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0화
뭐지?
뭐야? 원래 이런 식으로 가입을 받는 건가?
이게 일반적인 거야?
이렇게 일방적으로? 나는 이제 민간인도 아니라 헌터인데?
혼란에 빠져 있자 서지한이 나직하게 설명했다.
- 길드에 가입해야 던전 공략도 할 수 있고, 제대로 된 헌터로서 활동할 수 있으니 길드들은 입맛대로 헌터를 가려가며 뽑는 편이야. 이렇게 먼저 제안을 하는 것만으로 아마 대단한 대접을 해 주고 있다고 생각할걸.
서지한의 말이 사실인지 바로 서명하지 않자 남자는 기분이 상한 듯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내가 계약서를 ‘읽어’보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와우.
“드물게 좋은 조건이니, 이쪽에 서명하면 된다.”
그 말과는 달리 계약서에는 걸리는 조항이 꽤 많았다.
예를 들어, 채집물의 5할을 길드에 지불하는 영혼 서약을 해야 한다든가.
서지한의 말로는 일반적으로 7할을 길드에 상납하도록 되어 있다는데, 그걸 생각하면 후한 조건이지만 나에게는 아니었다.
내 채집물의 5할?
그게 얼마나 어마어마한 양인지 알기나 하시는지.
어쨌든, 이건 거절이다.
“그, 너무 갑작스러워서요. 좀 생각해보고 연락드릴게요.”
충분히 상식적이고 예의 바른 수준으로 말했다고 생각했는데, 남자에게는 아닌 모양이다.
“생각해보고 연락 준다고?”
뜻밖의 말을 들었다는 태도였다.
그의 얼굴에 불쾌한 기색이 스쳤다.
건방진.
그 세 글자가 얼굴에 선명하게 떠올랐다.
- 일반적인 신인 헌터라면 이렇게 먼저 가입 권유를 해주는 것만으로 감격해서 바로 서명했을 거야. 공략에 있어서는 거의 일인자에 가까운 곳이니.
이렇게 무례한 태도를 보이면서도 오히려 나를 건방지다고 생각하다니.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그나저나 저 모습을 보니 알겠다.
마켓 관리자를 그만두고 길드로 소속을 옮긴 사람들이 왜 그렇게 성격이 나빠지는지.
물론 마켓 관리자들도 각성자 특유의 오만함과 타인을 무시하는 태도가 장착되어 있긴 하다.
하지만 길드에 가입한 진짜 ‘던전 공략 가능한 헌터’가 일반인들을 대하는 태도에 비하면 거의 천사나 다름없다.
그러니까, 거대 길드 소속 헌터들의 성격 더러움은 무엇을 상상하 든 그 이상이다.
지금까지 대체 어떤 과정을 거쳐서 사람이 저렇게 되나 의아했는데, 윗물이 저러니까 그런 거였군.
“그래, 연락을 기다리지. 아주 잘 생각해보고 연락 달라고. 손모아 양.”
어딘가 빈정거리는 어조로 그렇게 말한 남자는 계약서를 빼앗듯 가져가더니 나가도 좋다며 문을 턱짓했다.
내쫓기듯 밖으로 나왔더니 그저 황망한 기분이다.
뭔가, 도깨비에 홀린 것 같다.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와, 뭐 저런 인간이 다 있지?”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 처사에 내가 어처구니를 찾는 동안 서지한이 담담하게 중얼거렸다.
- 저 녀석도 최근에 들어온 것 같은데. 나도 모르는 얼굴이야. 신입이라 그런지 눈썰미가 없군.
“눈썰미만 없는 게 아닌 것 같은데요. 세상에, 어쩜 저렇게 예의가 없는지. 저 길드는 사람 뽑을 때 인성면접도 안 본대요?”
- 거대 길드 영입 담당이면 보통 연줄로 가는 곳이야. 권력을 휘두르러 가는 자리지.
“으으. 진짜 하나같이 반말 찍찍하면서, 어휴, 재수 없어. 높임말도 제대로 못 배웠나. 정말 저런 거 볼 때마다 못 배워먹었다는 소리가 저절로 나온다니까요.”
내가 치를 떨자 뭔가 말하려던 서지한이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그는 한동안 조용히 내가 하는 말들을 듣고만 있었다.
들어주는 사람이 있어서 그런지 말문이 한번 터지자 험담이 마구 쏟아져 나왔다.
“저런 거 하나하나가 사람 첫인상을 결정하는 건데. 싫어요. 정말. 저런 사람은 절대 좋아지지가 않더라고요. 으으.”
- 그렇게나?
“그럼요.”
내 단호한 대답에 서지한은 약간 충격받은 얼굴이었다.
뭔가 초조해하는 것 같기도 해서 나는 조금 어리둥절해졌다.
뭐지?
저 사람이랑 아는 사이인가?
아니지, 아까 모르는 얼굴이라 했잖아.
“응? 왜 그래요?”
- 아무것도 아니야.
잠시 뜸 들이던 그가 망설이며 한 글자를 덧붙였다.
- 요.
“네?”
뭐지, 방금?
내가 잘못 들었나?
서지한이 엄청나게 서툰 높임말 비슷한 걸 한 거 같은데.
바로 반문했지만 서지한은 입을 굳게 다물고 나를 외면했다.
기분 탓인지, 그의 색 없는 투명한 유령 피부가 목덜미까지 희미하게 붉어진 것 같다.
- 그렇게 싫어하는 줄은 몰랐어……요.
아니, 진짜 존댓말하고 있잖아.
“저기, 갑자기 왜 그래요?”
- 반말하는 사람 재수 없다며……요.
“에이, 뭐 됐어요. 처음에는 좀 그렇긴 했는데 이제 와서 이러는 거도 어색하고.”
영혼이 된 그와 만났던 순간을 생각하면 그런 사소한 부분을 신경 쓸 상황이 아니었지.
게다가 이 사람은 나보다 네 살이나 많은 랭킹 1위 헌터잖아.
이러니 저러니 해도 나를 구해주기도 했고.
그도 갑자기 유령이 되어 당황한 데다 경계심까지 가득해선 꽤 공격적인 태도였었다.
솔직히 충분히 이해할 만한 것이, 만약 내가 정신을 잃었다가 눈을 떠보니 웬 남자가 내 영혼석을 가지고 있으면 엄청 경계할 것 같거든.
나를 어떻게 할 셈인지, 이놈은 또 뭔지.
그걸 생각하면 서지한의 반응은 꽤 온건한 편이었지.
사실 종종 울컥하긴 했는데, 그렇다고 날 구해준 데다 나 때문에 이런 신세까지 된 연장자 상대로 똑같이 반말하는 건 좀 아닌 것 같다고 생각했다.
생각해봐.
어라, 너 이전에 랭킹 1위였긴 하는데 지금 존재감은 빔 프로젝터로 쏘는 영상만도 못한 상황이네?
살아 있는 상태였다면 제대로 말도 못 붙였을 급이신데 지금은 아무것도 아닌 게 되었으니까 편하게 반말할게.
괜찮지? 나 구해준 건 고맙다?
이런 느낌이잖아.
와. 쓰레기.
어디 사는 쓰레기야, 저건.
- 너도 방금 봤다시피 업계에는 저런 놈들이 잔뜩 있거든. 아무래도 기선제압을 해야 편해지는 곳이다 보니 점점 하대가 몸에 붙게 되어버렸어.
나는 정말 괜찮은데 서지한은 무척 신경 쓰이는 모양인지 계속 변명을 해왔다.
솔직히 나 따위가 어떻게 생각하든 코웃음이나 칠 것 같았는데 이렇게 구구절절 말하는 걸 보니 기분이 이상하다.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그가 나를 훨씬 더 신경 쓰고 있는 것 같아서.
“처음에는 좀 그렇긴 했는데, 지금은 뭐, 괜찮아요. 딱히 저 인간처럼 사람 무시하는 느낌도 아니잖아요.”
만약 서지한이 아니라 아까 그 천공 길드 인간의 영혼석을 얻었다면 아마 그 영혼석은 지금쯤 하수처리장을 떠돌고 있었을 것이다.
거기가 어울릴 것 같아.
- 그, 너도 말 편하게 해.
괜찮다고 해도 서지한은 몇 번이나 계속 권했다.
결국 나는 웃으며 슬쩍 장난을 쳤다.
“예? 제가 나보다 나이 많은 사람한테 반말 막 하는 예의 없는 사람인 줄 알아요? 사람을 서지한으로 보나, 어휴, 정말.”
- 너……. 방금 중간에 내 이름 넣지 않았어?
“네? 제가 언제요?”
황당하다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던 그가 결국 가볍게 웃어버렸다.
- 그나저나 헌터가 됐는데 지금처럼 계속 존댓말로 일관하면 귀찮은 일이 좀 생길 수도 있어. 말했다시피, 정글이나 마찬가지거든.
은근슬쩍 돌려서 하대를 권하는 그에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헌터 됐다고 사람들 막 대하고 그러기 싫어요. 좀 별로지 않아요? 급 나눠서 누구한테는 존대하고, 누구한테는 반말하고……. 친해서 편하게 대하는 거면 모를까 사람을 만만한 사람, 어려운 사람으로 구분해서 태도 바꾸는 거 보기 안 좋더라고요.”
회사에서 일하며 마켓 관리자들의 이중적인 처세를 봐온 소감이다.
나와 일반 직원들에게는 반말과 무시로 일관하지만 똑같은 헌터나, 헌터 업계 유명인에게는 깍듯해지는 모습이 어찌나 비굴해 보이던지.
그걸 볼 때마다 되뇌었다.
나는 절대 저러지 말아야지!
“그런 면에서 서지한 씨는 괜찮은 편이죠.”
- 뭐가?
“사람 안 가리고 모든 사람한테 반말하잖아요. 저 봤어요. 뉴스에서, 그 한참 높은 대한 길드 길드장에게 이놈 저놈 하며 욕하는 장면.”
- 아.
생각난 모양인지 서지한의 얼굴이 약간 붉어졌다.
- 그런 것도 방송했나?
“에이, 기억 난 얼굴인데. 모른 척하지 마요.”
아마 서지한은 자신의 위에 아무도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것 같지만.
“그리고 거리감 재기도 훨씬 편해요.”
- 거리감?
“보통 존댓말은 이런 거잖아요. 서로 선 넘지 말고 적절한 수준을 유지하면서 비즈니스적인 관계를 유지하자. 최대한 불편해질 일은 피하자.뭐 이런?”
- 비즈니스……. 나한테도 그런 건가?
“어, 좀 다르긴 하는데. 마냥 편한 사람은 아니죠?”
- 하루 24시간을 붙어 있는데도 내가 불편해?
“아니, 그 불편하다는 건 아니고.”
뭔가 말려드는 기분이라 쩔쩔매며 말을 고르는데 잠시 뭔가 생각하던 그가 나직하게 다시 입을 열었다.
- 해줘. 반말. 나한테도 편하게 대해도 돼.
“네?”
반말이라.
부담스럽게 왜 이러시나.
뭐, 원한다니 해주는 건 어렵지 않은데…….
아니, 솔직히 좀 어려운데.
갑자기 친근하게 대해 달라니.
그럼 호칭부터 바꾸면 되는 건가?
확실히 서지한 씨라는 호칭은 딱딱하긴 하지.
잠깐.
“지금 오빠라고 불러 달라, 뭐, 그런 거예요?”
내가 질겁하고 혐오스러운 표정으로 쳐다보자 서지한이 멍하니 서 있다가 뒤늦게 깜짝 놀랐다.
- 뭐? 아냐. 그런 게 아니라.
“와, 오빠 소리 들으려고 지금까지……."
- 아냐! 아니라니까!
"으으."
- 그냥 서지한, 지한이라고 불러. 그런 거 진짜 아니야!
기겁해서 부정하는 그 태도에 나는 일단 그와의 거리를 회복했다.
갑자기 허공을 혐오스럽게 쳐다보는 내 모습에 행인들이 이상한 눈길을 보내기도 했고.
“으음, 그런 거면 알았어요. 까짓 거 그러죠.”
큼큼. 나는 목청을 잠시 가다듬었다.
지한아. 지한아.
뭐, 이렇게 부르면 되는 거지?
갑자기 호칭을 바꾸려니까 좀 어색하고 부끄럽네.
쉽게 생각했는데 갑자기 막상 하려니 말이 잘 안 나온다.
서지한은 가만히 서서 내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 그. 이게 뭐 별거라고!
할 수 있다!
“그, 그래. 지한…… 아?”
이런 느낌으로 부르려던 게 아닌데.
뭔가 수줍음 타면서 새콤달콤한 뉘앙스로 그를 불러버렸다.
아니, 수줍음 타는 건 맞긴 하는데.
그게, 좀 다르다고. 그거랑 달라.
아니야! 이거 아니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