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8화
맛집으로 소문난 괌의 어느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나오는 길.
계산을 하러 카운터로 갔던 승주가 난감한 기색으로 쩔쩔매다가 터덜터덜 걸어왔다.
“또 안 받으신대?”
“응. 누나가 던전에서 구해준 사람 중에 저분의 숙모가 있다나 봐.”
어쩐지 식사하는 내내 주문하지도 않은 음식이 계속 나오더라니.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르겠다.
괌에서 여행하는 내내 우리는 거의 비용을 치르지 않고 있었다.
어디를 가도 내 얼굴을 알아본 가게 주인들이 한사코 돈을 받지 않으려고 했던 것이다.
호텔방에 쌓여 있는 선물로도 감사인사는 충분하건만.
한두 번도 아니고 번번이 이렇게 공짜로 놀고 먹으니 무척 난감했다.
게다가 나는 개인적으로 찔리는 부분도 좀 있고.
“그분들 성의가 그렇다면 감사히 받아야지. 감사 인사는 드렸고?”
"당연하지.”
승주의 대답에 엄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됐다.”
맛있는 음식을 배 터지게 먹은 덕분에 산책이 절실했다.
우리는 엄마의 의견에 따라 산책을 좀 해보기로 했다.
“햇빛 좀 봐. 이불 말리면 딱 좋겠다.”
“그러게.”
따듯한 햇살에 엄마는 무척 기분 좋아 보였다.
괌에 들어온 후 오늘로 6일째.
우리들의 여행은 나름대로 순항 중이었다.
첫날의 그 소동이 무색한 평화였다.
우리는 아직 괌에서 마련해준 호텔에서 묵고 있었는데, 괌 정부에서 그걸 원하기도 했고 꽤 편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사실 숙소를 빌미 삼아서 귀찮게 굴지 않을까 걱정했었다.
그러나 괌 정부에서 우리에게 연락을 한 건 딱 한 번 뿐이었다.
크리스텔 리가 미리 말했던, 아침에 간단한 진술을 해달라는 요청 말이다.
내심, 말이 간단한 진술이지 이것저것 심문하지 않을까 긴장했는데 돌아온 건 무심할 정도로 간단한 질문들이었다.
왜 입국했는지, 왜 던전에 들어갔는지, 던전에 특이사항은 없었는지.
대충 그런 수준이었다.
거의 입국 심사를 한번 더 하는 느낌이었다.
나의 대답은 여행, 동생을 구하러, 딱히 잘 모르겠음이었다.
그것을 마지막으로 괌 정부에서 우리에게 또 연락한 경우는 없었다.
아직 뉴스에서는 간간이 내 이름이 나오긴 하지만 그마저도 점점 뜸해지고 있었다.
어제는 괌 공항 재건축 입찰 경쟁에 대한 뉴스가 더 뜨거웠다.
- 괌 입장에서도 자국의 사고에 외국의 헌터가 영웅으로 등극하면 달갑지 않을 테니까.
생각지도 못한 정치적인 이유였다.
뭐, 나로서는 귀가 간지럽지 않아서 좋았다.
아무튼 덕분에 한국에 입국하기 전까지는 이런 느긋한 분위기가 이어질 전망이었다.
번호를 어떻게 알았는지, 내 휴대폰으로 쏟아지고 있는 취재 요청 연락들은 전부 무시할 생각이다.
아무래도 폭풍전야 같은 불안감이 없는 건 아니지만 가족 중 그 화제를 입에 담는 사람은 없었다.
“이렇게 말하면 배부른 소리 같겠지만, 랍스터랑 열대과일도 슬슬 좀 질린다.”
“그럼 저녁은 한식으로 먹지 그래?”
내 제안에 승주가 고개를 저었다.
“싫어. 한국 들어가서 생각하면 후회할 것 같단 말이야. 그때 좀 더 먹을 걸 하고.”
“다시 오면 되지.”
아무렇지도 않게 대꾸하자 승주가 뒤늦게 깨달은 얼굴로 눈을 크게 떴다.
“아…… 그럴 수도 있구나.”
아무래도 우리 가족들은 부자가 된 삶에 나보다 더 따라오지 못 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런 건 생각도 못해봤네.”
얼떨떨하게 중얼거리는 승주의 얼굴을 보자 몹시 짠한 기분이 들었다.
빨리 졸업할 생각에 휴학도 거의 못하고.
낮에는 장학금을 받으려고 공부하고, 밤에는 아르바이트.
시간이 없어서 친구도 많이 못 사귀었던 내 대학생활.
아마 승주의 학교생활도 나와 거의 비슷하겠지.
“원한다면 여기서 그냥 살게 해 줄 수도 있어. 일도 하지 말고 그냥, 느긋하게 서핑이나 하면서 말이야.그렇게 사는 거 어때? 엄마도. 괜히 한국 가면 취재다 뭐다 시끄러울 테니까, 나만 귀국하고. 세계 여행이나 다니면서 사는 거야.”
꿈같은 소리라고 생각하는지 승주와 엄마는 눈만 깜빡였다.
아무래도 실감이 안 나는 모양이다.
“지금 결정할 필요는 없어. 언제든 할 수 있으니까. 계좌로 돈도 보냈으니 쓰고 부족하면 말해.”
엄마와 승주에게 각각 10억과 5억.
이 이상의 금액을 보내면 수상한 취급을 받을 수도 있을 테니 일부러 금액을 조정했다.
사실 괌에서 내가 사용한 B급 마석의 보상으로 현금을 줬으면 했는데, 모양새가 좀 나쁘다고 생각했는지 괌 정부에서 보내준 것은 마력 능력치 상승 아이템이었다.
마석의 힘이 깃들어 희미하게 빛나는 월장석이 무척 예쁜 체인 형태의 팔찌였다.
이름은 지혜의 월장석 팔찌.
등급은 C급.
솔직히 외형은 내 취향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서지한이 준 반지보다 덜 화려하다는 점에서 좋았다.
서지한이 준 묵시의 청금석 반지는 이름처럼 위엄 있고 화려한 디자인으로, 마치 왕이나 낄 것처럼 투박하고 묵직했던 것이다.
그나마 내 손가락 크기에 맞게 좀 작아진 덕분에 간신히 일반 액세서리의 카테고리에 들 수 있는 수준이었다.
어쨌든 디자인과는 별개로 팔찌의 능력치는 무척 취향이었다.
무려 마력을 20이나 올려줬던 것이다.
‘와, 반지보다 두 배나 능력치를 올려주는데요?’
팔찌를 껴본 뒤 내가 무척 감탄했더니 서지한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몇이나 올려주는데?
‘이 팔찌, 마력을 20이나 올려줘요.’
……묵시의 청금석 반지가 힘을 겨우 10 올려준다고?
‘네? 겨우 10이라뇨?’
아무것도 아냐.
‘뭔데요?’
그가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묵시의 청금석 반지는 착용자의 기본 힘 수치를 기준으로 힘을 두배로 올려줘.
‘제 알림창에는 그런 말은 없었는데. 아, 최소치 조정인가 하는 말이 붙어 있긴 했어요.’
알고 보니 내 능력치 중에 힘 수치가 아예 없어서 반지의 본래 능력 대신 힘이 10 증가하는 데서 그쳤던 것이다.
이런 경우 일반적으로 아무런 효과도 못 받기 마련인데 반지가 워낙 뛰어난 아이템이라 10이라도 오른 것 같았다.
사실 이게 엄청 좋은 아이템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터라 막 끼고 다녔는데 길드 활동을 할 때는 빼고 다녀야겠다.
그렇게 대단한 아이템이면 누가 알아볼지도 모르잖아.
서지한은 청금석 반지가 제대로 된 능력을 발휘하지 못 하는 게 무척 아쉬운 눈치였지만 나는 반지 덕분에 생활이 몹시 편리해졌기 때문에 만족하고 있었다.
“누나는?”
생각에 빠져 있는 사이 승주가 갑자기 말을 걸었다.
앞 내용을 거의 듣지 못한 탓에 무슨 의미의 질문인지 파악하지 못 했다.
“응? 나 뭐?”
“못 들었구나. 저녁으로 엄마가 한식 괜찮은 것 같다고 했는데, 누나도 같이 갈 거지?”
서지한을 흘긋 보자 그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역시.
“아, 그건 안 되겠는데.”
"오늘 저녁도?”
“응.”
승주와 엄마의 걱정스러운 표정을 보자 가슴이 따끔거린다.
괌에 도착한 다음 날 저녁부터 나는 계속 가족 일정을 빠지고 있었다.
B급 몬스터를 잡느라 너무 무리한 탓에 몸 상태가 좋지 않으니 쉬어야겠다고 변명하긴 했는데, 어쩐 일로 아직 잘 통하고 있는 모양이다.
당연히 내 몸 상태는 멀쩡했다.
진짜 이유는 매일 저녁 괌 던전에 몰래 숨어들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머리로 쏘는 충왕포를 손으로 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특훈때문에.
괌 도착 둘째 날.
하루 내내 극진한 대접을 받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낸 뒤 호텔로 돌아와 잠자리에 들었는데, 서지한이 나를 조용히 깨웠다.
네가 말한 충왕포 조준에 대한 문제를 생각해봤는데.
‘무슨 말인지…….'
비몽사몽간에 들어온 뜬금없는 말이었다.
머리로 조준하다가는 인간 팽이가 될 거라고 했던 그거.
‘아, 제가 그런 말을 했던가요.’
했어. 그걸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어떻게요?’
질문하지 말걸.
내 말에 서지한은 대답 대신 씩 웃었고, 그 후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나의 야간 특훈이 시작되었다.
그날 이후 밤이 되면 나는 마켓에서 마력 증가 포션과 마력 회복 포션을 잔뜩 사서 몰래 던전으로 향했다.
잠에서 깬 가족들이 놀라지 않도록 침대에는 환영 스크롤로 만든 가짜 손모아를 재워놓고, 내 몸에는 투명화 스크롤을 쓴 채로.
서지한은 던전 근처에 투명화 감지 마력장이 아직 설치되지 않은 지금이 절호의 기회라고 했다.
괌 정부에서 본격적인 던전 관리에 들어가게 되면 출입을 제한하는 온갖 마력 시설들이 생겨나게 된다.
던전 생성 초기인 지금은 그런 시설물이 없어서 비교적 몰래 드나들기 편하다는 것이다.
뭔가, 이렇게까지 잘 알고 있는 걸 보니 꽤 많이 해본 눈치였다.
어쨌든 투명화 스크롤을 쓴 덕분에 헌터들이 지키고 있는 던전 입구도 수월하 게 통과했다.
그리고 마력 회복 포션을 마시고, 또 마시며 나는 매일같이 특훈에 매달렸다.
그러다가 동이 틀 무렵이면 다시 투명화 스크롤을 쓰고 던전을 나와서 몰래 호텔방으로 돌아왔다.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가진 힘은 최대한 숨기고, 쓸 수 있는 힘을 가능한 한 키워야지.
옳으신 말씀입니다.
하지만 눈이 왜 그렇게 빛나고 계시죠?
마치 저를 미래의 보스 몬스터 공략자로 만들려는 것 같은데요.
되게 즐거워 보이시네요?
아무튼 특훈 끝에 나는 드디어 아슬아슬하게 손으로 충왕포를 쓰는 데 성공했다.
비록 머리로 쏠 때보다 위력은 형편없었지만, 서지한은 오히려 그 정도가 나의 마력 수치에 걸맞은 위력이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단점만 있는 건 아니었다.
손으로 쏘게 된 만큼 확실히 조준이 편해졌다.
그리고 힘을 모으는 과정이 생략되고, 마법인데도 거의 즉시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대미지는 엄청나게 약해졌지만…….
손으로 쏘는 충왕포 특훈, 그리고 사냥으로 챙긴 온갖 던전 부산물에 괌 정부에서 선물해준 장비 아이템까지.
내가 그렇게 괌을 알뜰하게 털어먹은 후 마침내 귀국일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