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43화 (43/231)

043화

게다가 내용도 굉장히 심플했다.

- 백광 길드의 일원으로서 던전 공략 및 작전 수행에 협조한다.

이런저런 곁가지 조항들이 몇 개 있긴 했지만, 주 내용은 이것 한 줄이다.

채집물 상납에 대한 내용도 없고, 활동을 강제하는 내용도 없다.

으음, 이렇게 자유로우니 어중이떠중이들이 모였다가 다 탈퇴하고 그랬구나.

뭐, 나는 귀찮지 않아서 좋긴 한데 대체 어떻게 길드 운영을 하는 거지.

“채집물 상납 조항도 없는데 길드 운영은 무슨 돈으로 하는 거예요?”

"전부 길드장 개인 재산이죠, 뭐.”

김 대리님이 어깨를 으쓱했다.

들으면 들을수록 이 길드가 곧 없어질지도 모른다던 말이 무슨 뜻인지 알 것 같다.

뭐, 상관없는 일이다.

길드가 사라질 무렵에는 나를 향한 언론들의 관심도 사그라졌을 테니.

그거면 충분하다.

길드 가입은 계약서에 가볍게 서명하는 것으로 끝났다.

굉장히 절차가 간단했다.

이후 대미지 측정 같은 과정을 추가로 거치긴 했지만 그것도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아, 그리고 두 분, 이거 받아주세요.”

나는 인벤토리에서 봉투를 꺼냈다.

예전에 카페에서 두 사람에게 받았던 돈 봉투다.

그날 이후 봉투에는 손도 대지 않고 고스란히 보관하고 있었다.

그것을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더니 두 사람이 당황한 얼굴로 손을 내저었다.

“모아 씨, 안 돌려줘도 괜찮아요.”

"맞아요.”

나는 고개를 젓고 돈 봉투를 두 사람 앞으로 밀어놓았다.

“제가 돌려드리고 싶어서 그래요.”

"우리야말로, 주고 싶어서 준 거니까……."

우리는 한참 동안 봉투를 사이에 두고 실랑이했다.

결국 돈 봉투는 다시 내 인벤토리로 고스란히 돌아오고 말았다.

두 사람이 같은 주장을 하니 도저히 이길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런 우리를 서지한이 또 흐뭇한 얼굴로 지켜보고 있었다.

아니, 왜 자꾸 그런…….

아무튼 나는 그렇게 백광 길드에 가입했다.

“와, 진짜 대단하네.”

너무 대단하다.

백광 길드 가입 후, 내가 사는 곳을 어떻게 알았는지 기자들이 나를 찾아왔다.

스위트룸에 묵고 있긴 하지만 호텔 자체의 급이 좀 떨어져서 그런지 정보가 샌 모양이었다.

바로 다음 날 호텔을 옮겼다.

이제 케르기스의 뿔을 먹을 필요도 없으니 일반적으로 묵는 스탠더드 룸을 빌렸다.

이러면 좀 시선을 피하기 쉬울 거라고 생각했지.

하지만 거기도 마찬가지였다.

체크인하고 6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서 호텔 로비에 기자가 찾아왔다.

결국 취재를 피하는 건 불가능했다.

그럼 작전을 바꿀 수밖에.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언론에서는 백광 길드를 일부러 언급하지 않는 것 같았다.

내 심증만은 아니다.

인터넷에 ‘백광 길드’라고 검색했더니 나온 기사는 손에 꼽는 개수였다.

그나마도 헌터 커뮤니티에 올라온 글들이다.

아무래도 윗선에서 백광 길드를 묻어버리려고 하는 것 같다.

서지한도 마찬가지 생각이라고 했다.

그리고 이런 경우가 생각보다 흔하다고 그랬지.

그렇다면 인터뷰에서 백광 길드에 대해 떠들어대면 어떨까?

만약 추측이 틀려서 백광 길드에 대한 기사가 흘러나가면 길드 홍보가 되어 좋고, 그 반대라도 좋고.

나는 바로 실행에 옮겼다.

‘천공 길드에서 가입 요청이 왔으나 거절하고 백광 길드에 가입했다.떠오르는 신예 길드이고 길드장도 사람이 좋은 것 같다. 신생 길드에 많은 헌터들이 오면 좋겠다.’

대략 이런 어감으로 인터뷰를 했는데, 결과는 상상 이상이었다.

천공 길드를 깎아내려서인지, 백광 길드를 칭찬해서인지 모르겠지만 내 인터뷰가 기사화되는 일은 없었다.

아무래도 높으신 분들에게 나의 의견이 꽤 거슬렸던 것 같다.

덕분에 나는 이제 더 이상 호텔에 머무르지 않고 집을 사서 지낼 수 있었다.

지금 지내는 곳은 서울 야경이 한눈에 보이는 고층 펜트하우스다.

기자들이 매일 찾아올 때는 주소지가 털릴까 봐 제대로 집을 못 구했는데, 이제 그럴 일이 없을 테니까.

이런저런 소동을 겪는 사이 아직 찬 기운이 남아 있던 공기가 어느새 봄의 따스함을 머금었다.

스치듯 사라지는 한국의 봄답게 벌써 햇볕은 여름을 머금고 아련하게 뜨거워지고 있었다.

그런 햇살 아래에서 나는 오늘도 서지한과 노닥거리고 있다.

“진짜 하나도 안 났어요. 저 인터뷰 몇 개 했죠? 여섯 개? 일곱 개?”

- 열 개 정도 한 거 같아.

“맞죠? 엄청 많이 했잖아. 그런데 기사가 하나도 없어요. 봐요, 최근 기사도 괌 던전 폭발 막았다는 이야기가 끝이잖아요. 근데 더 놀라운 게 뭔지 알아요?”

- 뭔데?

“이제 인터뷰 요청도 안 들어온다는 거. 와, 소름.”

내가 어깨를 감싸 쥐고 극적으로 몸을 떨자 서지한이 웃음을 터뜨렸다.

괌 이후로 우리는 부쩍 가까워졌다.

이유는 뭐, 한두 가지가 아니다.

솔직히 최근에는 가족보다 더 오래 붙어 있기도 했고, 그가 소문으로 듣던 것과는 정말 딴판이라는 것도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하지만 결정적인 계기는 역시 괌에서의 밤나들이다.

나쁜 짓을 공유하면 사람은 가까워지기 마련이니까.

- 이대로 묻히면 너한테는 좋은 거지.

“좋죠. 돈 많은 백수로 살게 될 텐데 괜히 관심 쏠리면 부담스럽다고요.”

- 백수는 아니지.

“이게 백수죠.”

길드에서 월급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출근을 하는 것도 아니다.

던전 공략 허가가 떨어질 때까지는 할 일 없이 노는 백수 신세인 것이다.

서지한의 말로는 허가가 떨어질 일이 없을 것 같다고 했으니 결국 나는 앞으로도 계속 백수가 될 예정이다.

그래도 최근 며칠 동안은 길드에 나가서 대미지 측정도 하고 차장님이랑 대리님과 수다도 떨고 그랬는데 그것도 이제 시들해졌다.

게다가 두 사람도 매일 출근하는 게 아니라 주 3일 출근이라고 했다.

높은 연봉에 주 3일 출근, 일도 없고 친한 전 직장 동료와 수다 떨며 일하는 환경.

사장인 길드장은 대책 없이 긍정적이긴 하지만 딱히 신경 긁는 성격이 아닌 데다 대부분 회사에 없음.

와, 예전의 나였다면 침을 뚝뚝 흘렸을 최고의 회사다.

망할지도 모른다면서도 두 사람이 계속 다니고 있는 이유가 이해가 간다.

“대미지 측정도 끝났고, 헌터 프로필 작성도 완료했으니까 같이 뛸 팀 정해지면 훈련만 몇 번 나오면 된대요.”

- 나갈 일 없겠군.

“그렇죠. 공략 허가가 떨어져야 팀이 꾸려지니까.”

대미지 측정기가 띄워준 내 랭크는 C급이었다.

손으로 쏘는 충왕포의 최대 출력이다.

머리로 쐈으면 더 셌을 텐데 좀 아쉽다.

그래도 아이템 덕분에 마력치가 올라가서 그런지 아슬아슬하게 B급 몬스터를 한 방에 잡을 수 있는 수준은 되는 것 같았다.

이보다 약했으면 B급 몬스터 어떻게 잡았냐고 의심을 살 뻔했는데 다행이다.

아이템을 빼고 쏘면 대충 D급 정도 뜰 것 같았다.

“그런데 저 C급 떴잖아요. 이거 센 거예요?”

- 그럭저럭. 대미지만 따지면 그 정도 헌터는 꽤 많이 있지. 하지만 중요한 건 대미지가 아니야.

“그럼요?”

- 빠르잖아. 마력계 헌터는 보통 힘 모으다가 죽거든.

“아. 그래서 머리가 아니라 손으로 쏘는 거 연습하라고 한 거예요?”

머리로 쏘면 화력은 올라가지만 그만큼 힘을 모으는 시간이 늘어난다.

머리로 쏘는 스킬이 추우우웅와아아앙포오오오오!라는 느낌이면 손으로 쓰는 건 충왕폿! 이런 느낌?

확실히 실전이었다면 추우웅하다가 죽겠구먼.

- 뭐, 여러 가지 이유로.

“으음, 그런데 서지한 씨는 대미지 랭크 몇이었어요?”

- 나? 각성하고 얼마 안 지나서 잰 기록밖에 모르는데.

“몇인데요?”

- SSS급.

“와.”

역시 랭킹 1위는 다르구나.

내가 솔직하게 감탄했더니 그가 뺨을 긁으며 어색하게 시선을 피했다.

- 크흠, 저때는 망자의 복수 스킬이 없었던 때라. 아마 망자의 복수 스킬 쓰고 하면 더 올라갈 거야.

“망자의 복수? 뭐였더라. 아, 그 악령 왕 실라기스 조각 먹고 얻은 스킬요? 신체에 받은 대미지를 합산해서 공격력 올려준다는 그 스킬?”

- 응. 실라기스 공략 때는 그래도 대미지가 크게 강하지 않아서 꽤 고전했는데, 케르기스는 거의 한 방에 잡았잖아. 그런 화력이 실라기스 때는 없었지. 아무래도 보스전에서 가장 중요한 건 대미지니까.

“그래요?”

아무래도 나는 경험이 거의 없는 햇병아리 헌터고 그는 헌터 생활만 5년 넘게 한 초창기 헌터라서 그가 해주는 말 하나하나가 여간 도움되는 게 아니었다.

그는 이 정도는 대부분 아는 상식이라고 했지만 아마 그렇지는 않을걸.

보스 공략 팁 같은 걸 아무나 알고 있지는 않을 것 같다.

- 그렇지. 공격이 통하느냐 안 통하느냐가 중요하니까. 케르기스도 내 일반 공격은 거의 안 먹혔어.

“그랬죠.”

나는 그와 케르기스가 한참 지루한 공방을 이어가던 광경을 기억해냈다.

저러다 먼저 지치는 쪽이 죽겠다 싶었고, 아마 그게 서지한이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결과는 케르기스의 사망이었지.

한 방이 있고 없고가 결과에 이렇게 큰 차이를 보여주는구나.

- 실라기스 공략 때는 보조계 헌터들의 공격력 증가 버프 등이 있어서 그나마 잡은 거야.

“그렇구나. 잠깐, 저한테는 보스 잡아달라고 했잖아요! C급 대미지 헌터한테 너무 심한 걸 요구하는 거 아니에요?”

- 지금이야 C급이지, 네가 언제까지 C급 대미지를 유지할 거라고 생각해? 당장 마력 증가 포션 도핑하고 머리로 쏘는 충왕포 날리면 A급 대미지도 뽑을 수 있을 걸.

“그래 봐야 A급이잖아요. SSS급은 넘어야 보스 몬스터에 상처라도 낸다면서요.”

- 다 방법이 있지. 궁금해? 우리 보스 잡으러 갈까?

서지한이 갑자기 능글맞게 씩 웃으며 속삭였다.

아니, 갑자기 말이 왜 그쪽으로 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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