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46화 (46/231)

046화

“다 왔네요. 진짜 가깝네.”

처음 이사할 때는 무슨 집이 이렇게 비싸냐고 투덜거렸는데 며칠 지내보니 돈 값을 한다는 걸 느꼈다.

집에서 약 5분 거리 내에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들이 준비되어 있었다.

예전 반지하에서 살 때는 오르막길을 한참 걸어서 차도를 몇 개나 지난 다음에야 주민센터를 찾을 수 있었는데.

별거 아닌 부분이지만 이런 사소한 부분부터 완전히 다르다.

안으로 들어가자 평일 오후의 나른한 분위기가 공간을 지배하고 있었다.

순번을 기다리는 사람들과 창구에서 상담하는 사람들을 잠시 둘러보다 각성자 민원 코너에서 번호표를 뽑았다.

딱히 기다릴 필요는 없었다.

애초에 줄을 설 만큼 각성자들 이주민 센터에 바글바글 찾아올 일 자체가 거의 없으니까.

대기표를 뽑음과 거의 동시에 내 순서가 찾아왔다.

- 오랜만에 오는군.

“얼마만인데요?”

- 글쎄? 민증 발급받고 이후로 온 적 없어. 헌터 관련 용무는 대부분 천공 길드 사무원이 처리해줬으니까. 많이 바뀌었네.

감회 어린 얼굴의 서지한과 소곤소곤 대화하며 나는 창구에 가서 앉았다.

식곤증과 사투를 벌이고 있는 공무원이 의욕 없는 얼굴로 나를 맞이했다.

“무슨 일로 방문하셨나요?”

"여기, 헌터 등록하라고 문자 메시지를 받아서요.”

휴대폰을 들어 내밀었더니 대충 보는 둥 마는 둥 하던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주민등록증 주시고, 여기 지문 스캐너에 손가락 하나씩 올리세요.”

시키는 대로 순순히 절차를 따랐다.

손가락을 하나하나 올리며 스캔이 끝나기를 기다리는데 문득 그녀의 옆자리에 앉은 동료가 나를 흘긋 흘긋 쳐다보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급기야 의자를 조금씩 당겨서 가까이 다가왔다.

내 담당 직원은 자신의 동료가 그렇게 다가오고 있는지 모르는 눈치였다.

서랍에서 서류 몇 장을 꺼내 스티커를 붙이고 도장을 찍으며 준비하던 직원은 심드렁하게 화면을 확인하다 말고 눈을 크게 떴다.

“손모아 헌터?”

“역시!”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슬금슬금 접근하던 다른 직원이 크게 외쳤다.

목소리가 너무 커서 주민센터의 느긋한 분위기를 단숨에 박살 내버렸다.

우르르 쏠리는 시선은 덤이었다.

“설마 설마 했는데 진짜였네! 손모아 헌터! 이렇게 만날 줄은 몰랐는데!”

다가왔던 직원은 발을 동동 구를 것처럼 호들갑 떨며 반가워했다.

나는 영문을 몰라서 얼떨떨하게 눈만 깜빡일 뿐이었다.

“어, 저를 아세요?”

내가 아는 사람인가?

아닌데. 처음 보는 사람이 확실하다.

하지만 두 사람은 뜻밖의 질문을 들었다는 반응이었다.

“당연히 알죠! TV 보는 사람이면 다 알고도 남죠. 괌 공항 던전 생성 폭발 사망자 0명의 헌터!”

아.

그런 의미로 아는 거구나.

“임민경 주무관이 손모아 헌터를 무척 좋아하거든요.”

“그냥 좋아하는 게 아니라 팬이라고요!”

그렇게 말한 임민경 주무관은 어디선가 펜과 종이를 꺼내 와서 내밀었다.

“사인 좀 해주세요.”

잔뜩 상기된 얼굴과 초롱초롱한 눈을 마주하니 거절의 말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당황해서 쩔쩔매다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그, 저 사인은 카드 서명할 때 하는 거 밖에 없는데.”

빳빳한 사인 용지에 그런 하찮은 낙서를 할 수는 없지.

에둘러 거절한 것이었는데 임민경 주무관은 막무가내였다.

“그것도 좋아요!”

결국 실랑이가 길어질 것 같아서 포기하고 나는 펜을 들었다.

그런데 막상 사인을 하려니 여간 민망한 게 아니다.

무슨 연예인도 아니고, 살면서 이런 걸 할 일이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했는데.

으음, 이렇게 하면 되나?

“여기. 다 했어요.”

태어나서 가장 정성 들여 한 사인이다.

종이를 돌려주자 임경민 주무관이 입으로 후후 불어 번지지 않게 간수했다.

그리고 뭔가 더 말을 걸고 싶은 눈치였으나, 내 담당 직원이 그쯤에서 끊었다.

“자, 개인 용무는 여기까지 하고.이제 손모아 헌터 민원 처리부터 할게요. 임민경 주무관은 2층 가서 아까 말한 거 자료 준비해주세요.”

업무 내내 쳐다보고 있을 기세인 임민경 주무관이 무척 부담스러웠는지 담당 직원이 그녀를 쫓아냈다.

그녀는 아쉬운 눈으로 나를 몇 번 곁눈질하다가 떠나갔다.

그제야 긴장을 풀자 재밌다는 표정으로 나를 관찰하던 담당 직원이 슬쩍 질문을 던졌다.

“길에서 알아보는 사람 없어요?”

"전혀 없어요.”

“하긴, 얼굴이 많이 나오지는 않았죠. 저도 신원조회 전까지는 못 알아봤고……."

“네……."

주민센터로 오면서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만남이다.

아직 얼이 빠져 있는 나와 달리 직원은 빠르게 업무 모드를 회복했다.

“벌금이 있네요.”

“네?”

“각성하고 바로 등록 안 했죠? 각성 등록 연체금이 있어요. 일단 현장 증언도 그렇고 정황상 두 달 전 각성한 걸로 되어 있는데, 아니면 증거 가지고 제소해서 정정할 수 있어요.”

증거를 가져와야 한다는 말에 나는 냉큼 엎드렸다.

증거는 무슨 증거야.

괜히 꾸며내다가 긁어 부스럼 만들지 말고 얌전히 자진납세하는 게 최고다.

“아, 네, 그쯤에 각성했어요.”

"바로 등록했으면 벌금 없었는데, 아깝게 됐어요.”

“아무래도 헌터로 활동하면 가족들이랑 같이 시간 보내기 힘들 것 같아서 가족여행 다녀와서 신고하려고 했어요.”

진실 반 거짓 반의 내 변명에 직원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도 있죠. 그래도 자진신고에 응해서 다행이네요. 벌금 50% 감면되어서 1억 원 납부해주시면 돼요.”

순간 잘못 들은 줄 알았다.

“1억 이요?”

나의 반응을 가만히 바라보던 직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반응 보니 최근 각성한 거 맞네요. 각성하고 활동 좀 한 사람들은 금전 감각부터 이미 좀 달라서.”

펜트하우스에 살고 있고, 인벤토리에는 조 단위 규모의 재산이 들어있지만 이렇게 갑작스러운 상황에는 아무래도 지난 수십 년간 익숙하게 살아왔던 금전 감각이 튀어나와버린다.

내가 멋쩍게 웃자 직원도 가볍게 웃으며 서류 한 장을 내밀었다.

“여기 벌금 납부 동의서에 서명해주시고, 납부는 계좌이체로 하시겠어요? 아니면……."

“현찰로 드릴게요.”

인벤토리에서 즉시 돈뭉치를 꺼내 창구에 쌓자 직원이 익숙하게 챙겨서 금고로 집어넣었다.

나는 이어서 건네받은 서류에도 서명했다.

“납부하신 벌금은 각성자 범죄 피해자 구제에 쓰이고, 이쪽에 매달 기부할 수 있는 계좌도 있으니 보시고 관심 있으면 기부도 해주세요.”

"네.”

“그리고 주변 사람들한테 던전 공략 수익금 나눠주는 것에는 제한이 없지만, 자산을 받아서 거액을 쓰면 자금출처 소명할 때 상속세 납부하게 됩니다.”

“네.”

“그리고 길드 가입하셨나요?”

"네, 길드 가입했어요. 백광 길드요.”

타이핑하던 직원이 멈칫하고 나를 돌아봤다.

“백광 길드요?”

“네, 뭔가 잘못된 거라도……."

“처음 듣는 길드라서요. 직접 차리신 거예요? 아니지, 헌터증 없으면 길드 설립 허가도 못 받을 텐데.”

"아뇨, 원래 있던 길드에 가입한 거예요. 1년 전부터 있었다던데.”

"음? 그래요? 잠시만요.”

무언가 확인하듯 이것저것 눌러보던 직원이 뒤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 정말이네. 진짜 있는 길드네요. 왜 이름을 못 들었지?”

"던전 공략 허가가 안 나와서 실제 활동은 못 하고 있는 길드래요.”

"아아.”

그 정도만 듣고도 그녀는 알 만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반응을 보니 3대 길드가 던전을 장악하는 것이 새삼스러운 일이 아닌 모양이다.

서지한이 조용히 혀를 찼다.

- 표정 보니 던전 관리청 분위기도 알 만 하군. 백광 길드에 공략 허가가 나올 일은 진짜 없겠는데.

뭐, 상관없다. 어차피 던전에 가고 싶지도 않고, 설령 가고 싶어 진다고 해도 몰래 들어가면 그만이다.

불법이긴 하지만 던전 독점도 옳은 일은 아니니까.

“손모아 헌터라면 더 좋은 길드도 갈 수 있었을 텐데 왜 이런 신생 길드에 들어갔어요?”

직원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말하긴 했지만 딱히 대답이 궁금하지는 않았는지 손가락을 빠르게 움직였다.

그녀의 지시에 따라 사진을 찍고, 이런저런 문서를 작성하고 나자 마침내 모든 절차가 마무리되었다.

“다 끝났으니 저기 앉아서 잠시 기다리세요. 건수가 별로 없어서 바로바로 결재가 나는 편이라, 결재 떨어지면 바로 출력해서 헌터증 발급해드릴게요. 한 30분 걸려요.”

던전이 터지고 마법이 생겨나고 온갖 놀라운 일들로 세상이 뒤바뀌었어도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은 늘 그 자리에 있다.

헌터 등록이라고 해서 뭔가 특별한 것을 기대했는데 실상은 주민등록증 발급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아무튼 지시받은 대로 대기석에 앉자 한쪽에 걸린 거대한 벽걸이 TV가 보였다.

민원인들이 기다리는 동안 볼 수 있도록 설치된 것이다.

민원 업무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멍하니 TV에서 흘러나오는 뉴스를 보고 있었다.

자리에 앉아 TV 쪽으로 시선을 던지는데, 갑자기 꽤 멀리 앉아 있던 누군가가 슬쩍 옆자리로 다가와 앉았다.

반사적으로 경계해서 돌아보니 호기심 어린 표정의 할머니였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그녀가 무척 반가운 얼굴로 말문을 열었다.

“오늘 날씨가 좋지요?”

"아, 네.”

오늘따라 모르는 사람이 말을 많이 거는구나.

아니, 오늘 따라가 아니지.

나는 원래 밖에 나오면 모르는 사람이 말을 많이 걸었다.

기가 맑아 보인다는 소리를 듣고 몇 걸음 걷다 보면 얼굴에 근심이 가득하다며 또 다른 사람이 말을 붙이곤 했지.

하하.

“아까 내가 듣기로는 손모아 헌터라고……."

할머니가 조심스럽게 말하자 앞, 뒤, 양 옆에 있던 사람들이 가만히 귀를 기울이는 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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