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47화 (47/231)

047화

“네. 맞아요.”

담백하게 수긍했더니 할머니가 활짝 웃으면서 내 손을 덥석 붙잡았다.

“아주 큰일을 했어요! 사람을 많이 구했다고 들었는데, 얼마나 장한 일이에요!”

갑작스러운 칭찬에 얼굴이 확 달아오르는 것 같다.

몸 둘 바를 몰라서 쩔쩔매는 동안 상황은 더 악화되었다.

아까 귀를 기울이던 사람 중 몇몇이 슬쩍 다가왔던 것이다.

“장하고말고! 요새 젊은이 같지 않게 아주 대단한 일을 했어. 이렇게 작은 것이 어떻게 그렇게 무서운 곳을 혼자 들어갈 생각을 했누……."

할아버지 한 명이 격양된 어조로 말하자 다른 몇몇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갑자기 어르신 사이에 끼어들어 칭찬세례를 듣게 되다니.

이게 무슨 일이야. 대체.

“작아도 덩치 큰 헌터보다 더 강하기도 하다오. 영감쟁이 무식해서 헌터가 덩치로 먹고사는 줄 아는감.”

“뭐어? 무식? 이 노인네가 말 다했어?”

할아버지 두 사람이 갑자기 싸우려고 들자 그 사이를 가로막으며 다른 할아버지가 끼어들었다.

“이런 자리에서도 싸우지 못해 안달이야. 거, 뭐냐. 요즘 그 와이파이인가 하는 것이 터지고 아주 세상 이 난리가 나서 무서워서 못 살겠어.”

"와이파이가 아니라 던전이라우.”

처음 나에게 말을 건 할머니가 점잖게 정정하자 할아버지가 머쓱하게 머리를 긁었다.

“아, 던전. 둘 다 터지는 것 아닙니까? 그게 그거지요.”

"어떻게 둘이 같냐. 진짜 무식한 놈이 여기 있었구먼, 껄껄껄.”

싸우려던 할아버지들이 웃음을 터뜨리자 분위기가 확 풀려버렸다.

아무래도 진짜 나에게 흥미가 있는 건 아니고, 나를 핑계로 모여 앉아 수다를 떨고 싶었던 것 같다.

내가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앉아있는 동안 어르신들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나는 그 사이에서 반쯤 혼이 나간 상태로 멍하게 TV만 보고 있었다.

나는 왜 여기에?

서지한 씨, 그냥 소리 내서 웃으세요. 듣는 사람 누가 있다고 입을 틀어막고 떨고 계시는지.

한숨을 쉬며 TV를 보고 있는데, 갑자기 심각한 음악과 함께 뉴스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방금 들어온 소식입니다. 암현 길드 소속 제작계 헌터 김영길 씨가 오늘 새벽 자신의 공방에서 쓰러진 채 발견되었습니다. 직후 암현 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안타깝게도 숨을 거두었습니다.〉

흉흉한 내용에 이야기를 나누던 사람들이 모두 TV를 주목했다.

〈김영길 헌터는 소비 아이템 제작에 있어서 누구보다도 다양한 종류를 제작할 수 있고, 그 효율 또한 좋기로 유명한 장인입니다. 헌터 업계 관계자는 이번 사건으로 국내 소비 아이템 공급물량이 크게 위축될 것이라며 우려를 표했습니다.〉

나도 아는 사람이다.

한국에서는 몇 안 되는 탈출석, 힐링 포션 같은 필수 소비 아이템 제작자.

암현 길드에서도, 대한민국에서도 독보적인 위치를 가진 헌터인데 그런 사람이 죽었다고?

〈사고 이후 경찰이 확인한 폐쇄회로 영상에서는 김영길 헌터가 누군가에게 폭행을 당하는 모습이 확인되었습니다.〉

“저런 거물을 누가 죽인 거지?”

누군가가 혼잣말처럼 질문을 던졌다.

TV에서 바로 대답이 돌아왔다.

〈이 영상을 통해 확인된 범인의 정체가 매우 충격적입니다.〉

누구기에?

〈김영길 헌터를 살해한 용의자는, 전투계 헌터 랭킹 1위 서지한 헌터로 확인되었습니다. 경찰은 현재 서지한 헌터에 대해 긴급 공개 지명수배를 하였으며, 서지한 헌터의 소재를 아시는 분은 가까운 수사기관으로 즉시 제보해주시기 바랍니다.〉

흥미진진하게 뉴스를 보고 있던 나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서지한이?

유령이 된 사람이 어떻게 살인을 한단 말이야?

속보에 이어 범죄 당시의 영상이 흘러나왔다.

영상 속의 사람은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커다란 낫과 시커먼 기운을 흩뿌리고 있었다.

서지한의 상징과도 같은 모습이다.

- 나 아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지푸라기 인형에 들어가서 TV 리모컨이나 간신히 조작하는 지금의 서지한이 사람을 죽일 수 있을 리가 없잖아.

하지만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은 서지한이 살인범이라고 철석같이 믿는 모습이었다.

“에이잉, 저놈 내가 언젠가 저럴 줄 알았어. 아주 눈에 독기가 가득한 것이 아주 못돼먹은 눈이야.”

날카로운 눈매이긴 하지만…….

“예전에 어떤 학생을 마구 때리기도 했다면서요?”

“노인정에 쳐들어가서 난동을 피웠다고도 들었어!”

“순진한 여자들을 헌터라며 꼬여서는 가차 없이 버렸다던데.”

"모른 척 내다 버린 자식이 열 명도 넘는다면서요.”

사람들이 쏟아내는 루머는 내가 들은 적이 있는 것도 있고, 처음 듣는 내용도 있었다.

서지한의 폭력성에 관한 소문이야 지겹도록 들은 것이지만, 애가 있다고?

복잡한 기분으로 가만히 듣고 있는데, 사람들은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나에게 불쑥 말을 붙였다.

“그렇지? 손모아 헌터도 조심해요.아주 나쁜 놈이야. 얽히기라도 하면 인생 말아먹는다니까.”

"난봉꾼이야. 난봉꾼. 그렇지? 아주 폭력배가 따로 없지?”

서지한과 주민들, 양쪽에서 쏟아지는 시선에 나는 매우 난처해졌다.

만약 서지한을 모르는 상태였다면 나도 저 뉴스의 내용을 그대로 믿었겠지.

평소 이미지가 워낙 나쁘니까.

그러니 주민들이 이렇게 생각하는 것도 충분히 이해는 갔다.

마음 같아서는 서지한의 편을 들어주고 싶었지만 살해 뉴스가 나왔는데 범인의 편을 드는 건 어떻게 봐도 그림이 좀 이상하다.

나는 일단 어르신들의 마음이 상하지 않도록 여론에 동조하는 척했다.

“마, 맞아요. 정말 사납고 무섭고 난폭하다고 들었어요.”

아아, 따갑다.

옆에서 빤히 보는 서지한의 시선이 너무 따갑다.

“그렇지? 아주 못돼 먹었다니까!저놈 상판대기는 반반해서 여자 여럿 홀리고 다닌다잖아. 손모아 헌터는 절대 홀리지 마. 저런 놈한테 홀리면 부모님 가슴에 대못 박는 짓이여!”

문득 무당이 했던 말이 생각난다.

연애를 못해본 귀신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내가 잠시 생각에 잠기는 동안 어른들의 서지한에 대한 비방은 가파르게 수위를 높여가고 있었다.

본인을 바로 앞에 두고 듣기가 민망할 정도다.

서지한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담담한 얼굴이었지만 나는 무척 난감한 기분이었다.

결국 나는 여론을 역행하여 서지한의 편에 섰다.

“그, 싸가지는 없어도 그렇게 나쁜 사람 같지는 않던데요.”

사방에서 날아드는 눈길이 따갑다.

서지한도 의외라는 표정이었다.

저기요, 제가 큰 맘먹고 나섰는데 당사자가 그렇게 보시다니요.

“만나봤어?”

미심쩍은 얼굴로 할아버지 하나 가입을 열었다.

꼬투리를 잡으려는 시선이다.

“네. 예전에 충왕류 던전에 휘말렸을 때 그 사람이 탈출석도 주고 몬스터도 잡아줘서 겨우 살았어요.”

"흐음, 그래? 신기한 일이구먼. 손모아 헌터를 꼬시려고 한 거 아니야? 이렇게 예쁘니까 그럴 수도 있지.”

할아버지의 말에 다른 어르신들이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부터 신기하게도 어른들은 나를 무척 좋게 보곤 했다.

아마 순한 인상이라 그런 게 아닐까 싶다.

“하하.”

내가 가볍게 웃어버리자 어르신들은 잠깐 이야기를 나누다가 곧 화제를 바꿨다.

뉴스 속보가 끝나고 음식 채널이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방앗간에서 떡 뽑는 영상이 노인들을 모두 홀려버린 덕분에 나는 조용히 헌터증을 받아 주민센터를 나설 수 있었다.

“그 뉴스, 대체 무슨 일일까요.”

- 신경 쓰지 마.

서지한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나는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가 더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 얼굴이라 전전긍긍할 뿐이다.

- 뭐, 큰일도 아니지. 개자식이 개 같은 일을 하나 더 저지른 것뿐인 소식이잖아.

마치 남 일처럼 말하는 냉소 어린 어조에 나는 잠깐 할 말을 잃어버렸다.

“그, 아까 한 말은 진심이 아니었어요.”

괜히 아까 노인들에게 동조해서 그를 헐뜯었던 게 생각나 자진 납세하자 서지한이 삐뚜름하게 미소 지었다.

- 그런 것치고는 말을 안 더듬던데?

“그건……."

- 그건?

“사납고 난폭한 건 사실이잖아요.”

- 너……. 그럼 뭐가 진심이 아니었다는 거야?

“무서운 사람이라는 부분?”

- 이제는 안 무섭다는 거지?

“무섭겠어요? 지푸라기에 들어가서 부스럭부스럭 돌아다니는 모습까지 봤는데.”

뭔가 말하려는 듯 단어를 고르던 그는 나의 천연덕스러운 표정에 고개만 저어버렸다.

- 하아……. 내가 어쩌다 이렇게 됐지.

서지한이 작게 한탄했다.

하지만 무거운 기색은 어느새 사라진 상태였다.

우리는 여느 때처럼 투덕거리며 집으로 돌아왔다.

소파에 앉자마자 TV를 틀었더니 마침 또 그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나는 요깃거리로 산 만두를 입에 집어넣으며 서지한의 눈치를 살폈다.

아까와 달리 담담한 표정이다.

지금이라면 물어봐도 괜찮을 것 같은데…….

“저기……."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자 그가 의아한 얼굴로 나를 돌아봤다.

- 왜?

“그게, 궁금한 게 있는데요.”

- 뭔데? 아, 애는 없어.

잠시 고민하던 그가 마음에 안 드는 어조로 덧붙였다.

- 여자 사귄 적도 없고. 젠장, 인정하기 싫었는데 그 무당 용하군.

아니, 그게 궁금한 게 아니었는데.

“아니,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아요.”

- 아, 아무래도 좋구나.

“네. 그보다 아까 그 뉴스요.”

- 으, 응.

서지한은 어쩐지 약간 기운 빠진 얼굴로 가만히 내 말을 기다렸다.

“그 범인. 서지한 씨 사칭하고 사람 죽인 그놈. 누군지 알 것 같아요? 혹시 짚이는 사람 있어요?”

- 글쎄? 나 싫어하는 인간이 한둘이어야지.

차갑게 냉소하긴 했지만 그는 무언가 아는 눈치였다.

하지만 별로 말하고 싶지는 않은 것 같다.

나도 그냥 덮고 넘어가야 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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