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9화
나라면 절대 불가능하다.
사실 바로 며칠 전 인터넷에서 우연히 내 루머를 보게 됐는데, 진짜 별것 아닌 루머였다.
그냥 괌에서 구해준 사람들에게서 내가 돈을 뜯어냈다는 그런 내용?
말도 안 되는 소리이니 그냥 넘기면 되는데 수십 명이 모여서 ‘그럴 줄 알았다’라며 이러쿵저러쿵 말을 덧대고 보태는 모습을 보자 참아 넘기기가 힘들었다.
결국 밤을 꼬박 새우며 반박 댓글을 달면서 싸워댔더니 서지한이 혀를 차며 야식이라도 먹으면서 하라고 말려주었다.
동이 터올 무렵에야 진한 탈력감과 함께 인터넷을 끌 수 있었지.
남은 것은 끝까지 조롱하던 수십 개의 댓글과 자괴감뿐이었다.
다음날 차장님에게 하소연했더니 바로 법무팀으로 넘겨서 고소가 진행되었는데, 그 소식을 들어도 마음이 편해지지 않았다.
내가 못 보는 어디선가 또 내 루머가 만들어지고 있을까 봐 계속 인터넷을 들여다봤었지.
이렇게 대응을 할 수 있는 나도 신경이 날카로워지는데,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서지한의 심정은 어떨까.
어쩌면 상대를 하다가 지쳐서 포기한 건 아닐까?
멍하니 TV를 보는 있는 서지한의 옆모습이 서글퍼 보인다.
한때는 그 곁에 쟁쟁한 헌터들이 서 있었을 텐데.
길드 탈퇴에 대해서 그는 가볍게 말하긴 했지만 생사고락을 함께한 사람들을 등지고 혼자 떨어져 나오는 건 쉬운 결정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번에는 혼자 떨어져 나온 그의 옆에 내가 서 주고 싶다.
친구로서.
나는 다 먹은 만두 그릇을 치우고 다시 외투를 껴입었다.
내가 나갈 채비를 하자 그가 의아하게 따라붙었다.
- 어디가? 저녁 약속 있어?
“아뇨. 암현 병원에 가볼 생각이에요.”
- 그 뉴스 때문에?
“네. 어떤 나쁜 놈이 내 친구에게 누명을 씌운 건지 궁금하잖아요.”
친구라는 단어에 약간 멈칫하는 듯하던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 신경 쓰지 마. 어차피 나는 죽었잖아. 어찌 되든 상관없는 이야기야.
“그러니 넋이라도 달래주려고요.”
서지한이 다시 멈칫했다.
- 넋……. 이건 일반적인 일이 아니야. 위험해질 수도 있어. CCTV 에 나온 그놈 마주치면 어쩌려고?
“저 그렇게 안 약하잖아요.”
- 실전 경험은 거의 없잖아. 헌터 상대로 싸운 적도 없고.
거기까지 말한 서지한이 잠시 망설이다가 덧붙였다.
- 네가 위험해지지 않았으면 좋겠어.
“언제는 보스 잡아달라고 하더니.”
- 그건 널 잘 몰랐을 때의 이야기고. 그것도 이제 안 해도 돼.
“어? 진짜요? 필요 없어요?”
- 그래.
“이제 와서 갑자기 왜요?”
다시 물었지만 그는 곤란한 듯 대답을 회피했다.
그래도 끈질기게 물었더니 마지못해 한 마디 대답해주었다.
- 넌 싸우는 거 싫어하잖아.
“아주 싫어하는 것도 아니에요. 몰랐는데, 그 싸움이라는 거 내가 세면 재밌더라고요.”
히죽 웃었더니 서지한은 할 말이 없다는 듯 고개를 저어버렸다.
나는 거기에 다시 못을 박았다.
“이렇게 억울하게 누명 쓴 사람 두고 모른 척 잘 수 있는 대인배가 못되거든요.”
- 진짜 위험해질 수 있어.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른다니까?
“던전도 밥 먹듯 숨어들었는데 이 정도야. 아무리 위험해진다고 한들 서지한 씨가 케르기스 잡을 때 숨어있던 것보다 위험해지겠어요?”
그는 복잡한 표정이었다.
아무래도 계속 뜯어말릴 것 같아서 나는 서지한을 살살 달래기 시작했다.
“저도 막 다 뒤엎고 그러려는 거 아니에요. 그냥 잠깐 가서 뭐 실마리 있는지 확인만 하러 가는 거예요. 둘러만 보고 올게요.”
- 정말 둘러만 보고 오는 거지?
“그럼요. 뭔가 위험한 느낌이 들면 바로 이동 스크롤로 도망칠 거예요.엄마랑 승주가 휘말릴까 봐 걱정되어서라도 그렇게 깊게 파고들지는 못 해요.”
- 으음.
말하면서도 한편으로 내가 서지한을 설득하고 있는 이 상황이 좀 재밌다.
언제나 무모하게 돌진하던 그가 누군가를 뜯어말리다니.
진짜 안 어울리는 일이다.
- ……낌새가 이상하다 싶으면 바로 나오는 거야.
한참 뒤 마지못한 듯 서지한이 툭 내뱉었다.
“당연하죠!”
일단 나가기로 정하고 마켓에서 필요한 아이템을 이것저것 구매했다.
괌에서 몰래 던전을 다니는 동안 이런 일은 이미 익숙해졌다.
투명화 아이템이랑, 기척 지우는 것도 사고…….
- 그나저나 간다고 해도 어떻게 알아내게? 피해자는 죽은 데다 단서도 찾기 힘들 거야. CCTV도 조작됐는데.
한참 아이템을 챙기는데 서지한이 턱을 괴고 질문했다.
할 일이야 정해져 있지.
“일단 제가 잘하는 것부터 해보게요.”
- 어떤 거?
“루팅이요.”
부연설명이 없어도 그는 내 말을 알아들은 듯했다.
서지한의 시신을 루팅 해서 영혼석을 얻었듯이 피해자의 시신에 루팅을 시도해서 그의 증언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이번에도 채집 스킬이 적용이 될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때와는 상황도 환경도 다르다.
아마 아무 소득 없이 집에 돌아올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한 번쯤 가서 시도는 해볼 생각이었다.
- 성불 못 하는 불쌍한 영혼이 하나 더 늘어나겠군.
“저기요.”
내가 부루퉁하게 올려다보자 서지한이 괜히 화제를 돌리듯 문을 턱짓했다.
- 이제 갈 거지?
“……어휴.”
일부러 쓰윽 째려보며 문을 나서는데 신발 신는 내 뒤에 서 있던 서지한이 들릴 듯 말 듯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 고마워.
“네? 좀 크게 말해주세요.”
- 아, 좀 못 들은 척해.
“네? 저에게 너무 고맙다고 하신 것 같은데요. 확실하게 말해주시겠어요?”
- 아.
과장되게 또랑또랑 말하는 내 목소리에 서지한이 진저리를 치며 눈을 감았다.
괜히 했다, 라고 쓰인 듯한 진한 후회감이 그의 얼굴에 가득했다.
“내 누명을 밝혀주려고 이 야밤에 나서는 친구야, 너무너무 고마워, 라고 하신 것 맞나요?”
- 아. 가자. 빨리 가자.
쑥스러워하긴.
몸부림치는 서지한을 잔뜩 놀려준 나는 만족스러운 기분으로 휴대폰을 꺼냈다.
가긴 가더라도 암현 병원이 어디 있는지는 확인해야지.
으음, 꽤 멀리 있네. 택시 타면 세 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다.
물론 당연히 택시를 타고 갈 생각은 없었다.
내가 이곳을 방문했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남기지 않을 것이다.
그래야 나중에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용의 선상에 오르지 않을 테니까.
나는 인벤토리에서 넉넉히 사둔 공간이동 스크롤을 꺼냈다.
- 병원에서 좀 떨어진 곳으로 가.병원으로 바로 순간 이동해서 들어가면 들키니까.
“당연하죠. 이쯤으로 가려고요.”
근처에 있는 적당한 골목을 찾아낸 후 사진을 보며 스크롤을 찢었다.
이제는 익숙한 감각이 스친 후, 나는 암현 길드 병원 인근 식당가 골목에 서 있었다.
시간이 늦어서 그런지 문을 연 가게는 없었다.
사람이 모두 빠져나간 텅 빈 풍경.
나는 적막 속에서 사방을 주의 깊게 살핀 뒤 스크롤을 사용했다.
일단 모습을 감추기 위해 투명화 스크롤과 기척을 지워주는 은신 스크롤을 사용했다.
마법을 유지할 수 있도록 마력 증가 포션도 여러 개 꺼내서 마셔두고. 이 정도면 30분은 걱정 없겠지.
그래도 조심해야 한다. 누군가와 부딪히거나 일정 이상의 충격을 받으면 마법이 깨져버리니까.
“이 정도면 되겠죠.”
- 얼굴은 알고 있어?
“아까 뉴스에서 나온 사진 봤어요.”
- 그래.
나는 마스크를 당겨 썼다.
혹시나 투명화가 풀리더라도 얼굴을 바로 들키는 일은 없도록 하기 위해서다.
약 5분 정도 걸어서 암현 병원 정문에 도착했다.
시간이 늦어서 그런지 불 꺼진 층이 많았지만 1층에는 사람이 있는지 불이 환했다.
이런, 이래서야 문을 열고 들어가면 바로 들키겠는데.
다행히 잠시 기다리자 누군가가 담배를 피우려는지 병원 밖으로 나왔다.
그때를 틈타 열린 문으로 얼른 병원으로 들어갔다.
병원에 들어와 보니 일반적인 병원과 그리 다를 바 없는 형태였다.
들어가자마자 접수처가 보였고 당직 서는 직원 두 명과 보안 요원으로 보이는 헌터가 있었다.
길드에서 운영하는 병원이라 보안이 빡빡할까 봐 걱정했는데 생각보다 평범한 느낌이다.
접수처의 당직 직원과 보안요원이 농담을 주고받는 걸 보다가 나는 조심스럽게 병원 안내판을 확인했다.
목적지는 영안실이다.
보통 그 병원에서 숨을 거뒀으면 그 병원 영안실로 갈 테니까.
포션 제작자 김영길의 시신은 거기에 있겠지.
영안실은 아마 지하 2층에 있는 모양이다.
보통 병원 옆에 장례식장을 별도로 마련해두고 거기에 시신을 둘텐데 암현 병원에는 장례식장이 따로 없었다.
지하로 내려가기 위해 비상계단을 찾으니 다행히 문이 열려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소독약 냄새가 코를 찔렀다.
아무래도 계단을 소독하고 환기하려고 문을 다 열어둔 모양이었다.
이런 일은 보통 사람이 없는 새벽에 하곤 하지.
아무튼, 딱 좋다.
소독약 냄새 때문에 어지럽긴 하지만 그래도 문이 잠겨 있었으면 곤란할 뻔했는데.
덕분에 수월하게 지하 2층으로 내려올 수 있었다.
아직까지는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은 상태다.
병원 맵을 꼼꼼히 보고 온 덕분에 영안실도 금방 찾을 수 있었다.
- 잠깐.
영안실 문 앞에서 서지한이 나를 제지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말하지 않아도 멈췄을 것이다.
문 안쪽에서 작게 사람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 내가 보고 올까?
고개를 끄덕이자 서지한의 투명한 몸이 영안실 안쪽으로 사라졌다.
마냥 기다리기도 뭣해서 나도 문밖에서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아, 출출하다. 먹고 하시죠. 국밥 콜?”
“아직 덜 했는데.”
“에이, 갔다 와서 하죠. 입관은 해 뜨고 할 거 아니에요.”
"으음. 그러지 뭐.”
남자 둘의 목소리가 들리더니 서지한이 불쑥 튀어나와 나에게 손짓했다.
- 지금 나온다. 부딪히지 않게 문에서 멀어져.
그 말이 끝나고 거의 바로 영안실 문이 열렸다.
안에 있던 두 남자가 건들거리는 걸음으로 방을 나섰다.
나는 그 건너편 벽에 바짝 붙어서 숨소리도 내지 않고 있었다.
느낌상, 이 두 사람은 헌터다.
적어도 둘 중 하나는 분명 헌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