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54화 (54/231)

054화

나는 어차피 궁금한 게 있으면 서지한에게 물으면 된다.

다른 사람들도 잠잠했다.

잠시 기다리던 길드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없는 것 같군. 내가 설명을 너무 잘했나……. 으음, 원래대로면 첫 공략을 기념해서 회식이라도 해야 하는데 이것 참 시간이 너무 없군. 나는 빠져줄 테니 아쉬운 대로 이야기 나누게나.”

말을 마친 길드장이 방을 나갔다.

다시 헌터들끼리만 남은 셈이다.

길드장은 우리들이 좀 친해졌으면 해서 일찍 자리를 비워준 것 같은데, 아무래도 여기 그러고 싶은 헌터는 없는 것 같다.

길드장이 나가기 무섭게 반서진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리고 방을 떠나기 전 나에게 잠시 눈을 맞췄다.

“내일 보자.”

짧은 한 마디만 남긴 채 반서진이 나가고, 이어서 노미래와 노희망이 아무 말 없이 방을 나가버렸다.

으음, 다들 떠나는 분위기네.

남은 건 백대만 정도인데, 그도 주섬주섬 외투를 챙기고 있다.

나도 딱히 그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는 않아서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던전에서 쓸 물건 챙기려면 시간이 부족하기도 하고…….

“그럼, 가볼게요.”

“어, 어.”

휴대폰으로 뭔가 메시지를 보내고 있던 백대만이 건성으로 대꾸했다.

그리고 방을 나왔더니 내내 나를 기다리고 있던 것 같은 대리님이 얼른 내 이름을 불렀다.

“모아 씨! 어땠어요?”

"그냥, 괜찮았어요.”

솔직히 반서진과 노미래, 노희망은 잘 모르겠다.

그나마 이야기를 나눈 게 백대만 뿐이어서.

그래도 별일은 없을 것 같다.

반서진은 떠나기 전 인사도 해줬고.

“그래요? 다행이네.”

대리님은 의외라는 표정이었다.

그래도 한시름 덜었는지 약간 안심한 얼굴로 웃었다.

“그럼 가요. 물자 챙겨줄게요. 인벤토리 여유는 있죠?”

“네에.”

대리님을 따라가니 포장된 생수와 통조림, 즉석음식이 한 보따리 준비되어 있었다.

꽤 양이 많아서 다 챙기고 나자 인벤토리가 반도 넘게 차 버렸다.

“많아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많은 양은 아니니까 아껴먹어야 할 거예요.”

그 말대로 한 달 동안 쓸 분량이라고 생각하면 그리 많은 양은 아니었다.

“물 계열 스킬을 쓰는 마력계 헌터라도 있으면 편하게 씻을 수 있을 텐데.”

“그러게요. 진짜 씻는 건 어떡하지.머리가 떡이 되겠는데요.”

내 말에 대리님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턱을 쓰다듬었다.

“드라이 샴푸라도 사면 좀 도움되지 않을까요?”

괜찮은 생각이었다.

“지금 바로 마트에 갈 생각인데, 가서 살게요.”

“간식거리도 좀 사요. 여기 준비된 건 정말 최소한의 식량이라. 이런, 준비하러 가려면 바쁠 텐데 내가 괜히 시간만 빼앗고 있네요. 그럼, 잘하고 와요.”

“에이, 빼앗긴요. 그럼 던전 다녀와서 또 봐요.”

그렇게 작별인사를 하고 길드를 나오자 어느새 해가 완전히 진 저녁이었다.

차장님을 다시 못 봐서 좀 아쉽긴 한데, 아마 나보다 먼저 나간 헌터들에게 물자를 배급하고 있을 테니 바쁘실 것 같다.

으음, 어디로 갈까.

역시 먼저 마트로 가는 게 낫겠지?

주머니에서 블루투스 이어폰을 꺼내 귀에 꽂았다.

이래야 마트를 돌아다니며 서지한과 마음껏 대화할 수 있었다.

던전 공략을 앞두고 있으니 서지한도 내게 해 줄 이야기가 꽤 많겠지.

마트로 떠나기 전 나는 잠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언제 봐도 여기는 아무것도 없단 말이야.

보는 눈도 없으니 마음 편하게 연상형 스크롤을 써도 되겠지.

나는 인벤토리에서 스크롤 한 장을 꺼내 들고 그대로 찢어버렸다.

이렇게 공간이동하는 것도 익숙해졌네.

자, 가자. 마트를 털러.

풍경이 한 차례 일렁인 후 나는 대형 마트의 앞에 서 있었다.

갑자기 사람이 나타나서 그런지 길가던 행인 몇 명이 반응했다.

하지만 잠깐 시선을 줬을 뿐, 곧 휴대폰을 보거나 걸음을 재촉해 사라졌다.

서울 시민의 무심함이란…….

하긴, 나도 각성 전에 이런 식으로 이동하는 헌터들을 심심치 않게 보곤 했다.

처음 봤을 때는 놀랐지만 세 차례 이상 목격한 후로는 그냥 대수롭지 않게 여기게 되었다.

신기한 것도 자주 보면 익숙해지기 마련이거든.

사람들의 물결에 편승해서 마트로 들어오자 저녁거리를 사려는 사람들로 무척 붐볐다.

마트를 좋아하는 서지한이 생기발랄하게 둘러보는 것을 내버려 두고 나는 일단 카트를 뽑았다.

“서지한 씨?”

마트를 돌 준비를 마치고 나니 심각한 얼굴로 티슈 꾸러미를 응시하는 서지한이 보였다.

뭐 하는 거지?

- 어. 이거 물에 녹는 물티슈래. 진짜 깨끗하게 녹는 건가?

“던전에 갈 때 그것도 필요할까요?”

- 아니, 그냥 신기해서…….

머쓱한 표정이 된 서지한이 얼른 내 옆으로 돌아왔다.

나는 카트를 슬슬 밀면서 적당히 음식이나 쓸 만한 물건을 집어 카트에 담기 시작했다.

“빨리 장보고 들어가죠. 자기 전에 이 종이도 읽어야 하니까.”

아까 길드장이 나눠준 던전 정보가 적힌 종이 뭉치다.

하지만 서지한은 가소롭다는 표정으로 피식 웃었다.

- 그런 걸 왜 읽어? 내가 있는데.한국에 있는 독 속성 충왕류 던전이면 뻔하지. 충왕 바르기스가 있는 던전이잖아.

나는 약간 목소리를 낮췄다.

“케르기스랑은 달라요?”

- 목소리 크게 해도 돼. 어차피 그 이름 아는 사람은 너와 나 뿐 일 텐데. 생겨나자마자 소멸한 던전이니까.

“아, 하긴.”

- 케르기스랑은 많이 다르지. 케르기스는 굳이 말하자면 마법 뿔 딱정벌레였잖아? 바르기스는 거대 독 지네야.

“지네요?”

- 응. 발 엄청 많이 달린 그거.

서지한이 손가락을 꿈지럭거리며 지네 다리를 굳이 묘사해 보였다.

소름이 쫙 끼쳤다.

“으아, 절대 마주치고 싶지 않아요.”

- 그래도 케르기스보다 약해. 그놈보다 훨씬 물렁하고 느리거든. 독만 어떻게 하면 뭐, 몸도 길쭉해서 회피 능력도 형편없고. 한 방에 썰어서도 동강 내버릴 수도 있는데.

“뭔가, 되게 잘 아는 몬스터처럼 말하시네요.”

- 알지. 내가 그놈 죽이려고 몇 번을 도전했는데, 아오. 지키는 놈들만 아니었어도…….

지키는 놈이라는 건 서지한이 보스 몬스터를 죽이지 못하도록 하는 사람들을 말하는 거겠지.

잠시 이를 갈던 그가 갑자기 나를 흘끔거리더니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 딱히 너한테 잡아달라는 건 아니니까. 괜히 위험한 짓 하지는 말고.

묘한 기분이다.

처음 만났을 때 나더러 전 세계의 보스 몬스터를 다 잡아달라고 하던 서지한은 대체 어디로 갔는지.

괌에서는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아무래도 김영길의 원한 때문에 며칠 기절했던 사건이 충격이었나 보다.

“잡을 생각도 없었는데요. 애초에 제 대미지로는 잡지도 못하잖아요.”

- 방법이 없는 건 아니지만, 아니지.어쨌든 잡을 생각 없으면 됐어. 적당히 공략하다가 나오자.

“그러려고요.”

공격 스킬이 하나도 없던 시절에는 마냥 두려움 때문에 던전에 가기 싫었다면, 지금은 좀 다른 이유였다.

그 좋은 펜트하우스 두고 왜 사서 고생을 해?

하, 카트에 있는 음식과 인벤토리의 텐트, 전투식량을 생각하니 벌써 착잡해진다.

호텔 음식을 두고 통조림이나 까먹으며 땅바닥에서 자야 하다니.

이번에 던전 공략에 참여하는 것도 나를 수상히 여길 시선을 피하는 게 목적이다.

던전 한번 안 가는 헌터가 계속 돈을 펑펑 쓰고 다니면 의심할 테니까.

적당히 이렇게 평범한 수준의 헌터 생활을 하다 보면 그래도 언젠가는 던전에 안 가고 살아도 다들 ‘벌어둔 돈으로 사나 보다’하고 생각해주겠지? 의심하지 않겠지?

“음, 쇼핑은 여기까지 하죠.”

최대한 고민하면서 부피가 작은 것 위주로 골랐는데 카트는 벌써 한 가득이었다.

뭐 빠뜨린 건 없나?

어차피 필수적인 건 길드에서 다 챙겨줬으니 대강 사도 괜찮겠지.

계산대로 가 계산을 마치고 이동 스크롤로 바로 집에 돌아왔다.

이동 스크롤을 너무 물 쓰듯 쓰는 게 아닌가 싶긴 하는데, 한번 익숙해지니까 너무 편해서 멈추기가 힘들다.

뭐, 어차피 많이 사뒀으니까.

- 전화? 어디에 걸려고?

소파에 걸터앉아 휴대폰을 꺼냈더니 서지한이 바짝 붙어 화면을 확인했다.

저기요, 프라이버시 침해거든요.

나는 서지한을 피해 핸드폰을 숨기려다 잠깐 멈췄다.

에이, 새삼스럽긴 하다.

늘 붙어 있는데.

“한 달이나 던전 들어가게 생겼으니 가족들한테 말해둬야죠. 프로필 메시지도 바꾸고……."

상태 메시지는 무난하게 ‘던전 공략하느라 한 달간 연락 안 됩니다’정도면 되겠지?

엄마랑 통화하고 싶긴 하는데, 세계여행 중이라 연락이 안 될 테니 승주한테만 연락해야겠다.

-여보세요?

승주는 신호음이 한 번이 채 가기도 전에 전화를 받았다.

늦은 시간은 아니긴 하는데, 그래도 전화를 너무 빨리 받는 거 아니야?

무슨 일 있나?

“승주야? 나 누난데. 전화 왜 이렇게 빨리 받아?”

-아, 폰 게임하고 있었어. 무슨 일이야?

아하. 그렇군.

“나 내일 던전 들어가. 한 달 정도 연락 안 될 거야.”

수화기 건너편이 침묵에 휩싸였다.

잠시 공백 후, 승주가 경악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던전? 내일 간다고? 왜 그걸 지금 말해? 누나 그 길드 던전 못 돌 것 같다고 하지 않았어?

“어어, 나도 그럴 줄 알았는데. 갑자기 정해졌어.”

-진짜? 어느 던전에 가는데?

“충왕류 던전이래.”

-응? 누나가 전에 휩쓸렸던 거기?그거는 닫혔다고 하지 않았어?

헌터가 아니거나, 그 방면에 연이 없는 사람은 대부분 던전 관련 정보에 무지했다.

미디어에서 보여주는 던전 관련 정보는 수박 겉핥기 수준이라서 실제 공략에 대한 지식은 역시 진짜 헌터가 아니면 잘 몰랐다.

서지한의 말로는 진짜 헌터들도 헛소문을 믿거나 혹은 상식적인 공략 팁도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승주도 민간인이다 보니 충왕류 던전이 여러 개라거나, 던전 공략을 한 달 동안 한다거나 하는 상세한 부분은 잘 모르는 것이다.

“충왕류 던전은 하나만 있는 게 아니라 여러 개가 있어. 새로운 충왕류 던전이 막 생기기도 하고 그런가 봐. 던전마다 사는 몬스터도 약간씩 다르고.”

승주는 던전 이야기가 흥미로운 듯해 설명을 가만히 들었다.

그러다 문득 걱정스러워졌는지 조심스레 질문했다.

-그렇구나. 누나 진짜 헌터 다 됐네. 근데 나한테 이런 거 막 말해줘도 돼? TV에서 보니까 헌터들은 뭐 물어보기만 하면 다 비밀이라고 그러던데.

“나도 잘 모르겠는데, 뭐, 네가 어디 떠들고 다닐 성격은 아니잖아.”

-그렇긴 하지. 아무 데도 말 안 할게.

결연하게 다짐하는 승주를 잠시 기다린 후 나는 본론을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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