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1 화
으아, 그냥 말 놓은 것뿐인데 뭐가 이렇게 민망해.
서지한이 말없이 서 있어서 더 이상한 분위기가 되고 있다.
저기요, 왜 그러세요.
“아, 뭐야. 진짜. 왜 부끄럽지. 하하.”
이 수습 불가능한 분위기를 타파할 겸 어색하게 웃었더니 더 민망해지는 것 같다.
그러자 가만히 서 있던 서지한이 팔을 들어서 천천히 얼굴을 가렸다.
이번에는 확실히 서지한의 귀가 살짝 불긋해져 있었다.
“저기요! 왜 그래요! 왜 얼굴은 빨개지는데요! 얼굴 가리지 마! 쑥스러워하지 마!”
- 너도 얼굴 빨개.
일부러 분위기를 식히려고 크게 말했는데 오히려 그 말에 얼굴에 열이 확 올랐다.
“아, 정말.”
팔락 팔락 손부채질을 하며 우리는 한동안 말없이 어색하게 걸었다.
그리고 결국 나는 반말을 포기했다.
나중에, 나중에 말 놔야지.
평소에는 속으로 야, 서지한하고 잘도 말하는데 왜 이렇게 부끄럽지.
아무튼 그러고 있으니 아까 있었던 천공 길드와의 기분 나쁜 일이 천천히 잊혀갔다.
대신 그 자리를 뒤늦은 울적함이 채웠다.
언론에서 떠들어대고 괌에서 칭찬이 자자하니 나도 모르게 좀 우쭐해졌던 모양이다.
내심, 어떤 길드라도 골라서 들어갈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결국 이게 냉정하게 본 현재 내 위치였다.
어쩌다가 운 좋게 큰일 좀 해서 매스컴을 타긴 했지만 딱 거기까지인 신인 헌터.
민간인들 사이에서야 대단한 존재겠지만 헌터들이 즐비한 거대 길드에서는 그저 회사의 회사원 하나 정도의 무게.
별것 아닌 톱니바퀴 하나.
“솔직히 모셔가는 수준은 아니더라도 환대할 줄 알았는데. 저도 자만했나 봐요.”
- 너 대단한 거 맞아. 내가 알잖아.남들이 어떻게 하든 신경 쓸 거 없어. 어차피 저 녀석들은 네 진짜 능력도 모르잖아.
서지한은 축 쳐진 내가 무척 신경 쓰이는지 어울리지 않게 안절부절못하며 잘하지도 못 하는 위로를 입에 담았다.
“그건 그래요. 하지만 역시, 이렇게 안하무인인 사람을 만나면 늘 기분이 저조해져요.”
- 강한 자에게는 약하고 약한 자에게는 강한 거지. 헌터 사회는 반쯤 동물의 왕국이나 다름없어.
한때 그 동물의 왕국 최고 정점에 있던 남자가 그렇게 말하니 어쩐지 좀 웃긴다.
- 그래도 잘 참았어. 화냈으면 좀 귀찮아졌을지도 몰라. 저쪽은 언론과 꽤 친하니까. 악의적인 헛소문 몇 개로 신인 헌터를 갉아먹는 건 손쉬운 일이지.
맞는 말이다.
내 능력을 믿고 마주 험한 소리를 해줄 수도 있지만, 역시 가족들이 맘에 걸렸다.
뒷일은 생각해야지.
늘 조심해서 나쁠 건 없다.
“사실 화도 안 났어요. 그냥 어이가 없었을 뿐.”
그때 마침 휴대폰이 울렸다.
차장님이다.
반가우면서도 갑자기 목구멍이 콱 막히는 것 같은 불편함이 들었다.
지은 죄가 있으니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차장님의 전화를 안 받을 수도 없어서 나는 조심스럽게 통화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차장님?”
-모아 씨, 여행은 잘 다녀왔어요?
언제나 한결같은 차장님의 목소리.
갑자기 신입사원 시절로 돌아가서 다른 팀 팀장에게 거하게 혼이 나고 돌아왔을 때 차장님이 다독여줬던 기억이 떠올랐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신입사원이 아니고, 같은 회사도 아니지만 어쩐지 그 시절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차장님……."
-무슨 일 있었어요? 목소리가 왜 그래요?
결국 나는 웅얼거리면서 방금 있었던 일을 미주알고주알 일러바쳤다.
차장님은 귀찮은 내색도 없이 가만히 듣더니 가볍게 웃었다.
-그쪽 길드 사람들이 좀 그렇긴 하죠. 그래도 다른 곳보다는 양반이에요. 대한 길드는 점잖은 척하면서 얼마나……. 어휴, 말도 말아요.
차장님도 무척 고생이 많으신 것 같다.
우리는 잠시 거대 길드를 욕하며 수다를 떨었다.
'아무튼 높으신 분들은 인간 덜 된 반편이들 뿐이라니까요. 그렇게 살다가 언젠가 매운맛을 볼걸요. 분명 친구도 없을 거예요. 에잉, 쯧쯧’같은 대화를 폭풍처럼 쏟아내고 나니 언제 울적했냐는 듯 마음이 확 가벼워졌다.
그래, 까짓 거 나중에 기회 되면 돼갚아주지 뭐.
천공 길드.
내가 기억해둔다, 이놈들.
그나저나 그 남자, 이름도 안 밝혔잖아.
자기소개도 안 하고. 아주 기본이 안 되어 있어.
생각할수록 별로네.
-그나저나 모아 씨, 전에 절에 다니던 게 생각나서 주변에 개인적으로 알아봤거든요.
“네? 절이요?”
차장님이 백광 길드 관련으로 전화를 했다고 추측하고 있던 참이라 이런 화제가 무척 뜬금없게 느껴졌다.
음, 하긴, 출국 전에는 그러고 있었지.
차장님과 근황을 주고받을 때 그런 이야기를 했던 것 같기도 하다.
-네. 사고 이후로 모아 씨가 심적으로 좀 안 좋은 것 같아서……. 모아 씨한테 도움이 될까 해서 주변에 수소문을 좀 해봤어요.
“아, 차장님……."
-아는 사람이 용한 무당집을 추천해줬는데, 거기가 그렇게 액막이를 잘한대요. 거기 가서 부적이라도 한부 쓰면 모아 씨 마음이 좀 편해지지 않을까요?
“그, 그렇죠.”
-거기가 어디냐면, 아니다. 내가 문자로 보내줄게요. 그럼 한번 가보고 나중에 따로 얼굴이나 한 번봐요. 아참, 각성 축하해요.
차장님은 산뜻하게 전화를 끊으려고 했다.
잠깐, 잠깐만요.
정말 용건이 그게 다예요? 잊으신 말이 있지는 않나요?
백광 길드에 가입하라든가.
뭐 그런 거.
하지만 결국 끝까지 길드 가입은 입에 올리지도 않은 채 전화가 뚝끊겼다.
나는 황당해서 전화기를 바라보다가 나를 가만히 응시하고 있던 서지한과 눈이 마주쳤다.
- 널 위해서 권하지 않은 거야. 백광 길드, 그런 군소 길드는 헌터 활동에 불리한 점이 많으니까. 혹시라도 섭섭하게 생각…….
“저 백광 길드 들어갈래요.”
그래. 답은 하나뿐이었다.
고민할 필요도 없었던 것이다.
예전 카페에서 만났을 때, 같이 일하고 싶다고 했던 차장님의 권유에 대답해줄 수 있어서 다행이다.
서지한도 희미하게 웃는 듯하더니 휴대폰을 향해 턱짓했다.
- 그럴 줄 알았어. 그럼 어서 말해야지.
결심은 섰다.
나는 바로 차장님에게 전화를 걸었다.
의아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모아 씨? 무슨…….
“차장님, 저 백광 길드 가입할 수 있을까요?”
수화기 너머에서 잠시 정적이 흘렀다.
반가워하실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차장님은 난감한 기색이었다.
-모아 씨, 말은 무척 고마운데 다시 생각해봐요. 우리 길드, 작기도 하고 헌터 생활하기에 크게 좋은 데 아니라서. 그리고 이건 모아 씨한테만 말하는 건데 최근 헌터들이 계속 탈퇴하고 있어서 곧 없어질지도 몰라요. 괜히 여기 가입했다가 나중에 다른 길드 갈 때 불이익받으면 안 좋잖아요.
“저 백광 길드 들어가고 싶어요.”
그 말을 들으니 결심이 더 굳건해진다.
몇 번 더 만류하던 차장님은 내가 막무가내로 가입하겠다는 말만 반복하자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알겠어요. 그럼 여기로 와줄 수 있어요? 위치는 파주에 있는 백광 빌딩인데.
“바로 갈게요.”
휴대폰으로 검색해보니 사진이 나왔다.
나는 그 사진을 보며 바로 연상형 공간이동 스크롤을 찢었다.
시야가 조금 흔들리더니 곧 물결처럼 흩어지고, 나는 어느새 사진 속 건물 앞에 서 있었다.
그런데 건물이, 좀 작네?
대한 길드의 사옥은 강남에 있는 50층짜리 건물이다.
공식적으로 수십조가 넘는 가격의 이 건물은 강남에서도 땅값이 비싼 곳에 지어진 데다 넓이도 어마어마했다.
천공 길드의 사옥 또한 강남에 있었는데, 30층짜리 건물 두 개를 사용하고 있다고 했다.
대한 길드와 마찬가지로 무척 으리으리하기로 유명하다.
셋 중 규모가 가장 작은 암현 길드조차 최소 30층 건물 하나는 가지고 있는데, 눈앞의 이 백광 길드 사옥은 작아도 너무 작았다.
대략 10층 정도 되어 보이는 작은 건물.
비교적 최근에 지었는지 깔끔해 보이긴 했지만 그게 전부였다.
그리고,
뭐야, 이 황량함은. 주변에 편의점 하나 없잖아.
“차장님. 저 지금 백광 길드 입구예요.”
-네? 어떻게……. 지금 내려갈게요.
그 말과 동시에 통화가 끊어졌다.
1층 로비로 들어오자 안내 데스크에 앉은 사람이 나를 흘끔거렸다.
방문자가 거의 없는지 휴대폰 게임 삼매경이다.
“모아 씨!”
곧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더니 안에서 차장님이 뛰어나왔다.
못 본 사이 좀 마르신 것 같은데.
“차장님!”
마주 부르며 후다닥 달려갔더니 차장님이 내 손을 꼭 잡았다.
“이렇게 먼 곳까지 와줘서 고마워요. 방금 귀국했을 텐데, 피곤하지는 않아요?”
“괜찮아요. 그보다, 차장님 제가 각성한 거 말 안 하려고 한 게 아니라……."
“아이, 됐어. 뭘 그런 걸로. 사정이 있었겠죠. 모아 씨가 어떤 사람인지 다 아는데.”
괜찮다고 하실 줄은 알았지만, 역시 그렇게 말해주시니 마음이 놓인다.
백광 길드다.
역시 백광 길드에 가입해야 해.
아까 그 천공 길드 사람과 비교하면 얼마나, 아니, 비교하기도 미안한 수준이다.
“차장님……."
내가 감격하자 차장님이 낯간지럽다는 듯한 얼굴로 손사래 쳤다.
“왜 울려고 그래요, 모아 씨. 아까 천공 길드에서 그렇게 심하게 굴었어요?”
“아니, 그건 아닌데……. 차장님이 계셔서 다행이에요.”
“어휴, 아직 막내라니까.”
짧게 한숨 쉰 차장님은 결국 팔을 벌려서 나를 안고 도닥여주었다.
혹 혹, 차장님. 무덤까지 따를게요.
"그런데 모아 씨……."
뭔가 할 말이 있는 듯하던 차장님이 안내 데스크에 앉은 사람을 흘끔거리더니 어색하게 웃었다.
“일단 올라가요. 서서 이야기할 수는 없으니까.”
고개를 끄덕이고 차장님을 따라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올라가는 내내 차장님은 거듭 가입을 다시 생각해보라며 나를 설득했다.
하지만 내 결심은 확고했다.
차장님이 여기 있다면, 나도 여기 몸담겠다.
“이쪽으로.”
복도는 무척 깨끗했지만 그만큼 조용했다.
인기척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사람이 아예 없는 것 같았다.
그래도 아무도 없는 건 아닌지 건너편에서 누군가 걸어오고 있었다.
아는 얼굴이다.
“모아 씨? 왜 여기 있어요?”
김수현 대리님이었다.
서류철을 들고 걷던 그녀는 나를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모아 씨 각성했잖아요. 그래서 우리 길드에 가입하러 왔대요.”
차장님의 말에 대리님은 눈이 튀어나올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왜? 왜 하필 우리 길드에?”
뭐지.
이 반응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