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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4화 (64/231)

064화

진심일까?

하지만 혹하는 제안이다.

반서진의 능력은 정해진 형태가 없어서 피할 수도 없고, 막아내는 것도 까다로워 보였다.

솔직히 이길 자신이 없었다.

고민하는 나에게 반서진이 다시 말했다.

“네가 남의 비밀을 여기저기 떠들고 다닐 것처럼 보이지도 않고. 나도 별로 내키지가 않네.”

그녀의 마음이 바뀔까 봐 나는 다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 필사적인 대답을 가만히 보던 그녀가 싸늘하게 덧붙였다.

“물론 말하고 다니면 너도 죽고, 들은 놈도 죽는 거야. 알겠지?”

무섭다.

피에 젖은 얼굴에 광기가 선명하다.

번들거리는 눈알을 마주하자 저절로 마른침이 삼켜졌다.

“네. 절대 말 안 할게요.”

“그래? 그럼 그만하자.”

그녀는 생긋 웃더니 손가락을 가볍게 흔들었다.

흠칫 놀라 반사적으로 마력을 끌어올리는데, 그때까지도 내 몸을 속박하고 있던 백대만의 속박 아이템이 툭툭 뜯겨 나갔다.

“자. 그럼 이건 여자들끼리의 비밀로 하고.”

마치 야식 파티에서 수다라도 떠는 것처럼 천연덕스럽게 말한 그녀는 잠시 주변의 돌무더기를 둘러보았다.

“아, 죽이기 전에 탈출석 뜯어냈어야 했는데. 혹시 탈출석 더 가진 거 있어?”

나는 자동으로 움직여 인벤토리에서 1인용 탈출석을 꺼내 내밀었다.

없다고 잡아뗄 수도 있었지만 반서진의 잔인한 모습에 압도되어 거짓말할 엄두를 내지 못 했다.

심장이 콩알만 하게 졸아붙은 기분이다.

벌벌 떨지 않고 담담한 척 대화하는 것이 내가 지금 발휘할 수 있는 최대한의 허세였다.

반서진이 대체 무슨 변덕으로 나를 살려 두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기분 이상하면 다시 생각을 바꿀지도 모른다.

“여기요.”

반서진은 잠시 멈칫하더니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탈출석 필요하다더니 왜 안 받고 이러지?

의아해하던 중에 반서진과 비슷한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는 서지한과 눈이 마주쳤다.

“그냥 준다고?”

“네? 네.”

반서진은 기가 차는 듯 묻더니 내 확답을 듣고서야 탈출석을 받아갔다.

“너 진짜 착하네. 어떻게 아직까지 살아 있어?”

착해서가 아니라 댁이 무서워서야.

고맙다는 인사는 기대도 안 했지만 저주인지 욕인지 애매한 말을 들으니 기분이 썩 좋지는 않다.

내 애매한 얼굴을 보고 그녀는 피식 웃어버렸다.

“나한테는 잘된 일이지만. 어쨌든 잘 쓸게. 네 몫도 있지?”

그 와중에 내 생각도 해주시네.

이것 참 고맙다고 해야 할지.

“네. 있어요.”

“그럼 갈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직 할 일이 있기도 하고, 솔직히 탈출석을 건넨 건 반서진이 빨리 떠나 줬으면 하는 생각에 건넨 것이다.

아직까지 백대만을 주먹으로 으깨던 그 모습이 뇌리에 남아 있어서 그녀가 앞에 서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솜털이 곤두서는 느낌이었다.

“저는 아직, 아까 도망친 한 명을 좇아보려고요.”

“도와줄까?”

“괜찮아요.”

“그래, 그럼 안 죽게 조심해라.”

시원시원하게 납득한 반서진은 잠깐 탈출석을 만지작거리더니 조용히 말했다.

“그럼 나는 먼저 가서 길드장을 만나 봐야겠어.”

“죽이려고요?”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한 차례 빛이 번쩍였다. 반서진은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마침내 그녀가 완전히 떠났다는 것을 확인한 나는 그대로 주저앉았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 괜찮아?

“네.”

혼자가 되고 나니 약간 차분해진다.

엄밀히 말하자면, 서지한이 있어서 완전히 혼자라고 하긴 좀 그렇지만.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인지…….”

단 한 시간 전까지만 해도 그럭저럭 돌아가고 있던 공략 팀이 순식간에 풍비박산이 나버렸다.

갑자기 김영길 헌터를 죽인 가짜 서지한을 만난 것도 놀라운데.

노희망과 노미래가 공격당했고 백대만은 반서진에게 맞아 죽었다.

결과적으로 공략 팀에서 살아남은 건 나와 반서진 둘뿐이다.

- 많이 놀랐지?

고개를 들자 안절부절못하며 나를 살피는 서지한이 보였다.

그와 이렇게 편하게 대화하는 것도 오랜만이다.

“놀라긴 했죠.”

- 그래도 슬프지는 않지? 짜증 나는 놈들이었잖아.

슬픈가?

잘 모르겠다.

하지만 죽어서 잘됐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아무리 쓰레기 같은 인간이더라도 24시간 내내 재수 없는 말만 하지는 않는다.

서지한은 ‘그게 이놈들이 아직 죽지 않을 수 있었던 비결이지’라고 말했는데 반쯤은 동의한다.

만약 그랬다면 이 험한 헌터 업계의 누군가가 벌써 그들을 죽였을 테니까.

백대만이 맞아 죽은 것처럼.

그래도 예전이었다면 눈물 정도는 흘렸을지도 모르겠는데.

각성하고 나서 죽음과 전투에 대한 감각이 좀 둔해진 느낌이다.

아까 반서진을 앞에 두고 포션을 마시며 침착하게 다음 싸움을 준비하는 것도 각성 전에는 꿈도 못 꿨을 태도였다.

최근에 워낙 많은 일을 겪어서 그런 건지, 아니면 힘이 생겨서 그런 건지.

각성으로 인해서 내 성격이 바뀐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예전 같지 않다는 건 분명했다.

- 괜찮아? 괜찮지?

서지한이 너무 걱정하고 있는 것 같아서 나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그는 씩 웃었다.

- 그놈들이 쓰레기들이라 장점도 있군.

“뭐요?”

어쩐지 대답은 짐작이 가지만.

- 네가 별로 안 슬퍼한다는 거.

“하하.”

웃는 게 웃는 것이 아니다.

건조한 내 웃음을 보고 어쨌든 한시름 덜었는지 서지한은 신나게 이것저것 떠들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어서 즐거운 것 같다.

진짜 나 없어지면 이 사람 어쩌나…….

“서지한 씨, 나가면 우리 꼭 바티칸 가봐요.”

조금 갑작스러운 말이었을까.

서지한이 의아하게 반문했다.

- 왜?

“성불해야죠.”

이래저래 일이 많아서 잠시 중단하긴 했지만 서지한이 이렇게 된 건네 책임이니까 최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고의가 아니었긴 하지만 그래도 내가 루팅을 하지 않았다면 이렇게 영혼 상태로 구천을 떠돌 일도 없었겠지.

내가 공략 팀원들과 소소하게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면 그는 늘 한쪽 구석에 쓸쓸히 혼자 서 있었다.

혼자 있는 게 싫어서 인벤토리에도 들어가지 않는 사람인데, 나중에 혼자 영혼석으로 남게 되면 얼마나 힘들까.

- 난 괜찮다고 했잖아.

“나 없어지면 어떡하려고요.”

서지한이 멈칫 얼굴을 굳혔다.

- 왜 그런 말을 해?

“그냥, 살면서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잖아요.”

- 없을 거야.

우리가 살아가며 확언할 수 있는 게 얼마나 될까.

1년 전만 해도 내가 이렇게 살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하지만 나는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약간의 침묵이 흐른 후 화제를 돌리며 입을 열었다.

- 정말 그놈을 쫓아갈 거야?

“누구요?”

- 카메라 든 놈.

“그래야 하지 않을까요?”

- 내 루머 때문에?

“그렇죠? 서지한 씨도 루머가 더 생기는 건 싫잖아요.”

- 나는 상관없어. 어차피 죽었는데 뭐.

그가 어깨를 으쓱이며 정말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을 지었다.

“화도 안 나요?”

- 네가 알잖아. 아니라는 거. 그럼 됐어.

“그래도…….”

- 아무도 안 믿어주던 시절도 있었는데 뭐.

그 말은 약간 쓸쓸하게 들렸다.

“서지한 씨…….”

- 나같이 강한 사람이 뭔가 피해를 당하고 있다는 걸 보통 사람들은 생각도 하지 않아. 믿어주지도 않고. 그때에 비하면 훨씬 사정이 나은 거지. 그러니까 너도 무리해서 그놈 쫓을 필요 없어. 나는 진짜 괜찮으니까.

“음.”

내 반응이 영 미적지근하자 그가 재촉하듯 다시 입을 열었다.

- 이제 어떡할 거야? 나갈 거야?

“일단은.”

- 일단은?

“노미래 씨와 노희망 씨에게 가보죠. 죽었다고 생각되긴 하지만, 혹시라도 살아 있을 수 있으니까요. 그러면 탈출석도 없이 남겨졌으니 무척 곤란할 거예요.”

- 으음. 네가 원한다면.

서지한은 내 결정을 왠지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 것 같았지만 나는 일단 걸음을 옮기기로 했다.

도망치기 시작한 뒤 거의 바로 붙잡힌 덕분에 다행히 두 사람과 마지막으로 함께 있던 장소에서 멀리 떨어지지는 않았다.

조금 걸으면 금방 도착할 거리다.

충왕뇌우로 천장과 벽이 부서진 탓에 길이 험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방향을 가늠하는데 문제는 없었다.

- 발 조심해. 넘어질라.

“저기요, 저도 각성자거든요.”

- 민첩 능력치는 없잖아.

“그건 그렇지만.”

아무리 그래도 내가 각성까지 했는데 돌에 걸려 무릎을 찧을까.

자신만만하게 생각하는 순간, 비스듬하게 치솟은 돌을 잘못 밟고 미끄러질 뻔했다.

순간적으로 휘청하다가 가까스로 중심을 잡자 어정쩡하게 손을 내민 서지한이 보였다.

- 못 잡는 걸 아는데 나도 모르게 그만』

머쓱한 듯, 씁쓸한 듯, 서지한이 나직하게 말했다.

그러더니 앞서 걸어 나가 돌부리로 가득 찬 길을 살피다가 밟기 좋은 곳을 골라 길잡이 노릇을 하기 시작했다.

- 이쪽으로 가.

나는 묘한 기분으로 그가 권하는 길을 따라 움직였다.

서지한이 조금 과하게 나를 돌볼 때마다 뭐라고 하기 힘든 간질간질한 느낌이 든다.

그나저나 충왕뇌우 덕분인지 주변에서는 몬스터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가.

솔직히 연이은 일로 정신적으로 좀 지친 상태라서.

그렇게 충왕뇌우로 무너진 지역을 벗어난 후 나는 낯익은 모퉁이를 발견했다.

“아, 저기네요.”

- 응. 그런데…….

앞서 걷던 서지한이 애매한 반응을 보이며 엉거주춤 멈춰 섰다.

무슨 일인가 해서 서둘러 걸어간 나는 눈앞의 광경에 황당해졌다.

“여기 맞죠?”

분명 쓰러진 노희망과 노미래를 볼 거라고 생각했는데.

도착한 장소에는 아무도 없었다.

- 맞아. 이쪽에 흔적도 있고.

서지한이 가리킨 곳에는 두 개의 핏자국이 남아 있었다.

무언가에 베여 다량의 출혈을 일으킨 흔적이다.

하지만 핏자국의 주인은 보이지 않는다.

“살아서 도망친 걸까요? 힐링 포션을 바로 먹었으면 살았을 수도 있어요.”

그게 아니면 복면인의 잔당이 데려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최대한 희망적으로 생각하고 싶었기 때문에 그 생각은 애써 삼켰다.

하지만 서지한은 내 말에 회의적인 것 같았다.

- 음. 그럴 가능성은 낮을 것 같은데.

주변을 쓱 훑어보는 그의 시선을 따라가니 희끄무레한 먼지 뭉치 같은 것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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