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3화
으음, 반서진이 백대만을 수상하게 생각하는 이유는 탈출석을 안 썼다는 것과 첫 공격을 피했다는 것 같은데.
나도 좀 억측 같긴 하다.
“그리고 저놈들, 우리를 알고 온 눈치였는데 우리 정보를 들었다면 네가 리더인 것도 알고 있겠지. 그러면 탈출석을 가지고 있는 너를 제일 먼저 죽여야 했던 거 아니야?”
반서진이 끌어올리는 기세가 점점 심상치 않게 변해가고 있다.
백대만이 무슨 말을 하든 그를 공격할 태세였다.
이쯤에서 슬슬 말려야겠는데.
- 말리지 마. 그냥 둬.
서지한이 실실 웃으며 말하는 것을 잠깐 째려본 후 나는 싸움을 중재하기 위해 끼어들려고 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백대만은 모든 것을 인내하며 화해의 악수를 내밀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만하고 우리끼리 그만 싸우자. 도망친 놈 잡아야지.”
반서진은 백대만이 내민 손을 가만히 노려보았다.
나도 두 사람이 손을 잡을지 말지 지켜보고 있었다.
한참을 노려본 끝에, 반서진은 백대만의 손 대신 너클을 쥔 자신의 손을 꽉 쥐었다.
싸우겠다는 제스처다.
아, 역시 말려야겠어.
“반서진 헌터, 그만 하시고…….”
그때였다.
내가 끼어드는 순간 반서진의 주의력이 흐트러진 틈을 타고 백대만이 무언가를 확 던졌다.
돌돌 말린 와이어 같은 것이었는데, 그것은 던져지자마자 포획 망처럼 쫙 펼쳐지더니 나와 반서진의 몸에 달라붙어 칭칭 감겼다.
뭐야, 이거?
백대만, 설마.
“쫑알쫑알 졸라 말 많네. 하, 짜증 나게.”
언제 화해를 요청했냐는 듯 백대만의 얼굴은 험악하게 구겨져 있었다.
꽁꽁 묶인 채 서 있는 우리를 보고도 뭔가 마음에 안 드는 듯 바닥에 침을 뱉더니 반서진을 쏘아보았다.
“처음부터 이렇게 할 걸. 유인해서 합류한 다음 샷 뽑고 죽이라고 지시받긴 했는데, 저쪽 사람이 뒈졌으니 나도 모르겠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뒷마무리라도 내가 해야지. 어차피 따라올 것 같지도 않고.”
백대만이 인벤토리에서 제 무기를 꺼내 들었다.
그가 즐겨 사용하던 거대한 철퇴다.
“같이 갔으면 조금이라도 더 길게 살았을 텐데. 아니, 차라리 이게 낫다. 특히 너, 계속 패주고 싶었어. 살려달라고 빌면 조금 덜 고통스럽게 죽여주마.”
살기등등한 백대만의 선언에도 반서진은 태연하게 나를 돌아보았다.
“내 말 맞지? 수상하다고 했잖아.”
그런 여유 있는 태도가 무척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백대만이 철퇴를 붕붕 휘두르며 반서진에게 다가갔다.
무슨, 죄인 목을 베려고 준비하는 망나니 같다.
“그 여유가 언제까지 갈지 지켜보지. 일단 한 대 맞…….”
반서진에게 철퇴를 휘두르려던 백대만이 갑자기 차에 치이기라도 한 듯 휙 날아가 한쪽 벽에 처박혔다.
그가 잡고 있던 철퇴는 저만치 날아가 버렸다.
갑자기 벌어진 상황에 눈만 부릅뜨는데, 반서진을 묶은 속박 아이템이 툭툭 풀려 떨어져 나갔다.
마치 누가 풀어주기라도 하는 모습이다.
이건 또 뭐야.
“뭐. 뭐야.”
머리를 털며 부스스 몸을 일으키던 백대만이 이번에는 누가 잡아당긴 듯 휙 딸려왔다.
“비밀은 너만 있는 게 아니거든.”
나직하게 속삭인 반서진이 손가락을 살짝 흔들자 백대만의 몸이 마치 걸레 짜듯 비틀렸다.
“그으으으!”
백대만은 온몸에 힘을 주며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저항했다.
그의 목에 선명하게 선 힘줄이 그가 얼마나 필사적으로 반항하고 있는 중인지를 보여주었다.
- 염동력이군. 그것도 꽤 강한.
긴장한 얼굴로 서지한이 나를 돌아보았다.
무슨 고문하는 스킬이라도 가지고 있나 했는데 생각보다 친숙한 능력이었다.
서지한이 다시 뭔가 말하려는 순간, 허공에 떠올라 있던 백대만 이 땅에 풀썩 떨어졌다.
“너도 참 단순하네. 솔직히 계속 잡아떼면 그냥 좀 패고 미안하다고 하려 했는데.”
여상스럽게 말하는 반서진을 백대만은 철천지원수 보듯 노려보고 있었다.
힘도 못쓰고 당한 게 무척 자존심이 상한 모양이다.
곧 그의 몸이 노란빛에 휩싸였다.
처음 보는 스킬인데, 아마 백대만도 힘을 숨기고 있었나 보다.
- 손모아, 끈 풀 수 있겠어?
고개를 저었다.
나도 저 두 사람이 싸우는 틈에 몸을 빼고 싶은데, 아무리 힘을 줘도 꼼짝도 안 한다.
손바닥도 이상한 방향으로 뒤틀려있어서 충왕포도 못 쓴다.
잘못 쏘면 내 몸이 꿰뚫린 판이다.
“오, 단단해지는 스킬인가 보네?”
“아까처럼 쉽지는 않을걸.”
백대만이 피 섞인 침을 뱉었다.
그 말대로 반서진의 스킬 효과가 반감되는지 아까처럼 휙 들려서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상황은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반서진은 오히려 더 좋아하는 것 같다.
“사실 나는 근접 스킬 공격이 없어. 염동력으로 신체를 강화해서 싸우는 것뿐이지. 왜 그러는지 알아?”
“내가 알게 뭐야, 미친 새끼야.”
거친 대답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반서진은 즐겁다는 듯 다시 입을 열었다.
“직접 때리는 게 손맛이 더 좋거든.”
“이거 진짜 미친놈네.”
백대만은 싫지만 이번만큼은 백대만의 생각에 동의한다.
서지한도 약간 질린 얼굴로 반서진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행복한 표정으로 황홀하게 백대만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사람 패는 거 너무 오랜만이야. 대만아, 백대만 맞자. 그러고도 살아 있으면 살려줄게.”
앗, 저거 나도 했던 생각인데.
사람 생각하는 건 다 거기서 거기구나.
양 손에 낀 너클을 맞부딪쳐 쇳소리를 낸 반서진이 주먹을 휘둘렀다.
듣고 보니 몬스터를 상대하는 반서진은 종종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움직임으로 싸우는 경우가 있었다.
허공을 박차거나, 이상하게 체공시간이 길다거나 하는 식이다.
그게 염동력으로 신체 움직임을 보조해서 그런 거였다니.
두 사람의 싸움은 싱거울 정도로 금방 끝났다.
애초에 반서진이 일방적으로 유리한 싸움이었다.
사람의 몸을 들어 올려 날려 버릴 정도의 염동력 앞에서 백대만이 할 수 있는 건 많지 않았다.
스킬을 써서 염동력이 직접 몸에 작용하는 건 막았지만, 비정상적 인궤 도로 움직이는 반서진의 공격은 저지하지 못 했다.
결국 머리에 몇 대의 유효타를 맞은 후 몸을 보호하는 스킬이 풀려버렸고, 그걸로 끝이었다.
반서진의 너클이 몇 번이나 백대만의 몸을 파고들었다.
전신의 뼈가 부서진 백대만의 고통스러운 비명이 터져 나온다.
나는 눈앞의 광경에 압도되어 얼어붙어 있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는 백대만의 비명도 들리지 않았다.
마침내 실컷 주먹으로 백대만을 으깨어 놓은 반서진이 나른하게 고개를 들었다.
곧이어 피에 젖은 그 얼굴이 나를 향했다.
“그럼, 손모아 헌터.”
네?
저는 갑자기 왜 부르시죠?
- 손모아. 도망쳐.
반서진이 이어 말하는 목소리와 서지한의 것이 겹쳐 들렸다.
“너는 딱히 죽이고 싶지는 않지만, 비밀은 비밀이라. 이걸 아는 사람은 다 죽어야 하거든.”
“네, 네?”
반사적으로 대답하긴 했는데 반서진은 이 소리를 긍정으로 받아 들 인모 양이다.
“이해하지? 사과의 의미로 빨리 끝내줄게.”
반서진이 아쉽게 미소 짓는 순간, 목을 옥죄는 무형의 힘이 느껴졌다.
이대로라면, 목이 잘린다.
애타게 내 이름을 부르는 서지한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스킬 하나를 떠올렸다.
충왕뇌우.
나의 의지에 화답하여 충왕 케르기스의 힘이 모여들었다.
충왕뇌우는 범위가 넓은 대신 대미지가 약한 편이다.
그 약한 대미지를 극대화하기 위해나는 마력을 쏟아부었다.
모든 마력을 밀어 넣은 덕분에 이마가 타는 듯이 뜨거웠다.
생각해보니, 이렇게 많은 마력을 사용해서 충왕뇌우를 시전 하는 건 처음이다.
광역 공격이라 뒷일이 걱정되긴 하지만, 망설이면 내 목이 날아갈 판이다.
이마에 모여든 빛이 사방을 가득 메우며 흩어진다.
이어서 강력한 뇌우가 눈앞을 하얗게 불태웠다.
얼핏 반서진이 뭔가 말하는 것 같았지만 제대로 보지 못 했다.
내가 온 힘을 다해 발동한 충왕뇌우는 무시무시한 파괴력을 보여주었다.
케르기스가 사용한 규모보다는 훨씬 작았는데도 불구하고 이 좁은 공간을 강제로 확장공사해버린 것이다.
천장이 박살 나고 땅이 박살 나고 벽이 박살 나고.
스킬 시전 범위에 있던 모든 지형지물이 쪼개졌다.
다행히 내가 서 있던 자리에는 뇌우가 치지 않아서 내 머리 위로 떨어진 돌은 없었다.
하지만 내가 서 있는 자리를 제외한 곳은 모두 철거 중인 공사 현장처럼 변해버렸다.
몰아치는 먼지에 한참 기침을 하고 고개를 들자 보이는 건 온통 돌무덤뿐이다.
반서진도 그 아래 깔렸는지 보이지 않았다.
“죽었나…….”
“아니.”
기겁해서 고개를 들자 저 높은 위치에 고고하게 서 있는 반서진이 보였다.
망했다.
방금 이 공격에 영혼까지 짜 넣은 바람에 시야가 핑핑 돌고 있었다.
마력을 바닥까지 긁어모아 써버린 탓이다.
덕분에 다른 스킬을 쓴 여력이 남지 않았는데.
하지만 나는 내색하지 않고 일 단 인벤토리에서 마력 회복 포션과 마력 증가 포션을 꺼내 마셨다.
포션 특유의 푸르스름한 빛이 내 몸에 감돈다.
내가 허겁지겁 포션을 마시는 동안 반서진은 무슨 생각인지 나를 가만히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포션을 마시고 나니 그래도 상태가 점점 호전되기 시작했다.
시간을 좀 벌면 다시 한번 해볼 수도 있을 것 같다.
도전적으로 올려다보는 나를 잠시 바라보던 반서진이 돌연 거리를 좁혀 바짝 다가왔다.
“숨기고 있는 스킬, 더 있어? 예를 들면, 아까 그 연막 스킬이라든가.”
김영길의 원한이 뿜어낸 검은 안개를 내 스킬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 같다.
가까이에서 본 반서진은 정말 무시무시한 형상이었다.
백대만의 피에 젖은 붉은 얼굴이 마치 악귀 같았다.
- 대답하지 마.
그럴 생각이다.
나는 대답 대신 다시 한번 충왕뇌우를 준비했다.
“나도 널 죽이고 싶지는 않아.”
“저도 죽이고 싶지 않아요.”
바짝 긴장한 내 대답에 반서진은 잠시 무언가 생각하는 듯 뺨을 톡톡 쳤다.
그러더니 가벼운 어조로 툭 내뱉었다.
“그럼 그만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