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0화
“길드원이 살해당한 이 비상사태에 길드장은 뭘 하고 있는지.”
더벅머리에 수염이 부숭부숭 더럽게 자란 나이 많은 남자가 젠체하며 혀를 찼다.
그러자 냉큼 다른 남자가 맞장구를 쳤다.
“그러니까요. 뭐 또 어디서 뺀질뺀질하게 방송이다 연애다 하고 있겠죠.”
그러고 보니 이렇게 큰일이 났는데 암현 길드 길드장의 입장 발표나 인터뷰 같은 게 전혀 없었다.
서지한의 말로는 워낙 자유분방한 성격이라고 했으니 이들의 말대로 어딘가에서 놀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요즘 통 안 보이지 않아?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건지.”
“여자 모델들 모아놓고 놀고 있겠죠. 퉤. 며칠 전에 기사도 났던데.”
"팔자 좋다. 누구는 죽은 놈 염하느라 뺑이나 치는데.”
“하하, 적당히 하고 귀가하시죠. 어차피 일가친척도 없어서 찾아오는 사람도 없던데.”
대화를 미루어볼 때 아마 두 사람이 염하고 있는 시신은 김영길 헌터 같다.
영안실을 다 뒤져보지 않아도 되어서 다행이군.
그리고 시신이 사라져서 슬퍼할 사람이 없다는 점도.
“그럴까? 근데 말이야.”
더벅머리가 갑자기 목소리를 낮췄다.
“저거 상처, 좀 이상하지 않냐?”
"왜요?”
“일개 제작계 헌터가 서지한의 일격을 받았는데 복부 자상으로 끝난다고? 몸이 반 토막이 나도 이상하지 않은데. 게다가 사망 원인은 복부 자상이 아니라 독 때문이었어.사신의 낫이 독 속성 공격이던가?”
나는 살짝 긴장했다.
혹시 서지한이 결백하다는 걸 알아줄지도 몰라.
“굳이 말하면 어둠 속성이니까 비슷하지 않아요? 몸 갉아먹는 건 비슷할 텐데.”
“그런가? 그래도 상처가 너무 얕지 않나.”
“일부러 얕게 상처 입혀서 괴롭히려고 했나 보죠. 아무튼 랭커들은 제정신인 인간이 없잖아요.”
음, 하긴, 그럴 수도 있겠네.”
더벅머리가 싱겁게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냥 괜히 있어 보이고 싶어서 음모론을 제기해본 것 같다.
“하하, 형님도 참. CCTV도 나온 마당인데. 추리 만화 좀 보셨나 봐요?”
“쩝. 밥이나 먹으러 가자. 열쇠…….아, 안에 두고 나왔네. 잠깐 기다려봐. 열쇠 챙겨 와야겠다.”
"그냥 가요, 형님. 어차피 잠깐 먹고 을 건데. 귀찮잖아요.”
"그래? 그러지 뭐.”
그래도 문을 잠그지 않아서 다행이다.
나는 두 사람이 비상계단 위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에 서있다가 서지한에게 눈짓했다.
안을 다시 확인해보라는 뜻이다.
- 안에는 아무도 없어. 작업대에 시신이 있으니까 놀라지 않게 조심하고.
나는 영안실 안으로 조심스럽게 들어섰다.
서지한의 상냥한 경고대로 작업 대위에는 파리한 안색의 김영길이 누워 있었다.
한창 염을 하던 도중이었는지 수의를 차려입은 상태다.
뉴스에서 본 얼굴과 비슷하지만 얼굴의 혈관이 도드라져 보라색에 가까워 보인다.
“김영길, 맞죠?”
약간 미심쩍어 확인차 묻자 서지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 본인 맞아. 시작해
확인까지 다 받았는데 막상 채집하려니 영 손이 나가지 않는다.
눈앞에 진짜 죽은 사람이 있으니 갑자기 회의감이 들었던 것이다.
이래도 되는 걸까?
죽은 사람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은데.
- 왜 그래?
나는 결국 김영길의 시신에 큰 절을 올렸다.
김영길 씨, 제가 최선을 다 해서 억울함을 풀어드릴게요. 죄송합니다.
두 번 절을 올리고 나서 고개를 드니 서지한이 약간 물러선 채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보고 있었다.
허례허식이라고 해도, 그래도 최대한 예를 갖추고 싶은 마음이었다.
마침내 채집 스킬을 사용하자 오른손이 금빛으로 물들었다.
던전 밖에서 스킬을 써보는 건 처음이다.
약간 긴장한 상태로 손을 대자 시신이 그대로 사라졌다.
- 이게 되다니.
내가 자신을 루팅 했다는 말을 듣긴 했지만 그게 어떤 식으로 이뤄진 건지는 몰랐던 서지한은 약간 얼이 빠진 기색이었다.
일단 목적을 달성했으므로 나는 그대로 공간이동 스크롤을 찢었다.
시야가 조금 일렁인 후, 나는 집 현관에 서 있었다.
“끝났네요.”
너무 쉽게 끝나서 얼떨떨하다.
- 인벤토리에 영혼석 있어? 확인해봐.
서지한의 재촉에 나는 신발도 제대로 벗지 못 하고 인벤토리부터 열었다.
어디 보자, 잡동사니가 너무 많네.
하얗고 작은 돌.
어디쯤 있으려나.
하지만 아무리 둘러봐도 영혼석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몇 번이나 인벤토리를 홅은 끝에 나는 간신히 무언가를 발견했다.
“뭔가 있네요.”
- 찾았어?
“영혼석은 아닌데, 원한석이라는 게 있어요.”
- 원한석?
원한석.
까맣고 투박한 형태라 몬스터의 마석인 줄 알고 몇 번이나 그냥 지나치는 바람에 발견이 늦었다.
결국 하나하나 아이템 이름을 확인하면서 겨우 찾은 것이다.
별생각 없이 인벤토리에서 원한석을 꺼내 들었는데 손에 차가운 냉기가 느껴졌다.
곧이어 원한석에서 음산한 기운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주변의 색깔을 모두 빨아들이는 것같이 칙칙한 기운이었다.
심상치 않은 예감에 얼른 다시 인벤토리에 넣으려는데, 몸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가위에 눌리기라도 한 것처럼.
- 이건…….
뭔가 말하려던 서지한의 목소리도 완전히 지워져 버렸다.
돌이 뭉클뭉클 뿜어내는 기운은 점점 주변을 공포영화 같은 분위기로 탈바꿈시키고 있었다.
이제 말도 제대로 안 나온다.
잠든 것도 아닌데 현관에 선 채 가위에 눌리다니.
{억울하다…….}
서지한의 것과는 명백히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흐느끼는 듯, 원망하는 듯한 소름 끼치는 소리.
원한이 가득한 목소리다.
소리는 내가 쥔 돌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원한석은 이제 돌의 형태도 아니었다.
그저 새카만 안개가 뭉친 것 같은 덩어리일 뿐.
{억울하다…….}
검은 안개는 내 발목까지 덮일 정도로 차곡차곡 깔리고 있었다.
안개에 잠긴 부분이 마치 얼어붙는 듯 차가워졌다.
{억울하다…….}
숨이 막혔다.
꼼짝도 할 수 없는 상태로 나는 원한에 잡아먹히고 있었다.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라 두렵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저 식은땀을 흘리며 어떻게든 손끝이나 발끝을 움직여보려고 노력할 뿐이었다.
언젠가 들었던 가위에 눌렸을 때 이렇게 하면 깨어날 수 있다는 말에 의지 해서.
검은 안개는 내 종아리, 허벅지, 배, 상체를 타고 올라서 이제 입으로 들어오려고 꾸역꾸역 치솟고 있었다.
반쯤 열려 있는 내 입을 아무리 닫으려고 해도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때였다.
견고하게 나를 휘감고 집어삼키던 원한의 그림자가 잠시 흔들렸다.
잠깐 정신 차린 순간 발아래에서 필사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작은 형체를 발견했다.
지푸라기 인형이다.
- 정신 차려! 손모아!
지푸라기에 들어간 서지한이 열심히 팔다리를 바스락바스락 휘두르며 검은 기운을 털어내고 있었다.
허술하기 짝이 없는 두 다리로 내신 발을 꼭 부여잡은 채 기운을 몰아내려고 하고 있었다.
어찌 된 영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서지한의 지푸라기 펀치는 이 검은 기운에 제법 효과가 있는 것 같았다.
아마 서지한의 영혼과 무당의 영험함이 합쳐진 덕분이 아닐까?
서지한이 열심히 지푸라기 몸으로 싸워준 결과 나는 간신히 가위에서 풀려 날 수 있었다.
그 잠깐 사이 가위에서 풀려나려고 얼마나 용을 썼는지 등은 식은땀으로 흠뻑 젖었고 온몸의 근육이 욱신거렸다.
“뭐야, 이거 진짜.”
{억울하다…….}
검은 기운은 완전히 사라졌지만 김영길의 원한석은 아직도 뭔가 중얼거리고 있었다.
괜히 손에 들고 있다가 다시 가위에 눌릴까 걱정되어서 일단 바닥에 돌을 내려놓았다.
“서지한 씨, 발로 차려고 하지 마세요.”
- 재수 없는 아이템인데, 그냥 부숴버리자.
“잠깐만요. 원래 목적이 있었잖아요.”
그 틈을 노려 돌에 발길질하는 지푸라기 인형을 말리며 나는 일단 대화를 시도하기로 했다.
“저기, 김영길 씨? 저는 손모아 헌터라고 하는데요.”
{억울하다…….}
아무래도 말이 통할 만한 상태가 아닌 것 같다.
그냥 포기할까?
아니, 조금만 더 해보자.
“김영길 씨의 억울함을 풀어드리고 싶어요. 여기 서지한 씨도 피차 억울한 처지거든요. 대화가 가능하다면 김영길 씨를 죽인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있을까요?”
말을 마친 후 나는 가만히 돌의 반응을 기다렸다.
잠시 침묵하던 원한석은 다시 음산하게 중얼거렸다.
{억울하다…….}
- 이거 답이 없는데. 그냥 포기하자.나는 괜찮아.
"음……."
원래 생각했던 건 이게 아닌데.
서지한처럼 대화 가능한 김영길의 영혼을 만나서 범인이 누구인지 찾은 다음 표적수사와 증거물을 찾아서 고발하려고 했는데.
김영길의 영혼이 이런 상태면 불가능한 일이다.
아니, 이거 영혼은 맞는 건가?
나는 원한석의 아이템 설명을 확인했다.
김영길의 원한석
상세: 김영길이 죽기 전 품었던 원한과 사념이 잔류한 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