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45화 (45/231)

045화

놀랍게도, 지푸라기 인형의 정체는 었다.

“서지한 씨?”

- 응. 나야.

“왜, 아니. 지금 이게 어떻게 된 일이죠?”

- 그건 나도 잘 모르겠는데. 아무래도 나는 이 인형에 빙의할 수 있는 것 같아.

“빙의요?”

- 아마 이 인형이 영적으로 특수해서 그런가 본데. 나도 신기하군. 다른 물건에도 빙의할 수 있나 시도해봤는데 이 인형만 가능했어.

그렇게 말하며 지푸라기 인형이 두 손을 가볍게 들어 올렸다.

아무래도 어깨를 으쓱하고 싶은 것 같았다.

그쯤에서 나는 거실 불을 켰다.

환한 불 아래에서 서지한이 신기한 듯 뚜벅뚜벅 걷는다.

걸을 때마다 작은 짚 부스러기 같은 것들이 근처에 떨어지고 있었다.

꽤 많이 돌아다녔는지 바닥 여기저기에 작은 짚 조각이 잔뜩 흩어져있다.

잠깐, 놀라운 건 놀라운 건데 집이 개판이 됐잖아요.

여기가 집이야, 마구간이야.

“바닥 엉망이네. 치워야겠는데요.”

- 지금 할 말이 그거뿐이야?

“근데 바닥상태가 좀 심하잖아요.”

내 말에 자신이 돌아다닌 길을 돌아본 지푸라기 인형이 조용해졌다.

- 내가 할게. 내가 하면 되잖아. 이제 몸도 생겼다고.

당당하게 말한 그가 허리를 바스락 숙여서 자신이 떨어뜨린 지푸라기들을 줍기 시작했다.

하지만 손가락도 없는 뭉툭한 몸으로는 진도가 영 안 나간다.

결국 하나 줍고 두 개 떨어뜨리는 꼴이었다.

정말 눈뜨고 봐주기 힘든 불쌍한 모습이라, 도와주기로 했다.

“서지한 씨, 그래서야 끝이 안 나겠어요.”

- 아냐, 그럴 것까지 없어. 내가 한다니까.

“그냥 도와줄게요.”

나는 주변에서 적당한 물건을 찾아서 지푸라기 인형의 품에 안겨주었다.

손사래 치며 사방에 짚 가루를 뿌리던 그가 품에 안긴 물건에 멈칫한다.

- 너한테 민폐……. 이게 뭐야?

“롤 테이프요.”

지푸라기 인형이 두 팔로 롤 테이프의 손잡이를 끌어안고 나를 올려다봤다.

기분 탓인지 좀 황당해하는 것 같기도 하다.

“굴리세요.”

- 어, 어…….

멍하니 서 있던 지푸라기 인형이 내 말에 따라 손잡이를 두 팔로 잡고 바닥에 롤러를 굴리기 시작했다.

좋아.

짚 가루도 잘 붙고, 잘 되는군.

“그럼 저는 잘게요. 중간에 깨서 너무 졸려요. 그럼 내일 이야기하자고요……."

그대로 다시 침대로 향하는데 등 뒤에서 서지한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 어쩌다 내 신세가 이렇게 됐지…….

약간 서글픈 것 같은 목소리였다.

너무 졸린 상태라 제대로 들었는지 잘 모르겠지만.

* * *

눈을 뜨자 커튼 너머에서 정오의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다.

평소와 달리 밖이 조금 시끄러웠다.

층간소음인가?

아니, 거실에서 들리는 소리다.

TV 소리 같은데, 어제 켜 두고 잤나?

나른한 몸을 이끌고 거실로 나가자 역시 TV가 켜져 있었다.

그리고 소파에는 유령 상태의 서지한이 앉아 있었다.

- 잘 잤어?

TV를 보고 있던 서지한이 가볍게 인사를 건넸다.

대충 마주 인사를 해 주고 나니 약간 정신이 들었다.

“역시 꿈이었구나.”

- 뭐가?

“서지한 씨가 지푸라기 인형이 되는 꿈을 꿨거든요.”

- 그거 꿈 아냐.

서지한이 가볍게 테이블 아래를 눈짓했다.

리모컨을 품에 안고 테이블 다리에 기대어 있는 지푸라기 인형이 보였다.

그 옆에 아무렇게나 떨어져 있는 하얀 돌은 서지한의 영혼석이다.

- 덕분에 TV 켰지.

“영혼석도 여기 있네요?”

- 저 인형에 완전히 빙의하면 영혼석이 그쪽으로 흡수되는 것 같아.밖으로 나오면 다시 영혼석 형태로 돌아오지만.

나는 일단 영혼석을 챙겼다.

바닥에 떨어져 있는 지푸라기 인형도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그럼 행동반경이 좀 넓어지겠네요.”

서지한은 영혼석과 3미터 이상 떨어질 수 없다.

그래서 내가 잠들면 그는 언제나 이 집을 벗어나지 못 하는 신세였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영혼석의 위치를 옮길 수 있다면 행동반경도 훨씬 늘어나게 된다.

하지만 서지한은 회의적인 반응이었다.

- 넓어져 봐야 저 몸으로 어딜 가겠어. 그냥 집안이나 좀 돌아다닐 수 있지.

하긴, 지푸라기 인형이 혼자 막 걸어 다니는 모습을 누가 목격하기라도 하면 큰일이지.

그러다가 어디 사고에 휘말려서 영혼석을 잃어버려도 문제고.

- 그래도 물리력이 약간 생겨서 편하긴 해.

기분 좋게 웃으며 그가 인형에 손을 뻗었다.

서지한의 두 팔이 인형 안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인형의 뭉툭한 손이 채널 변경 버튼을 꾹꾹 눌렀다.

TV 화면이 예능에서 영화로, 그리고 뉴스로 바뀌어갔다.

“으음, 그 상태로 스킬도 쓸 수 있는 거예요?”

- 아니. 스킬은 못 써. 상태 창도 없고, 인벤토리도 없고. 각성자로서의 능력은 유령일 때와 같은 상태야.

그렇구나.

몸이 생겼으니 혹시나 했지.

그도 약간 아쉬운 기색이었으나 곧 미련을 털어버린 듯 얼굴이 밝아졌다.

- 그래도 이게 어디야.

소박하게도 그는 TV 채널을 누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좀 행복해진 것 같았다.

그동안 그렇게 답답했나.

나는 약간 반성했다.

맞아.

몸이 있고 없고가 크지.

비록 지푸라기로 만든 하찮은 몸이라고 해도.

“신기하네. 그 무당, 진짜 용한 무당이 맞았던 것 같아요. 혹시 모르니 나중에 가서 몇 개 더 사놔야겠네. 제가 사기꾼 아니라고 했잖아요.”

- 크흠.

할 말이 없었는지 그가 헛기침을 하며 TV로 시선을 돌렸다.

그나저나 저 인형, 잠깐 움직였는데도 지푸라기가 엄청 떨어지네.

어떻게 해야겠는데.

지푸라기 인형 모습의 서지한이 롤 테이프로 청소하는 것도 귀엽기는 했지만 효율이 너무 떨어진다.

나는 그가 TV를 보는 동안 휴대폰으로 쇼핑을 시작했다.

일단은 로봇 청소기.

서지한이 떨어뜨리는 지푸라기를 청소하려면 꼭 필요한 물건이다.

그리고 또 뭐가 있을까?

아.

옷이라도 입혀두면 천에 막혀서 가루가 좀 덜 떨어지겠지?

“서지한 씨. 이거 좀 골라보세요.”

내가 내민 휴대폰 창을 본 서지한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휴대폰 화면에는 지푸라기 인형에 딱 맞을 만한 크기의 인형 옷들이 즐비했다.

- 너 날 뭐라고 생각하는 거냐?

“아니, 양말이라도 신겨두면 지푸라기가 좀 덜 떨어질 거 아니에요.”

지극히 타당한 주장이었는데 그는 고개만 절레절레 저었다.

- 아무거나 사.

“공주님 드레스로 사야지.”

- 손모아.

“농담이에요.”

서지한의 한숨소리를 들으며 나는 무난한 인형 옷 몇 개를 구입했다.

발에 신길 인형 양말도 몇 켤레 샀다.

사실 이렇게 많이는 필요 없는데, 괜히 귀여워서.

쇼핑을 끝내고 밤사이 쌓인 가족들의 메시지를 읽었다.

돈이 생기면 느긋하게 가족끼리 시간을 보내지 않을까 했는데 엄마와 승주는 이전보다 더 바빠진 느낌이다.

승주는 무슨 사업을 하겠다며 대학교 창업센터의 지원을 받아서 한창 분주하게 살고 있고, 엄마는 친구들과 해외여행 중이었다.

기자를 피해서 출국한 것 같기도 하는데, 그래도 즐거워 보이는 표정은 진짜였다.

아마 느지막이 접한 해외여행이 무척 좋으셨나 보다.

황금빛 인생 2막을 꾸리시는 걸 보니 나도 행복하다.

그나저나 나만 엄청 빈둥거리고 있는 느낌인데.

그래도 바쁘게 움직일 생각은 들지 않는다.

괌에서는 밤마다 몰래 던전을 다니느라 몸을 혹사시켰고, 귀국 후에는 기자들 때문에 정신적으로 혹사당했다.

그러니까 나는 쉴 자격이 충분하다.

그래도 할 일이 하나도 없는 건 아니었다.

오늘은 또 따로 갈 곳이 좀 있다.

내가 소파에서 일어나 외출 준비를 하자 서지한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 어디 가?

“가까운 주민 센터로 와서 헌터 정보 등록하래요.”

- 아아. 길드에서 대행해주지 않던가? 나는 따로 그렇게 찾아간 적이 없는 것 같은데.

“던전 공략 허가가 떨어진 길드만 던전 관리청 연계로 처리해준대요.”

- 그렇군.

좀 귀찮긴 하지만 어차피 할 일도 없으니 상관없다.

주섬주섬 가방을 챙겨 집을 나서는데 서지한이 따라붙었다.

“같이 가게요? TV 채널도 바꿀 수 있으니까 집에 있겠다고 할 줄 알았는데.”

- 무슨 말이야. 널 어떻게 혼자 보내. 당연히 같이 가야지.

“어차피 바로 앞이라 혼자 가도 괜찮은데.”

말은 그렇게 하긴 했지만 서지한이 같이 가주겠다고 나서는 게 싫지는 않다.

사실 그와 늘 붙어 다녔더니 이제 혼자 어디 돌아다니면 좀 섭섭할 지경이다.

집을 나서자 느긋한 오후의 햇살이 쏟아졌다.

빛을 받은 서지한은 마치 금방이라도 성불할 것처럼 성스러워 보였다.

그나저나 새삼스러운 말이긴 하는데, 진짜 잘생겼네.

- 왜?

가만히 쳐다보는 시선이 이상했는지 서지한이 물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잘생겼다 싶어서요.”

이 몸이 잘생긴 걸 이제 알았냐라든가 좀 뺀질거리는 말을 할 줄 알았는데 서지한은 조용히 침묵했다.

자세히 보니 얼굴이 약간 붉다.

와, 놀려주고 싶네.

- 크흠, 새삼스럽긴.

약간 진정됐는지 뒤늦게 이렇게 말하긴 했지만 얼굴에서는 아직 붉은기가 덜 빠져 있었다.

“근데 얼굴 붉어져도 잘생겼네요.”

결국 담담하게 놀려줬더니 투명한 팔로 얼굴을 가려버렸다.

앗, 이제 귀까지 붉어졌다.

- 아, 진짜. 처음 봤을 때는 이런 성격일 줄 몰랐는데.

“그때는 낯가림을 한 거구요.”

- 지금은 익숙하다?

나는 대답 대신 어깨만 으쓱했다.

같이 지내보니 서지한은 의외로 놀려먹기 좋은 성격이었다.

생전의 서지한을 누군가 이렇게 놀렸다면 뼈도 못 추렸겠지.

감히 누가 랭킹 1위를 이런 식으로 놀린단 말인가.

덕분에 놀림에 대한 면역력도 없어서 반응이 아주 통통 튄다.

그렇게 툭탁거리며 잠시 걸었더니 어느새 주민센터의 표지판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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