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2화
너무나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가만히 보니 그의 팔 부분에 있는 짚 몇 가닥이 검게 그을려 있었다.
“아니, 팔이 탔잖아요.”
- 별거 아냐.
대수롭지 않게 한 대답과 달리 서지한은 얼른 지푸라기 손을 제 등 뒤로 감췄다.
“별거 아니긴요.”
그의 몸을 붙잡아 들어 올렸더니 생각보다 팔이 많이 타 있었다.
“잘못해서 몸이 통째로 탔으면 어쩔 뻔했어요.”
- 그럴까 봐 싱크대에 물 받아두고 했어. 불붙으면 바로 뛰어들게. 불은 절대 안 냈을 거야.
“그게 아니라 몸이 탔는데……."
- 신경 쓸 것 없어. 어차피 진짜 몸도 아닌데.
그렇게 대답한 서지한은 지푸라기 인형에서 빠져나왔다.
그리고 죽 그릇을 턱짓하며 기대 어린 표정을 지었다.
- 먹어봐. 맛을 못 봐서 어떨지 모르겠네.
그야 당연히 맛을 볼 수는 없었겠지…….
나는 죽 그릇을 들고 침대에 앉았다.
서지한이 부엌을 등반해서 고생스럽게 만들어 준 죽이다.
별 맛이 없더라도 맛있게 먹어야지.
사실 딱히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냥 흰 쌀죽인데 맛있어봐야 얼마나 맛있을 수 있겠어?
하지만 한 입 후루룩 마시는 순간 나는 생각을 바꿨다.
아니, 엄청 맛있잖아.
약간 숭늉에 가까운 느낌인데 밥알이 어떻게 쫄깃할 수 있는 거지?
그리고 소금 간이 굉장히 절묘해서 부담스럽지 않게 짭짤했다.
별거 아닌데, 진짜 별거 아닌데 맛있었다.
“진짜 맛있어요. 서지한 씨, 요리 잘하는군요.”
- 뭐, 보통이지.
별거 아니라는 말투였지만 얼굴은 굉장히 뻐기고 있는 상태다.
그때 초인종이 울렸다.
배달 왔나 보네.
이럴 줄 알았으면 안 시키는 건데.
- 뭐지?
“아, 배고파서 먹을 것 좀 배달시켰어요.”
- 그런 방법도 있었군.
담담하게 말하고 있었지만 그는 좀 시무룩 해진 것 같았다.
나는 얼른 침실을 나가서 배달 음식을 받아와 거실에 늘어놓았다.
그래도 죽을 좀 먹어서 그런지 몸상태가 한결 나아진 것 같았다.
“죽을 먹어서 그런지 그래도 힘이 좀 나네요. 안 그랬으면 배달도 못 받을 뻔했어요.”
낙담한 서지한을 의식해 일부러 이렇게 말했더니 그는 약간 멋쩍어하면서도 기운을 차린 표정이었다.
아마 내가 자신을 신경 써 한 말이라는 걸 눈치챈 것 같았다.
그나저나, 서지한이 끓인 죽…….
다 먹어야겠지?
나는 배달음식을 밀어놓고 죽 그릇을 들었다.
그는 제대로 된 음식부터 먹으라고 했지만 사람의 성의를 무시할 수는 없지.
나는 서지한의 죽을 모두 먹은 다음 배달 음식도 먹어치웠다.
그러니까, 굉장히 과식했다는 뜻이다.
* * *
헌터 인생 첫 퀘스트를 받은 지 일주일.
나는 아직도 아무런 실마리를 얻지 못 했다.
퀘스트를 준 원한이 돌멩이 채로 사라져 버린 탓에 그나마 범인이 누구인지 물어볼 대상마저 사라졌다.
하지만 애초에 원한 자신도 나에게 알려줄 만한 범인의 이름을 잘 모르는 것 같았다.
만약 알고 있었다면 ‘억울하다’가 아니라 범인의 이름을 말했겠지.
그리고 서지한의 이름을 말하지 않는 걸로 보아 범인이 서지한이 아닌 건 알고 있는 것 같다.
그런 고로 나의 범인 찾기는 정말 맨 땅에 헤딩하는 꼴이었다.
처음에는 범죄 현장의 CCTV라도 확보해볼까, 경찰서라도 숨어 들어갈까.
이런저런 방법을 강구했지만 너무 위험하거나 너무 무모하다는 이유로 모두 보류되었다.
결국 그렇게 아무런 소득도 없이 시간만 흘러간 것이다.
- 소득이 왜 없어?
“푹 쉬긴 했죠. 덕분에 몸은 다 낫긴 했는데.”
몸은 사흘을 앓고 나서야 정상으로 돌아왔다.
힐링 포션도 안 통하고, 축복 포션도 안 통하고, 마법 해제 포션도 안 통하고, 해독 포션도 안 통해서 꼼짝없이 누워만 있어야 하는 시간이었지.
- 그게 제일 중요하지. 퀘스트야 하면 좋고, 못해도 손해 볼 건 없잖아.
“손해 볼 게 왜 없어요. 서지한 씨도 누명 쓰고 김영길 씨도 한 맺힌 상태일 텐데.”
- 너 말이야. 네가 무사하면 그 걸로 됐어.
“그래도……. 게다가 보상도 굉장하잖아요.”
- 네 스킬에 비하면 별것도 아니야.그리고 굳이 제작 스킬에 욕심 낼 이유도 없잖아.
단호하게 못 박은 서지한이 TV로 시선을 돌렸다.
나는 그 모습을 잠깐 바라보다가 리모컨 옆에 놓인 지푸라기 인형을 집어 들었다.
얼마 전 택배로 온 인형 옷을 입혀둔 덕분에 꽤 그럴듯해 보였다.
인형용 장갑도 손에 씌워둬서 장갑을 벗기지 않으면 그을린 자국도 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손이 그슬려있었다.
“옷은 마음에 들어요?”
지푸라기 인형 서지한은 평범한 베이지색 니트 티셔츠에 어두운 남색 바지를 입고 있었다.
서지한이 평소에 자주 입는 스타일의 옷이다.
거기에 검은 양말과 흰 장갑도 신겨두었다.
확실히 뭘 좀 씌워놨더니 바닥에 떨어지는 지푸라기 양이 확 줄었다.
- 그냥 그렇지 뭐.
“그럼 새로운 시도로 공주님 옷……."
- 손모아.
정색한 서지한을 놀리며 키득거리는데 휴대폰이 진동했다.
엄마인가?
자리에 앉아 대충 배를 채우며 휴대폰을 들여다보았다.
엄마가 아니라 어쩐 일로 길드에서 메시지가 와 있었다.
“어라. 내일 길드에 오라는데요?”
장문의 메시지를 주르륵 내리면서 말하자 서지한이 의아한 얼굴로 다가섰다.
- 내일? 공략 허가가 났나?
“그런 것 같아요. 공략 팀이 구성되었으니 와서 서로 인사를 나누는 시간을 가지자는데.”
- 어디 봐. 음? 공략 일정이 너무 빠듯한데. 인사하고 바로 다음 날 던전에 들어간다고?
“이상한 거예요?”
- 이상하지. 아침에 들어가서 오후에 나오는 게 아니잖아. 던전 공략 기간은 한번 입장하면 최소 한 달 정도 소요돼. 탈출석이 얼만데. 그 값은 뽑아야지. 한 달이나 던전에 들어가는데 겨우 이틀 전에 만난 팀으로 바로 들어간다고? 이건 좀.
“이상하네요.”
- 수상한데.
나는 잠시 메시지를 노려보았다.
으음, 아니야.
설마 세상이 그렇게 온통 음모로 가득 차 있겠어?
그리고 대체 뭘 의도하고 이러겠어?
“그냥 단순히 일을 못해서 그런 게 아닐까요? 예전에 계약서 쓸 때도 여러 모로 허술했잖아요.”
- 음.
“미리 걱정하지 말자고요. 내일 가보면 알겠죠. 그나저나 이러면 범인 찾기는 당분간 미뤄야겠어요.”
- 너무 급하게 생각하지 마. 김영길을 죽인 놈이 뭔가 꾸미고 있다면 또 무슨 짓을 할 거야. 일을 저지를수록 점점 꼬리를 길게 남기겠지.
“희생자가 더 생기는 건 싫은데.”
-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서지한은 어깨만 으쓱했다.
희생자가 생길수록 누명도 점점 두터워 질 텐데 그건 신경도 안 쓰는 것 같다.
진짜 가짜 루머에 너무 많이 당해서 해탈해버렸나 봐.
나는 내일 가겠다고 답장을 보내고 소파에 발라당 누웠다.
그러고 보니 대리님이랑 차장님을 오랜만에 보겠구나.
다음 날, 길드에 찾아가니 두 사람이 로비에서부터 나를 반겨주었다.
오랜만에 본 대리님은 이전보다 안색이 무척 좋아져 있었다.
길드 생활이 꽤 성격에 맞나 보다.
차장님도 무척 건강해 보였다.
“모아 씨, 오랜만이에요. 일 없어도 좀 놀러 오지 그랬어요. 섭섭하게……."
차장님이 정말 서운해하는 것처럼 보여서 나는 무척 당황했다.
앗, 제가 안 오려고 한 게 아니라.
이런저런 일이 좀 있어서…….
“죄송해요.”
“에이, 죄송할 것까지는 없고. 이제 던전 들어가면 오랫동안 못 볼 텐데 아쉬워서 그러죠.”
가볍게 웃는 차장님과 나 사이로 대리님이 슬쩍 끼어들었다.
“그러면 오늘 저녁에 치킨에 맥주 어때요?”
예전에는 야근 없이 퇴근하는 날이면 셋이서 종종 맥주를 한 잔씩 하곤 했다.
회사에서 당한 울분도 토로하고 언니 동생 하면서 정말 재밌었는데.
솔깃해서 고개를 끄덕이려는데 차장님이 도끼눈을 떴다.
“어딜. 내일 던전 공략하러 가는 데 오늘 저녁에 술을 먹이면 어쩌겠다는 거예요.”
정말로 서늘한 차장님의 말에 대리님이 찔끔해서 고개를 숙였다.
두 분은 여전하시구나.
“그렇죠. 던전 공략 끝나고 나면 마셔요. 술안주 거리로 던전 얘기 많이 가져올게요.”
웃으면서 말했더니 대리님이 금세 밝아졌다.
“그것도 좋죠! 정말 사람 일은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것 같아요. 모아 씨가 헌터가 되어서 내일 던전 공략을 하러 간다니……."
동감이다.
고개를 끄덕이던 나는 슬슬 아까부터 담아뒀던 말을 조심스럽게 꺼냈다.
“그런데 차장님, 대리님. 혹시 던전 공략 일정이 왜 이렇게 급박하게 정해진 건지 알고 계신가요?”
"아, 그거요.”
할 말 많은 얼굴로 입을 열려던 대리님이 잠깐 안내 데스크로 시선을 주더니 엘리베이터를 향해 턱짓했다.
로비에서 나누기엔 좀 불편한 이야기라는 뜻이다.
계속 로비에 서서 이야기하기도 불편해서 우리는 응접실로 사용되는 것 같은 작은 방으로 이동했다.
지난번 계약서를 썼던 방보다 좀 덜 사무적이고 잘 꾸며진 느낌이다.
“면담실이에요. 찾아오는 사람은 거의 없어서 그냥 수다 방으로 써요. 다행히 비어 있네.”
대충 자리를 잡고 앉자 대리님이 바로 본론을 꺼냈다.
“어차피 길드장님이 말해주실 것 같긴 하는데, 사실 던전 허가 떨어진 게 어제예요.”
“어제요?”
“어제 아침에 떨어진 거예요.”
차장님이 조용히 거들었다.
내가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을 했는지 대리님이 한숨을 내쉬었다.
“당황했죠? 우리도 그래요. 길드장님이 오시더니 갑자기 공문 내려왔다고 하시면서 지원 서류 쓰고 진행하라고 해서……."
“보통 이렇게 진행돼요?”
서지한에게 이게 일반적인 일이 아니라는 걸 이미 들었지만 확인차 묻자 차장님이 고개를 저었다.
“절대 아니죠. 보통 한 달 전에 알려주는데, 이번에는 우리가 땜빵이라서 그래요.”
“땜빵이요?”
“아는지 모르겠지만 최근에 암현 길드에서 김영길 헌터 살인사건이 났잖아요.”
“아. 그, 그랬죠.”
갑자기 그 이야기가 왜 나와?
나는 너무 놀란 것처럼 보이지 않으려고 애썼지만 잘 되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그거 때문에 위쪽에서 서지한 헌터 잡는다고 인력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 있나 봐요. 그러다 보니 공략 스케줄이 좀 비어서 그 자리에 우리가 들어갈 수 있었던 거죠.”
"아아.”
“확실히 너무 급하긴 해서 저도 길드장님한테 어려울 것 같다고 말하긴 했는데, 던전 관리청에서 내일 안 갈 거면 다른 더 급한 길드에게 내주겠다고 했나 봐요.”
"이런, 할 수밖에 없겠네요.”
"맞아요. 아쉬운 사람이 우리니까 어쩔 수 없이 냉큼 하겠다고 한 거죠.”
“그렇구나.”
대충 그렇게 된 거였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