 이 던전을 걷고 있는데 몬스터가 단 한 마리도 나타나지 않았던 것이다.
마치 이 루트 자체를 그들이 장악하기라도 한 것처럼.
그리고 어느 순간 통로가 사람의 손이 닿은 것이 분명한 느낌으로 바뀌었다.
벽 곳곳에 박힌 발광구가 길을 밝히고 있었다.
저들이 말하던 ‘본부’에 거의 다 왔다는 걸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 길을 따라 진입하자 갑자기 넓은 공터가 나타났다.
좁고 긴 굴과 작은 방으로 이루어진 던전에 이렇게 넓은 공간은 흔치 않다.
천장의 거친 마감과 벽의 상태를 보건대 인위적으로 벽과 천장을 부숴서 만든 공간 같다.
‘본부’는 생각보다 꽤 큰 규모였다.
열 개도 넘는 천막이 듬성듬성 놓여 있었는데 아마 잠을 자는 용도인지 펄럭이는 틈 사이로 침구가 살짝 보였다.
그 외에 나무로 만든 테이블이나 의자 따위도 눈에 띄었다.
테이블에는 카드 게임이 펼쳐져 있거나, 혹은 먹을거리와 술이 올라가 있기도 했다.
헌터들은 대충 스무 명이 넘어 보였는데 대부분 풀어진 얼굴로 카드게임을 즐기거나 술을 마시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대부분 따분해하는 기색이다.
본부라고 해서 바짝 긴장했는데 정작 도착하니 모두 생각 외로 허술한 모습이었다.
질서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아예 바닥에 자리를 깔고 드러누운 사람도 보였다.
- 세이프 존이야. 여기.
세이프 존이라.
그렇게 생각하니 이렇게 방만한 모습도 납득이 가긴 하지만, 여기에는 몬스터의 습격을 막을 만한 바리케이드 하나 없었다.
갑자기 B급 몬스터가 들이닥치면 어쩌려고 경계조차 하지 않는 거지.
- 오는 내내 몬스터가 등장하지 않았던 것도 그렇고, 아마 이 세이프존 전체에 몬스터의 접근을 막는 결계 같은 게 쳐져 있는 모양인데. 솔직히, 믿을 수 없군. 이만한 영역이면 엄청나게 많은 마력을 지속적으로 공급해줘야 해.
‘마석인가? 아니면 특수한 아이템을 사용한 건가?’하고 서지한이 혼자 이런저런 추측을 하기 시작했지만 나는 솔직히 뭐가 뭔지 잘 모르겠다.
나의 맹한 얼굴을 본 그가 다시 부연설명을 덧붙였다.
- 헌터가 이 정도로 몰려 있으면 보스 몬스터가 가만히 둘 리가 없어. 약한 몬스터가 지속적으로 죽어나가면 반드시 급 높은 몬스터가 나타나서 헌터들을 궤멸시키지. 그래서 공략 팀들이 몬스터를 기다리지 않고 위치를 계속 옮겨가며 움직이는 거야.
으음.
- 이만한 숫자의 헌터가 이렇게 터를 꾸릴 정도로 자리를 잡고 있었다면 한참 전에 보스 몬스터가 나타났어야 해.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건, 이들이 보스 몬스터조차 막을 만한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거지.
그렇구나.
뒤늦게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이다가 순간 머리끝이 쭈뼛 곤두섰다.
만약 그 정도의 힘을 가진 게 사람이라면?
보스 몬스터를 교란시킬 정도로 강한 헌터가 이 세이프 존에 있다면 내 존재를 모를 리가 없다.
하찮은 투명화 스크롤 같은 건 순식간에 간파해버렸을 거다.
- 다행히 마석이나 아이템 같군. 만약 사람이었다면 널 바로 알아챘을 거야. 혹시 몸에 거미줄 같은 게 닿는 느낌이 들면 바로 도망쳐. 감지 마법이니까.
서지한도 같은 생각을 했는지 한마디 덧붙여 나를 안심시켰다.
거미줄?
아직 그런 느낌은 받지 못 했다.
하지만 뭐가 느껴지더라도 진짜 거미줄일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
여기는 충왕류 던전이니까…….
거미도, 거미줄도 엄청나게 흔하다.
아무튼 내가 뒤쫓던 두 사람은 천막 안으로 사라졌다.
나는 카메라맨을 끝까지 쫓아가고 싶었지만 좁은 천막 안으로 들어가면 뭔가에 부딪쳐 투명화가 풀리거나 들킬 수도 있었다.
나는 결국 아쉽게 이 세이프 존의 가장자리를 돌며 혹시나 뭔가 건질 수 있을까 탐색해나갔다.
저 카메라맨의 영상을 상쇄할 만한 대화나 모습을 내가 찍어갈 수 있다면 좋을 텐데.
하지만 별 소득은 없었다.
대부분 카드게임이나 허세 섞인 자기 자랑 따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시 카메라맨이 천막을 나오길 기다릴 생각으로 몸을 돌리는데, 문득 분위기가 좀 다른 한 지점이 눈에 들어왔다.
천막과 천막 사이, 그리고 헌터들이 모여 있는 곳과 좀 떨어진 장소다.
세이프 존 전체로 따지면 중앙에 위치하는 곳이었다.
거기엔 왜 아직까지 못 봤을까 싶은 커다란 구멍이 하나 있었다.
인위적으로 파낸 듯 네모반듯했다.
슬쩍슬쩍 각도를 틀어가며 봤더니 구멍 아래로 이어지는 계단이 보였다.
저 아래로 내려가면 지하실이 있는 것이다.
게다가 다시 보니 이 세이프 존의 모든 천막과 구조가 저 구멍을 지키는 형태로 설계되어 있었다.
모든 헌터들이 농땡이 피우지 않고자 자리에서 보초를 선다는 전제 하에 말이다.
보초를 서야 할 헌터들은 이미 해이해진 지 오래다.
아아, 그럴 수 있지.
그럴 수 있고말고.
몬스터도 뭣도 안 나오는 상태가 계속되면 충분히 이렇게 될 수 있어.
아무튼 결국 저 구멍에 투명한 누군가가 들어간다고 해도 알아챌 사람은 없어 보인다.
오호라.
이것 참 중요하고 비밀스러워 보이는 지하실인데요.
제가 한번 들어가 보겠습니다.
경계 서는 헌터는 술 취해서 카드게임이나 하고 있으니 이제 이 지하실은 제 겁니다.
제가 마음대로 둘러볼 수 있는 겁니다.
나는 발소리를 죽여 구멍으로 다가갔다.
가만히 서 있던 서지한은 갑자기 자신의 몸이 구멍 방향으로 이동하자 깜짝 놀라 나를 불렀다.
- 손모아? 뭐 하려고?
뭘 하긴.
아주 살짝만 가서 둘러보려고 그러는 거지.
처음에는 당황했던 서지한도 경계서는 헌터가 없다는 걸 깨달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나보다 3미터 더 앞서갈 수 있고,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는다는 특징을 이용해 그는 먼저 아래로 내려가 지하를 정찰하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올라왔다.
- 한 명 있어.
나는 멈칫했지만 서지한은 태연하게 들어오라는 손짓을 했다.
좀 불안하긴 하는데 뭔가 방법이 있으니 저러는 거겠지?
아래로 조금 내려가자 계단 끝자락에 서 있는 보초가 보였다.
그리고 그 앞 복도 끝에는 작은 문이 있었는데, 척 보기에도 견고해 보이는 것이 아주 소중한 물건을 보관하고 있는 것 같았다.
예를 들어, 이 거대한 세이프 존을 유지할 만한 마력의 원천 같은 것?
- 뭐 해?
어떻게 하면 보초의 눈을 피해 정문을 열고 들어갈 수 있을까 고민하는데 서지한이 나를 불렀다.
그는 보초의 등 뒤에서 의아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 여기 쳐. 이 부근을 치면 깔끔하게 기절할 거야.
그는 친절하게도 손을 들어서 마치 절취 선을 표시하듯 보초의 목 뒤를 손으로 슥삭슥삭 문질렀다.
보초는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한 치도 예상하지 못한 얼굴로 순진하게 하품을 하고 있었다.
해맑은 그 얼굴을 보자 갑자기 마음이 좀 약해지려고 한다.
하지만 서지한이 너무 당연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그래, 어차피 이놈도 나쁜 놈 편일 거야.
투명화가 풀리지 않게 보초의 뒤로 조심스레 돌아간 후 서지한이 표시한 위치에 손날을 내리쳤다.
보초는 깔끔하게 눈알을 뒤집으며 정신을 잃었고, 나는 소리 나지 않게 그를 받아서 조심스럽게 눕혀놓았다.
보초를 때린 충격 때문에 투명화는 풀려 버렸지만 어차피 문을 열려면 풀어야 할 투명화였다.
- 이쪽으로, 빨리 와.
쓰러진 보초에게는 신경도 쓰지 않고 서지한이 먼저 걸어가 버렸다.
누가 보면 저 보초는 처음부터 자고 있었다고 생각할 만큼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나는 쓰러진 보초에게 담요를 덮어두고 그 뒤를 따랐다.
으음, 뻥 뚫린 계단 문이 좀 신경 쓰이기는 하는데 혹시라도 닫았다가 밖에서 이상하게 생각할 수도 있으니 그냥 둬야겠다.
- 그럼, 내가 건너편을 보고 올게.
뭔가 말할 새도 없이 서지한이 문으로 스며들 듯 사라졌다.
남은 나로서는 별달리 할 것이 없어서 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놀라울 정도로 아무것도 없는 공간이었다.
계단과 기절한 보초, 그리고 이 문이 전부였다.
그러고 보니 이 문, 작은 창문 같은 게 붙어 있네?
열고 닫을 수 있는 구조잖아?
으음, 어디선가 본 것 같은데.
아, 감옥의 독방 같은 데서 이 문을 열고 죄수를 들여다보거나 했던 것 같다.
드라마에 나왔던 게 기억난다.
그런데 이런 창문이 왜 여기에…….
생각을 마치기 전에 서지한이 불쑥 다시 나타났다.
그는 놀란 것 같기도 하고 분노한 것 같기도 한 딱딱한 표정이었다.
“왜 그래요? 건너편에 뭐 위험한 거라도 있어요?”
그는 대답 대신 고개를 까딱여 문을 턱짓했다.
정확히는 문에 달린 눈구멍을.
- 직접 봐. 위험한 건 없어.
말해주면 될 텐데 왜 직접 보라는 거지?
묻고 싶긴 하지만 서지한이 워낙 무시 무시한 표정이라 나는 순순히 그 말대로 문의 눈구멍을 열었다.
그리고 건너편을 확인한 순간 충격으로 굳어졌다.
아는 사람이 있었다.
정확히는, 대단히 유명한 사람이었다.
유은담.
암현 길드의 길드장이자 한국에서 가장 강한 마력계 헌터인 그가 정신을 잃은 채 그곳에 감금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