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65화 (65/231)

065화

하얀 털 뭉치 같기도 하고.

“이게 뭐죠?”

- 이곳 충왕류의 고치실이야. 아까 봤던 그 거대 거미 몬스터가 꽁무니에서 뿜어내지. 아무래도 먹이로 가져간 것 같은데. 죽었다고 봐야 해.

나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여기서 도망쳐서 복면인과 잠깐 대치하고, 백대만과 싸우고.

반서진에게 충왕뇌우를 시전 하는 많은 일이 있긴 했지만 실제 시간은 한 시간 남짓도 안 걸렸다.

그 잠깐 사이에 몬스터가 와서 그들을 데려가 버렸다고?

솔직히 부정하고 싶지만 여기저기 거미줄이 널려 있으니 너무나 명백했다.

“혹시라도 고치 속에서 아직 살아있을 가능성은 없을까요?”

- 없어. 공략 초기에 그렇게 잡혀 간 헌터들을 구출하려고 해 봤는데, 모두 질식해서 죽어 있었어. 이만한 시간이 지났으면 이미…….

일말의 희망도 없다는 선고를 들으며 나는 스르륵 주저앉았다.

갑자기 맥이 빠졌다.

두 사람을 그리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죽기를 바랄 정도는 아니었다.

- 괜찮아?

“괜찮아요. 그냥, 좀 허무해서.”

- 좀 쉬어.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인벤토리를 열었다.

뭔가 좀 먹어야겠다.

그런데 인벤토리 안에 있는 과자들을 보니 문득 처음 공략 팀을 만났을 때가 생각났다.

마치 소풍이라도 가는 것처럼 들떠서는…….

- 일단 먹고 좀 쉬어.

내가 과자 봉지를 들고 멍하니 앉아 있자 서지한이 채근했다.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 기계적으로 으적으적 과자를 씹고 있자니 갑자기 탈력감이 들었다.

“일단 던전에서 나가야겠죠?”

- 으음.

서지한은 대답 대신 얼굴을 쓸어내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 상황이 답답한 건 그도 마찬가지인가 보다.

공략 기간은 아직 절반이나 남았는데 팀은 풍비박산이 나버렸다.

더 이상 공략을 진행할 수 없게 됐으니 나간다는 선택지밖에 없는데, 마음에 걸리는 게 한두 개가 아니다.

가장 큰 건 백광현 길드장.

백대만이 이 일에 이만큼이나 가담했는데 백광현 길드장이 결백하다고 믿는 건 지나치게 낙관적인 생각일 것이다.

지금까지 백광현 길드장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이미지는 다소 무능하지만 꿈 많고 착한, 마치 망해가는 스타트업 회사의 사장을 보는 듯 약간 딱한 느낌이었다.

그래서 그가 공략 팀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 음모와 결탁했다는 가설을 받아들이기가 쉽지는 않았다.

하지만, 냉정하게 생각하면 그가 모를 리가 없었겠지.

대체 왜 이런 짓을 저지른 거지?

거대 길드와 사이가 안 좋은 것 아니었나?

대한 길드에서 다투고 나왔다는 이야기도 있었잖아.

첫날 나에게 함께 길드를 키워보자고 말하기도 했고.

어째서 변절한 거지?

혼자 길드를 꾸려가기가 버거웠던 건가?

그래서 손을 잡은 건가?

실제로 거대 길드에서 견제가 심하긴 했지.

인터뷰에서 이름을 아무리 언급해도 언론에서는 조명조차 하지 않을 정도였으니.

잠깐.

좀 이상하다.

정체에 대해서는 아직 잘 모르지만, 그들은 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사람도 서슴없이 죽인 이들이다.

그런 사람들이 언론을 주무를 수 있는 힘을 가지고도 그저 백광 길드의 이름이 알려지지 않도록 하는데 그쳤다?

너무 온건한 견제가 아닌가?

서지한에게 한 것처럼 백광현 길드장 한 명 정도 범죄자로 둔갑시켜 제거하는 것 정도는 그들에게 일도 아닐 거다.

마음만 먹었다면 아무도 모르게 길드 전체를 박살 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고 그냥 백광 길드가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것을 막는 정도에 그쳤다.

그렇다는 이야기는, 견제가 아니라 은닉에 목적이 있었다는 것이다.

구린 일을 하는 조직을 숨기듯이.

“아까 그 사람들이 분명 거대 길드만 던전을 공략해야 한다는 여론을 만들려고 이런 짓을 꾸몄다고 했죠?”

- 그랬지.

별생각 없는 듯한 서지한의 얼굴을 바라보며 나는 머릿속의 추측을 빠르게 완성해나갔다.

“방금 떠오른 생각인데, 백광 길드는 처음부터 이런 용도로 만들어진 길드일 수도 있어요.”

- 뭐?

“대한 길드에서 문제를 일으키고 나왔다는 것도 그냥 길드장이 한 말이지 진짜인지는 모르잖아요.”

- 계속해봐.

서지한은 이미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다 알아들은 눈치였지만 다음 말을 재촉했다.

“언론에서 백광 길드의 노출을 꺼린 거, 신생 길드 견제라고 생각했지만 그게 아닌 것 같아요. 괜히 많은 정보를 뿌리다가는 나중에 꼬리를 잡힐 수도 있으니까. 필요할 때 사용하고 버릴 길드라면 그냥 있는 듯 없는 듯 지내다가 잠깐만 나타나는 게 제일 좋잖아요.”

- 으음.

“길드 건물도 일부러 눈을 피하게 하려고 외딴 허허벌판에 만들었고. 실제로 다들 견제라고 생각할 뿐 별다른 의심을 하지는 않았잖아요. 그리고 백광현 길드장의 사비라고 하던 길드 운영 자금도 저 뒷배들이 제공했겠죠.”

내 말이 끝난 후 서지한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사실 방금 한 말은 그냥 다 추측에 불과한 것이다.

진짜가 아닐 수도 있다.

그래도 일단 거대 길드가 이 일에 가담한 건 분명하고, 그건 아니더라도 적어도 여론을 형성할 만한 힘을 가진 사람이 배후로 있는 것도 확실하다.

그들의 계획에 따르면 나는 이 던전에서 죽어야 했다.

하지만 살아남았고, 그들의 계획도 틀어져버렸다.

이대로 던전을 나간다고 해도 좋은 결과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 안 든다.

그들에게 나는 방해물이니까.

“차장님과 대리님이 걱정이네요.”

- 어차피 두 사람은 민간인이잖아. 별일 없을 거야. 네 걱정이나 해.

맞는 말이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할 따름이다.

“나가면 어떻게 될까요.”

- 밤손님이 꽤 찾아오겠지. 네 입도 막고, 뒤탈도 없애버릴 겸.

예상한 대답이긴 하는데 그의 입으로 들으니 좀 더 암담해지는 느낌이다.

“역시 카메라, 찾아야겠어요.”

- 아까 못 들었어? 한패가 더 있다고 했어. 그놈들.

“알아요. 위험할 수 있다는 거. 하지만 거기에는 진실이 찍혀 있잖아요. 습격한 헌터들이 자기들 입으로 떠든 말들. 무편집본이라고요.”

상대는 누명 씌우기의 전문가들이다.

던전 밖으로 나갔을 때 어쩌면 이번에는 내가 누명을 쓰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 카메라의 영상만 있으면 진실을 알릴 수 있다.

- 좋아. 그런데 어떻게 찾으려고?

그게 문제다.

그 카메라맨을 놓치면 안 되는 거였는데.

그를 어디에서 찾는단 말인가?

이미 이 던전을 나갔을 수도 있다.

- 잠깐, 어서 숨어.

고민에 빠져 있는데 서지한이 다급하게 손짓했다.

숨다니, 왜?

- 누군가가 여기에 오고 있어.

나는 더 생각할 것도 없이 투명화 스크롤을 꺼내 찢었다.

그리고 기척을 지우는 스크롤도 찢어 내고 벽에 달라붙어 숨을 죽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서지한이 말했던 기척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몬스터의 것과는 확연히 다른 가벼운 발소리가 들렸던 것이다.

발소리는 점점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는 것 같은 낮은 목소리도 들렸다.

역시 한 명이 아니었다.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두 명의 남자였다.

그중 하나는 내가 그렇게 찾고 싶어 하던 카메라맨이었다.

“없는데? 쯧, 몬스터가 주워간 지 한참 된 것 같다.”

카메라맨과 함께 온 복면인은 사방에 늘어진 거미 몬스터의 실을 보고 고개를 저었다.

전투력을 가늠할 수 없는 상대다.

나보다 강하다는 뜻이었다.

나는 혹시라도 그가 나를 감지할까 봐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런, 추가 샷 뽑아야 하는데. 장면이 부족해요. 이러면 나만 까일 텐데.”

카메라맨이 울상을 짓자 복면인이 짧게 혀를 찼다.

“백대만 저 꼴 된 거 보니 이미 그놈들 알 거 다 아는 상태던데 살아나가서 쓸데없는 소리 지껄이면 너 까이는 정도로 안 끝날걸?”

철없는 것을 보듯 하는 시선에 카메라맨이 비굴하게 웃으며 굽실거렸다.

“히히, 형님. 그래도 영상이 있는데 걔네들이 어쩌겠습니까? 적당히 편집해서 보내면 뭐, 그냥 헛소리라고 생각하겠죠. 물증이 짜세 아닙니까?”

“새끼, 어쨌든 백대만이 탈출석을 줬을 리는 없으니 아직 던전 안을 돌아다니고 있을 텐데 빨리 찾아야 해. 우리 둘로는 무리고, 일단 본부로 귀환해서 수색 팀을 꾸리자.”

본부로 귀환한다고?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근데 형님, 어쩌면 이미 나갔을지도 몰라요. 그 손모아 헌터가 다인용 탈출석 가지고 있는 거 같던데. 한 개만 가지고 오진 않았을 걸요.”

“그래? 그것도 본부 가면 알겠지. 근데 걔네가 벌써 탈출했으면 외부팀이 들어와서 상황 공유해주지 않았겠냐. 아무튼 가자.”

두 사람은 잠시 주변을 더 살펴보더니 아무런 소득이 없다고 생각했는지 왔던 통로로 다시 돌아가기 시작했다.

나는 기척이 사라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조용히 서지한에게 물었다.

“방향, 알려주세요.”

기척을 느끼는 건 서지한이 더 뛰어나다.

괜히 내가 바짝 뒤를 쫓다가 들키는 것보다 서지한에게 의지하며 거리를 최대한 벌리고 가는 것이 좋을 것이다.

서지한은 영 내키지 않는 표정이었지만 한숨을 내쉬며 앞장섰다.

- 이쪽이야.

혹시라도 소리 나는 것을 밟을까 봐 나는 감각을 최대한 끌어올려 신경을 곤두세운 채 복면인들의 뒤를 밟았다.

나만 그들을 찾아다닌 게 아니었다.

작전이 틀어진 바람에 그들도 뒷수습을 위해 나를 찾아다니고 있었다.

정확히는, 뒷일을 살피러 왔다가 백대만이 죽은 걸 보고 상황 파악을 하려고 남은 이들을 쫓은 거겠지만.

덕분에 찾는 수고를 덜었으니 다행이다.

- 혹시라도 들키면 바로 탈출석 써.

앞서 걷던 서지한이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며 당부했다.

탈출석이라.

이들의 대화를 들어보면 어차피 탈출석을 써서 나간다고 해도 ‘외부팀’이 대기하고 있겠지.

딱히 소용없을 것 같은데.

내 생각을 읽은 듯 서지한이 덧붙였다.

- 적어도 다른 눈이 있으니 바로 죽이려고 하지는 않을 거야.

하긴, 서슴없이 노미래와 노희망을 죽여 버린 놈들이다.

나를 찾아내면 죽여서 입을 막으려고 할 가능성이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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