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4화
“아니요. 관심 없습니다.”
진심이다.
나는 이미 괌에서 충분하고도 넘칠 만큼의 아이템을 손에 넣었다.
헌터 마켓에 팔아치우면 평생 다 쓰지 못 할 만큼의 돈을, 아이템으로 만들면 나 혼자서는 다 소진하기 힘든 양의 포션이나 스크롤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케르기스의 던전에서 에비타니스나 뜯었던 때와 달리 괌의 던전에서 나는 내가 가진 채집 패시브 스킬의 혜택을 원 없이 누렸다.
다 세지도 못 할 정도로 많은 몬스터를 죽이고 루팅 했다.
식물류는 더하다.
내가 농부인지 아니면 헌터인지 정체성의 혼란을 겪을 정도로 많은 채집을 했다.
입장할 때마다 번번이 위치가 달라져서 그렇지, 내가 한 장소에서만 채집했다면 민둥산이 몇 개는 생겼을 거다.
게다가 그렇게 채집하는 동안 나의 스킬에 대한 것도 좀 더 구체적으로 파악하게 되었다.
‘최상의 채집’이라는 불친절한 스킬 설명 때문에 그 기준을 명확하게 파악하지 못했는데 이번에 수많은 채집을 하면서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나는 저 최상의 채집이라는 말을 늘 s급 핵을 약속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이번에 대량채집을 해보니 의외로 A급 핵도 채집으로 얻을 수 있었다.
그런 핵은 대부분 키가 좀 작은 가르니드 나무라든가, 좀 덜 자란 것 같은 식물종에게서 채집되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핵과 마석 외에 내가 얻는 다른 부산물은 최고 등급이 S급이 아니라 A급이다.
그걸 보면 내 스킬의 효과는 등급을 S급으로 고정시켜준다기보다 채집물의 잠재력을 최대한 끌어내는 쪽에 가깝다.
게다가 간혹 어떤 몬스터는 늘 16개씩 주던 발톱을 12개 준다거나 한 일도 있었다.
그런 몬스터는 대부분 나의 충왕포에 한쪽 팔이나 다리가 사라진 몬스터였다.
즉, 나의 공격으로 회생불능 상태가 된 부분은 아이템으로 변환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다른 사람은 몬스터에게서 좋은 것, 나쁜 것 중 확률적으로 몇 퍼센트의 부산물만 획득한다면 나는 얻을 수 있는 가장 좋은 상태로 전부 쓸어오는 느낌이다.
부산물도 A급이 아니라 B급을 얻는 경우도 있었는데, 그건 몬스터의 사체가 훼손된 경우였다.
아무리 최상의 채집이라고 한들 없는 부위의 발톱을 채집하는 건 불가능하고, 적어도 신체 부위를 남겨두면 거기서 최대한 뽑아내 본다.
뭐, 이런 느낌이다.
- 쳇.
“뭐가 쳇이에요. 저 괌에서 특훈 하느라 얼마나 힘들었는데요. 이제 특훈은 사양이에요. 그리고 오늘 갈 곳 있어요.”
- 어디?
“무당집요.”
- 그거 아직 포기 안 했어?
찾아오는 취재 기자도 없고, 출근할 회사도 없으니 내 생활은 한가함 그 자체다.
그런 이유로 나는 서지한 성불 프로젝트를 다시 가동하기로 했다.
“포기하면요? 무섭지도 않아요? 불안하지도 않아요? 저 죽으면 그 영혼석에서 영원히 있어야 할지도 모르는데요?”
- 뭐, 어떻게든 되겠지. 그보다 너는? 어차피 사람은 다 죽는데, 스스로나 걱정하는 게 어때?
“저야 천국 가겠죠?”
- 뭐?
“저는 착하게 살았다고요.”
나의 당당한 태도에 서지한은 할 말을 잃은 듯했다.
뭐. 왜. 뭐.
나는 착하게 살았다. 살면서 크게 다른 사람한테 해 끼친 적 없다고.
- 소심한 것 같다가도 뻔뻔하기도 하고 종잡을 수가 없네.
“다 들리거든요.”
대충 대꾸하며 나는 어깨에 가방을 둘러멨다.
인벤토리를 쓸 수 있게 된 이후로 가방을 들고 다닐 필요는 없어졌지만 습관 때문인지 아무것도 안 들면 뭔가 허전하다.
외출 준비를 끝내고 택시를 잡은 뒤 차장님이 알려준 주소로 향했다.
언제까지나 택시를 타고 다닐 수도 없으니 조만간 운전면허도 따야겠다.
차도 사야지.
무당집은 새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오래된 주택가 특유의 좁은 골목길을 굽이굽이 돌아 들어갔더니 무슨 가정집 같은 주택이 나왔다.
잘못 찾아온 건가 했는데 대문 앞에 ‘천지 신녀’라고 적힌 걸 보니 여기가 맞는 것 같다.
- 진짜 살다 살다 별…….
오늘도 불만 많은 서지한은 부루퉁한 얼굴로 ‘이런 거 다 사기야’라든가, ‘쓸데없는 노력이다’ 운운하는 중이었다.
“좀 조용히 해봐요. 여기 무당님이 다 들으면 어쩌려고요.”
- 사기라니까.
안으로 들어가자 짙은 화장에 쪽진 머리를 한 여자가 나를 노려보더니 손짓했다.
척 보기에도 무당 그 자체다.
“아, 안녕하세요? 오늘 예약한……."
어색하게 인사를 하는데 그녀는 기다리지도 않고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들어오라는 듯 슬쩍 손짓만 할 뿐이다.
내가 손님인 걸 알아보다니, 진짜 영험한가 봐.
“와, 뭔가 진짜인 것 같지 않아요?”
- 기선제압용 쇼라니까. 다 가짜야.
서지한의 그런 확신과 달리 안으로 들어가 자리에 앉자마자 무당은 첫마디를 던졌다.
“남자 문제지?”
“와! 어떻게 아셨어요?”
- 그냥 막 던진 거라니까.
나는 아무 말도 안 했는데 바로 맞추다니.
진짜 영험한 무당이 맞나 보다.
내가 깜짝 놀라자 그녀는 나를 가만히 바라보더니 내 옆을 노려보았다.
정확히, 서지한이 앉아 있는 자리였다.
“아주 독한 놈이 붙었어.”
"네?”
“연애 못 하고 죽은 놈이야. 너한테 들러붙어서 절대 안 떨어질 걸?”
서지한, 연애 못 해봤어?
그렇게 잘생겼는데?
내가 입을 쩍 벌리고 돌아보자 서지한이 얼굴이 시뻘게져서 손을 내저었다.
- 아냐, 아니라고!
“연애 못 해보셨구나.”
- 아니야! 사기라니까. 저런 거 다 헛소리라고!
그의 말을 믿어주기에는 안색이 너무 새빨갛다.
나는 자폭하는 서지한을 내버려 두고 무당 쪽으로 좀 더 다가앉았다.
“그, 어떻게 해야 할까요?”
"떼고 싶어서 온 건 아닌 거 같고. 뗀다고 떼어질 놈도 아니야. 그냥 살아. 해 끼치지는 않을 테니까.”
"그래도……."
“때가 되면 알아서 해결되게 되어있어.”
알아서 성불한다는 뜻일까?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이렇게 돌아가긴 좀 아쉽다.
내 마음을 읽은 듯 무당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가기 아쉬우면 점이나 봐줄까?”
와, 뭐지? 진짜 신기해.
“네네!”
내 대답에 무당이 상 위로 쌀알을 뿌렸다.
나는 봐달라고 하면서도 내심 별일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내 앞길은 인벤토리의 거금을 흩뿌리며 평안, 안락하게 사는 길뿐일 테니까.
그래서 점괘를 들었을 때 조금 놀랐다.
“고생길을 가겠어.”
“고생요?”
“사서 하는 고생인데, 안 갈 수가 없는 길이야. 뭐, 그래도 끝은 괜찮아 보이네.”
고생?
내가 앞으로 고생할 일이 뭐가 있지?
아무리 고민을 해도 생각나는 게없다.
“이제 가봐. 내가 뭐 더 봐줄 수 있는 게 없네. 복채는 10만 원이야. 더 필요한 거 있으면 액막이 부적이라도 하나 써줘? 딱히 액이 낄 운수는 아닌데.”
“네? 아뇨. 부적은 괜찮아요.”
벌써 끝났다니 좀 아쉽긴 하는데 궁금하던 건 다 들었다.
고생.
대체 무슨 고생을 한다는 걸까.
고민하며 가방에서 지갑을 꺼내는데 문득 눈에 들어오는 물건이 있었다.
저주인형 5만 원.
지푸라기로 만든 저주인형이다.
이상하게 자꾸 눈에 밟힌다.
내 시선을 눈치챘는지 무당이 하나를 꺼내서 내밀었다.
얼떨결에 받아 들었는데, 손에 착 감기는 것이 감촉이 무척 좋다.
“필요해 보이는데 하나 사가. 내가 만든 거야.”
저주인형을 내가 어디다 써.
그렇게 생각했는데 문득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그 재수 없던 천공 길드 영입 담당자.
으음, 아무래도 그 사람을 생각하며 인형을 푹푹 찌르고 싶지는 않지만 그래도 인형 자체는 좀 끌린다.
귀엽기도 하고.
하나쯤 사볼까.
결국 나는 저주인형도 사서 집으로 돌아왔다.
인형은 테이블 위에 대충 올려두고, 저녁을 먹으며 TV를 봤더니 어느새 잘 시간이었다.
하지만 나는 서지한과 무서운 영화 몇 편을 더 보고, 그에게서 놀림도 받다가 12시가 훨씬 지나서야 잠이 들었다.
어차피 백수에 할 일도 없으니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도 상관없었다.
보통 그렇게 잠들면 점심때쯤 깨어나거나 혹은 점심이 지나서 일어나는데, 내가 눈을 뜬 시간은 아직 한밤중이었다.
시간은 새벽 4시.
한 시간 정도 잤나?
시간은 또 왜 하필 4시야? 찜찜하게…….
화장실에 가고 싶어서 깼나?
아니면 물?
둘 다 아닌 것 같지만 깬 김에 물도 마시고 화장실도 가야겠다.
침대를 빠져나와 화장실로 향하던 나는 문득 이상함을 느꼈다.
뭔가 평소와는 다르다.
갑자기 등골이 오싹해졌다.
서지한은 어디 갔지?
“서지한 씨? 어디 갔어요?”
그러고 보니 내가 영혼석을 어디 뒀지?
평소에 늘 침대맡에 두고 자는데.
덕분에 눈을 뜨면 늘 서지한이 보였는데 지금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불안한 마음으로 비척비척 방을 나온 나는 소름 끼치는 광경을 보고 얼어붙었다.
저주인형.
분명 거실 테이블 위에 올려뒀던 저주인형이 창문 앞에 두 발로 우뚝 서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창 너머에서 들어오는 어슴푸레한 새벽 불빛 덕분에 낮에는 귀여워 보였던 인형은 괴기하게만 보였다.
뭐야. 뭐야. 뭐야.
뭐야, 이거!
“뭐, 뭐……."
너무 놀라서 말이 제대로 안 나온다.
그 와중에 더 초현실적인 일이 일어났다.
그 지푸라기 인형이 바스락바스락 소리를 내며 내 쪽으로 몇 걸음 걸어왔던 것이다.
“끄……."
패닉에 빠져 비명을 지르기 일보직전이었는데, 지푸라기 인형이 한 팔을 올려 나에게 인사하는 듯한 자세를 취했다.
그리고 동시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 잠깐, 놀라지 마. 나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