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37화 (37/231)

037화

“아까 뉴스에서도 그랬잖아. 누나보고 강하다고.”

“그랬지……."

“길드 들어가서 던전에 간다고 해도 어지간해서는 위험한 일 없을 거야. 옛날이야 그랬지, 길드 생기고 난 이후부터는 죽는 사람도 거의 없다고 그랬어.”

“아예 없는 건 아니잖니.”

"어디든 위험한 행동 사서 하는 사람은 있잖아. 누나가 어디 그럴 성격이야?”

승주의 턱짓에 엄마가 나를 쳐다봤다.

나는 최대한 무해하고 해맑은 표정으로 엄마를 마주했다.

“어릴 때부터 겁이 많긴 했지.”

"그렇지?”

승주가 씩 웃으며 대꾸하더니 갑자기 나에게 한 마디를 툭 던졌다.

“근데 누나, 내가 안 했어요는 뭐야. 진짜 깼어.”

아니, 녀석이!

잘 가다가 갑자기 왜 이래!

당황해서 뭔가 대꾸하려는데, 영문을 모르는 엄마가 끼어들었다.

“그건 또 무슨 말이니?”

"아, 글쎄, 누나가 그 곰을 그렇게 잡더니 사람들이 쳐다보니까 ‘제가 한 거 아니에요’이러더라고. 너무 어이가 없어서 토씨 하나 안 틀리고 다 기억해. 다른 사람들도 황당했을걸?”

“야. 나도 당황해서 그냥 말이 튀어나온 거야. 그럴 줄 몰랐어. 스킬 쓴 거도 이번이 처음이었단 말이야.네가 다치니까 마음이 너무 급해져서.”

뭔가 더 놀리는 말을 할 것 같던 승주가 갑자기 조용해졌다.

그러더니 나직하게 말을 건넸다.

“고마워, 누나. 구해줘서.”

갑자기 이렇게 진지하게 나올 줄 몰랐다.

나는 순간 너무 어색해져서 몸 둘 바를 모르게 되었다.

“무슨 그런 말을 해! 가족끼리. 고마운 게 어디 있어.”

“헤헤, 솔직히 던전에서 누나 봤을 때 누나도 휘말린 줄 알고 깜짝 놀랐잖아. 근데 날 구하려고 뛰어든 거라니. 나 진짜 감동했어.”

가만히 내버려 두면 계속 낯간지러운 소리를 할 것 같다.

분위기를 좀 바꿀 필요가 있겠군.

“두 사람한테 줄 게 있어.”

나는 헛기침을 한 뒤 인벤토리를 열었다.

각성한 게 속 시원하게 밝혀졌으니 아이템 주는 걸 미룰 이유가 없다.

내가 인벤토리에서 이것저것 꺼내자 허공에서 갑자기 물건이 나타나는 게 무척 신기했는지 두 사람의 눈이 반짝였다.

“와, 누나 진짜 각성자 된 거 실감 난다.”

승주의 감탄을 한 귀로 흘리며 나는 꺼낸 아이템들을 테이블 위에 가지런히 늘어놓았다.

그리고 두 뭉치로 나누어 엄마와 승주 앞에 각각 밀어주었다.

“이거 받아. 하나씩 사용법 알려줄게. 앞으로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니까 몸 지킬 아이템 몇 개 준비했어.”

“비싼 거 아니야?”

“비싸지. 그러니까 잃어버리거나 다른 사람 막 주면 안 돼. 여기 B급 힐링 포션만 한 병에 10억이야.”

승주가 입을 쩍 벌렸다.

음, 옛날 생각나는군.

나도 저랬지.

“10억?”

“응.”

대충 대꾸하고 나는 가장 먼저 돌돌 말린 종이 스크롤을 집어 들었다.

“승주, 손바닥 이리 줘.”

기대 어린 얼굴로 승주가 오른손을 내밀었다.

나는 승주의 손바닥 위에서 스크롤을 찢었다.

그러자 손바닥 위에 지름 30센티미터 정도의 빛의 고리가 떠올랐다.

“엄마랑 승주는 인벤토리가 없어서 아이템을 잃어버릴 수 있으니까 그런 일이 없도록 준비했어.”

나는 테이블의 힐링 포션 한 병을 집어 고리를 통과시키며 그 너머의 손바닥 위에 내려놓았다.

그러자 포션 병이 승주의 손바닥에 흡수되더니, 작은 병 모양의 문양이 그 자리에 자그마하게 새겨졌다.

“우와, 뭐야! 신기해!”

나도 처음 써보는 아이템이라 진짜 신기했다.

하지만 동생 앞에서는 노련한 각성자처럼 행세하고 싶었기 때문에 애써 표정을 관리했다.

이어서 테이블 위에 있는 승주 몫의 아이템을 모두 빛의 고리 안으로 넣었다.

승주의 손바닥에는 제법 아기자기한 문양이 한가득 새겨졌다.

아이템을 모두 넣은 뒤 빛의 고리가 사라지자 승주는 제 손에 남은 문양을 계속 쓸어보며 즐거워했다.

“이제 꺼내는 법 알려줄게. 한 번 꺼낸 아이템은 다시 넣으려면 아까 사용한 스크롤이 필요하니까 꼭 필요할 때만 꺼내야 해.”

"응응, 알았어. 어떻게 꺼내는데?”

초롱 초롱한 눈빛이 쏟아진다. 근래 동생에게 받은 눈길 중 가장 빛나는 시선인 것 같다.

어흠, 갑자기 어깨가 쫙 펴지는 기분이다.

거 참, 별것도 아닌 거 가지고 놀라긴.

엇흠, 엣 헴, 크흠.

“여기 힐링 포션이 새겨진 문양을 꼬집어. 그리고 살짝 밖으로 당겨.”

내 말대로 순순히 작은 병이 새겨진 문양을 꼬집은 승주가 살이 당겨질 정도로 들어 올리자 그 손가락을 따라 손바닥에서 힐링 포션의 병 주둥이가 솟아올랐다.

놀란 승주는 눈과 턱을 크게 벌리고 나와 손바닥을 번갈아 보았다.

“이, 이거. 이거. 이거 어떡해, 누나. 내 손바닥에……."

“튀어나온 아이템 끝을 잡고 당기면 돼.”

내 말대로 병을 잡고 들어 올린 승주가 한 손에 힐링 포션을 쥐고 바보 같은 표정으로 나와 엄마를 응시했다.

그 얼굴이 너무 웃겨서 결국 나는 폭소를 터뜨렸다.

“아, 승주. 표정이, 진짜 미치겠다.”

“왜 웃어? 왜 웃냐고! 엄마, 솔직히 엄마도 신기하잖아. 엄마도 놀랐으면서! 아, 누나 그만 웃으라고!”

승주가 엄마에게 억울함을 호소했지만 엄마도 웃고 있었다.

결국 우리는 한참 동안 웃다가 승주가 해탈한 얼굴로 한숨을 쉴 무렵에야 웃음을 멈췄다.

“흠흠, 다른 아이템도 설명해줄게.”

내가 준비한 아이템은 모두 서지한의 조언에 따라 구매한 것이었다.

비상용 아이템이니까 모두 등급이 높은 것으로만 준비했다.

사실 나는 어떤 아이템이 존재하는지도 잘 몰라서 기껏해야 탈출석과 힐링 포션 정도를 떠올렸을 뿐이다.

하지만 서지한은 좀 더 다양한 상황을 대비하라고 조언했다.

“이건 힐링 포션 10병 묶음, 그리고 이건 10인용 탈출석이야. 부수면 게이트가 생기니까 혹시 다른 사람들과 던전에 휘말리면 써. 무제한 탈출석은 매물이 없어서 못 샀어.그리고 1인용 탈출석은 부수면 본인만 이동되는 거야. 2개씩 줄게.”

엄마와 승주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확인하고 나는 다시 설명을 이어갔다.

“이건 연상형 공간이동 스크롤. 5장이야. 목적지를 떠올린 상태로 찢으면 거기로 이동하게 돼. 혹시 몰라서 준비했고, 이 목걸이는 지금 목에 하나씩 걸어. 충격 보호 목걸이인데, 피부가 찢기거나 몸이 상할 정도의 충격을 받으면 겉에 단단한 방어막을 형성해줘. 일회용이니까, 방어막이 생기면 바로 공간이동 스크를 찢어서 위험한 곳에서 도망쳐.”

두 사람이 목걸이를 거는 것을 확인하고 나도 하나 걸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한테 아이템 받은 건 비밀이야.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고, 힐링 포션 정도는 말해도 되지만 다인용 탈출석은 절대로 말하면 안 돼.”

힐링 포션은 몰라도 다인용 탈출석은 갓 각성한 초보 헌터가 마구 살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혹시 들키더라도 수왕류 던전에서 얻은 아이템을 모두 처분해서 마련했다고 둘러대면 되지만, 그래도 숨기는 게 좋겠지.

두 사람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확인하고 승주가 아직도 손에 들고 있는 힐링 포션을 가리켰다.

“너 그거 마셔. 발목 다쳤다며. 엄마도. 일부러 문양으로 새길 열 병 외에 한 병씩 더 샀어.”

담담하게 말했더니 승주가 경악해서 펄쩍 뛰었다.

“뭐? 미쳤어? 이거 10억이라며!”

"그거 이제 누나한테 아무것도 아니야.”

진심이다.

이미 두 사람에게 준 아이템 가격만 합산해도 천억이 넘었다.

10억짜리 힐링 포션이야, 10인용 탈출석 가격에 비하면 껌 값이지.

그렇게 많은 아이템을 샀는데도 아직 내 인벤토리에는 남은 아이템이 많다.

사실 팔려면 더 팔아서 현금으로 만들 수도 있었는데 그냥 관뒀다.

괜히 현금을 많이 가지고 있어 봐야 인벤토리 공간만 차지하지.

일반적으로 인벤토리는 약 천 리터 정도 되는 공간이다.

그러니까 대충 커다란 양문 냉장고 정도의 용량이었다.

겨우 이 정도밖에 안 되는 공간에 내 방을 부술 정도로 거대한 케르기스의 뿔 같은 것을 넣을 수 있는 이유는 인벤토리에 들어간 던전 아이템은 모두 작아지기 때문이다.

심지어 종류가 같다면 겹쳐지기까지 한다.

아, 겹쳐진다는 건 만약 내가 가르니드의 잎사귀를 백 장 가지고 있더라도 가르니드 잎사귀 한 장 어치의 부피만 차지하고 그 옆에 X100 이라고 쓰여 있는 형태로 수납된다는 뜻이다.

다만, 이 편리한 규칙은 던전 출신 부산물이나 장비 아이템에만 적용되었다.

즉, 내가 가지고 있는 현금이나 현대의 물건들은 원래 크기 그대로 인벤토리에 수납된다는 말이다.

만약 현대의 물건도 던전 아이템처럼 부피가 줄어들거나 겹쳐졌다면 아마 물류업의 신 지평이 열렸겠지.

아무튼 이런 상황이니 부피가 줄어들지도 않는 현금을 잔뜩 가지고 있는 건 여러모로 불편했다.

게다가 아이템으로 돈을 구하는 건 언제든 가능하지만 돈으로 아이템을 구하는 건 상대적으로 까다롭다.

애초에 던전 아이템은 공장에서 찍어내는 물건이 아니라 수렵과 사냥, 수동 채집으로만 얻는 물건이다 보니 물량 자체가 풍족하지 않았다.

가끔 매물 자체가 없을 때도 있고.

던전 개수가 지금보다 적던 시절에는 아이템 가격도 훨씬 비쌌지.

힐링 포션 같은 필수 아이템은 공급이 너무 부족해서 돈이 있어도 못 사던 시절도 있었다.

“와, 누나 너무 멋있는데 좀 재수 없기도……."

아니, 요 녀석이 거금 들여서 탈출 세트를 마련해줬더니.

“야.”

“아, 농담이야, 농담.”

"알아.”

티격태격하는 우리를 엄마는 내내 잔잔한 미소를 지은 채 응시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서지한도 비슷한 표정이었다.

엄마는 그렇다 쳐도 댁은 왜……?

아무튼, 그날 우리는 아주 늦게 잠들었다.

커다란 침대에 가족 셋이 손을 꼭 잡고.

물론 서지한은 혼자 응접실 거실 소파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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