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61 화 (61/231)

061 화

루팅을 마치고 우리는 다시 몬스터를 찾아 던전을 공략해나갔다.

캠프를 짓고, 근처의 몬스터를 처치하고, 몬스터가 더 이상 보이지 않으면 다른 곳에 캠프를 다시 짓고 이걸 반복한다.

다행히 아직까지는 약한 몬스터만 만나서 크게 위험한 일은 없었다.

이 정도면 ‘충왕폿!’으로도 가볍게 꿰뚫어 버릴 수 있다.

솔직히 좀 시시할 정도였다.

전투를 마칠 때마다 녹색 인간이 되어버리는 근거리 전투원들은 생각이 좀 다른 것 같지만.

“잠깐, 저기 사람 아니야?”

선두에 서 있던 노미래가 손을 들어 한쪽을 가리켰다.

확실히, 몬스터보다 훨씬 작은 크기의 무언가가 천천히 움직이는 것 같다.

어두워서 확실히 보이지는 않지만, 사람 형태가 분명했다.

“다른 공략 팀인가?”

노희망이 미심쩍은 듯 중얼거렸다.

“흠. 하긴, 그럴 수도 있겠군. 아니면 낙오자일 수도 있고. 가보면 알겠지.”

백대만이 성큼성큼 앞서 나갔다.

그러자 다른 사람들도 어쩔 수 없이 뒤를 따르게 되었다.

저쪽에서도 우리를 향해 걷고 있었는데, 가까이서 보니 총 세 명의 잘 갖춰 입은 헌터들이었다.

마력이 느껴지는 장신구와 특수한 형태의 옷은 분명 아이템이었다.

“급이 꽤 높아 보이는데, 거대 길드 출신인가?”

날카로운 눈으로 그들을 홅은 반서진이 나직하게 평가했다.

“그런 것 같군. 이 기회에 안면이나 터두자고. 다 인맥이야.”

백대만의 대꾸가 무척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반서진의 얼굴이 굳어졌다.

하지만 인맥이라는 말에 노미래와 노희망의 눈은 확 뜨였다.

그러더니 둘 다 백대만의 뒤에 바짝 붙어 비굴한 미소를 머금었다.

세 남자가 희희낙락하게 걷는 것과 달리 나와 반서진은 영 내키지가 않았다.

가까이 갈수록 느낌이 좀 이상하다.

이상하게 불길한 느낌이었다.

낯선 사람을 향한 경계심이라고 생각하기에는 지나칠 정도로 신경이 곤두섰다.

- 조심해. 저놈들 여차하면 싸울 것 같은 자세야.

그들이 걸어오는 자세를 쓱 훑어본 서지한이 낮은 목소리로 경고했다.

그가 이렇게까지 말하는 걸 보니 내 느낌이 마냥 기분 탓만은 아닌가 보다.

“백광 길드에서 왔나?”

마침내 대화가 가능할 정도로 가까워지자 저쪽에서 먼저 말을 붙여왔다.

셋 다 검은 마스크 같은 것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는데, 그게 괜히 수상하게 느껴졌다.

“아, 어떻게 아셨어요? 백광 길드 맞습니다.”

우리들과 있을 때와는 딴판인 태도로 백대만이 싹싹하게 말을 받았다.

노미래와 노희망도 마치 사람이 바뀐 것처럼 살랑거리며 그들에게 말을 붙였다.

풍기는 분위기며 기운이 아무리 봐도 무척 급이 높은 헌터들이었다.

어쩌면 나보다 강할지도. 긴장하는 내 귓가로 나보다 더 굳은 서지한이 속삭였다.

- 탈출석 들고, 여차하면 쓰도록 준비…….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반사적으로 뒤를 향해 훌쩍 뛰었는데, 날카로운 기운 같은 것이 옷 앞부분을 다 찢어놓았다.

나는 간신히 공격을 피했지만, 가까이 있던 사람들은 그러지 못 했다.

백대만은 그래도 전투계라고 황급히 몸을 뺐다.

노미래는 방패를 들고 제 형의 앞을 막아선 상태였다.

“뭐, 뭐야. 갑자기 왜 이래?”

놀란 노희망이 기겁하며 소리 질렀다.

그 말에 가장 앞에 선 복면인의 눈이 살짝 웃었다.

“이런, 그래도 정말 버러지는 아니네.”

태연하게 말한 그는 어느새 인벤토리에서 무기를 꺼내 들었다.

그런데 그 무기의 형태가, 무척 낯익다.

검은 기운을 풀풀 풍기는 새카만 낫.

“그, 그 무기는 서지한? 당신이 왜? 우, 우리는 잘못한 거 없어!”

노미래가 신음을 삼키며 경악했다.

대답이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남자는 길게 주절거렸다.

“왜냐면, 주제넘게 던전 공략에 나선 중소 길드 길드원의 전멸이라는 불의의 사고가 필요하거든. 그리고 겸사겸사 서지한이 던전을 돌아다니면서 약한 헌터들을 죽이고 다니는 영상도 남기면 좋고. 어이, 찍을 준비됐지?”

“어어. 언제든 말해.”

“다 찍지는 말고, 공격하는 부분만 짧게 찍어. 도망치다가 간신히 한컷 건진 느낌으로. 비운의 헌터들이 남긴 유일한 증거품 같은 걸로.”

그들이 저들끼리 태연하게 말을 주고받는 동안 혼란에 빠져 있던 팀원들은 어느 정도 상황을 파악한 듯했다.

노미래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당신, 서지한이 아니군.”

“그런 대사는 하면 안 돼. 이건 편집해야겠네. 당신은 그냥 비명 지르면서 죽으면 되는 쉬운 역할이야. 간단하지?”

말을 마친 그가 낫을 우리 쪽으로 겨누었다. 그리고 치솟는 살기.

“뛰어!”

곁에 서 있던 반서진이 내 손을 잡고 무작정 뛰기 시작했다.

등 뒤에서 목이 터질 듯한 외침이 들렸다.

노희망의 목소리다.

“미래야!”

달리면서 잠깐 돌아보자 치명상을 입고 쓰러진 노미래가 보였다.

이어서 복면인이 노희망을 향해 낫을 치켜드는 것을 보고 나는 고개를 돌렸다.

서걱, 하고 무언가를 베는 것 같은 소름 끼치는 소리가 들렸다.

“세상에, 서지한이 이렇게 끔찍한 짓을 저지르다니. 푸하핫, 아, 이거 진짜 재밌네. 뭘 저렇게 뛰고 그러나. 어차피 멀리 못 갈 텐데.”

미치광이처럼 연극조로 지껄인 가짜 서지한이 조소했다.

아니, 그렇다고 그냥 서서 죽어줄 수는 없잖아.

“야, 탈출석 꺼내. 빨리!”

반서진이 다급하게 백대만에게 외쳤다.

그러나 백대만은 혼비백산해서 도망치느라 바쁠 뿐이다.

겁에 질린 듯, 이성을 잃은 모습이다.

그에게는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래도 반서진의 외침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런 식으로 도망치는 건 끝이 없다.

여기를 나가야 한다.

나는 반서진의 손에 잡혀 달리면서 나머지 손으로 인벤토리를 열었다.

그리고 나를 잡아끄는 반서진을 역으로 잡아당겼다.

그리고 인벤토리에서 탈출석을 꺼내 강하게 움켜쥐었다.

혹시 몰라서 다인용 탈출석을 사두길 잘했다.

혹시나 이들이 우리를 따라 나올지도 모르지만, 밖으로 나간다면 던전 관리청 소속 헌터들이 도와주겠지.

박살난 탈출석에서 흘러나온 빛이 게이트를 형성했다.

혼자 벌써 멀리 도망가 버린 백대만은 챙길 수가 없다.

그에게도 탈출석이 있으니 알아서 나올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남을 걱정할 처지가 아니었다.

게이트로 뛰어들려는 순간, 갑자기 발밑에서 넝쿨이 치솟았다.

넝쿨은 나와 반서진의 몸을 칭칭 휘감아 꼼짝도 못 하게 만들었다.

“어이쿠, 큰일 날 뻔했네.”

한 손을 내민 채 복면인 하나가 씨익 웃었다.

정신없는 와중에도 살펴보니 그의 손에서 뿜어져 나온 기운이 땅속으로 이어져 있었다.

이 넝쿨은 그의 스킬인 것 같다.

이어서 나머지 일행도 그의 뒤로 나타났다.

“던전 한번 안 돌아본 헌터가 다인용 탈출석을 다 가지고 있네.”

“그러게. 어차피 못 들어갈 텐데. 아깝게 됐어.”

저마다 한마디씩 이야기를 주고받는 모습이 몹시 느긋했다.

우리 따위는 위협이 되지도 않는다는 태도다.

“완전히 가지고 놀고 있어.”

내 앞쪽에 멈춰 선 반서진이 이를 바드득 갈며 낮게 중얼거렸다.

나에게서 등을 돌리고 있어 어떤 표정인지는 알 수 없지만, 목소리만으로 얼굴을 짐작할 만했다.

“가만히 보니, 이거 손모아 헌터 아니야? 사망자 0명의 괌의 구세주?”

낫을 든 남자가 내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왔다.

그리고 조롱하는 것이 명백한 손놀림으로 내 턱을 잡고 들어 올렸다.

“이런, 이렇게 좋은 헌터가 질 낮은 길드에서 떠돌다가 실력 없는 팀원들 탓에 죽은 걸 알면 사람들이 정말 슬퍼하겠다. 이래서 중소 길드는 던전 돌게 하면 안 되는 건데. 능력도 없는 것들이 말이야. 그렇지?”

뭔가 대꾸해주고 싶었지만 그가 아프도록 턱을 꽉 쥐고 있어서 말하기가 힘들다.

가짜 서지한의 손에 잡힌 뺨이나 턱이 찌그러질 것 같다.

살살 쥐고 있는 것 같은데 꼼짝도 하기 힘들다.

힘 능력치가 엄청나게 높은지 잘못하면 머리가 그대로 으깨져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등줄기로 식은땀이 흐른다.

그리고 이 모든 광경을 서지한이 무서운 얼굴로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데 말이야. 그 착한 손모아 헌터를 죽인 게 세상에서 제일 강한 개자식인 서지한이라네? 이놈은 대체 얼마나 나쁜 짓을 하고 다닐 셈인지. 당장 잡아서 죗값을 물게 해야 하는데. 그렇겠지?”

그 말을 듣자 신기하게도 두려움보다 분노가 먼저 치밀었다.

내가 그를 노려보자 손에 힘이 더 들어갔다.

턱이 박살 나는 것처럼 삐걱거리는 소리가 나고 고통이 밀려들었다.

“호오, 최후의 발악인가? 무슨 스킬이든 별 소용이 없을 걸?”

스킬?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반서진이 뭔가 했나?

하지만 내 앞에 등을 보이고 꽁꽁 묶여 있는 반서진이 뭔가 할 수 있는 상태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아니면 다른 사람이 살아 돌아오기라도 했나?

꽁꽁 묶여 턱이 잡혀 있는 탓에 주변을 둘러보기가 힘들다.

아니, 기분 탓인지 주변이 좀 어두워진 것 같기도 하고.

발광구를 가진 백대만이 어디론가 가버려서 그런가?

그렇다고 쳐도 좀 어두운 것 같은데.

“뭐야? 연막탄 스킬이라도 쓰려는…….”

가짜 서지한은 조롱하던 말을 끝맺지 못 했다.

갑자기 확연하게 이 공간이 어두워졌기 때문이다.

나는 그제야 이 어둠의 정체를 깨달았다.

내 발끝부터 은은하게 뭉클뭉클 피어오르는 검은 안개.

안개가 이 던전의 독과 뒤섞여서 눈치채는 게 좀 늦었다.

언젠가 봤던 이 검은 안개의 정체는.

- 김영길 헌터의 원한…….

검은 안개에 가려 거의 보이지도 않는 서지한이 조용히 내 생각을 대신 말해주었다.

그리고 마치 정답이라고 대답해주는 듯, 숨 막힐 정도로 검은 기운이 공간을 꽉 채웠다.

감각이 고장 날 것 같은 수준의 어둠이다.

너무나 캄캄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눈을 뜨고 있는지, 감고 있는지, 서 있는지, 앉아 있는지도 잘 모르겠다.

살을 옥죄던 넝쿨의 감촉도, 으스러져라 턱을 쥐고 있던 힘도 느껴지지 않는다.

마치 죽음과도 같은 어둠.

“뭐야! 뭐냐고! 아무것도 안 보여!”

어딘가에서 가짜 서지한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멀리서 들리는 건지 가까이서 들리는 건지 가늠할 수가 없다.

그리고 모든 것이 괴리된 것 같으니 상황을 꿰뚫으며 조용히 김영길 헌터의 원한이 울었다.

{억울하다…….}

으스스하고 음울한 목소리.

흐느끼는 울음에 동조하듯 어둠이 흔들렸다.

{억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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