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6화
그때는 에비타니스의 핵이 아니라 라니아드의 핵을 판매하긴 했지만.
그것도 S급이었을 테니.
그 판매 기록을 알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루터를 충왕류 던전 생성 이전에 각성한 헌터로 추측하겠지.
아무튼 아이템 세탁 방법을 알았으니 행동에 옮길 차례다.
인벤토리를 열자 보기만 해도 뿌듯한 수량의 아이템들이 나를 반겼다.
가장 많은 건 가르니드의 잎사귀였다.
와, 이게 다 몇 장이야.
인벤토리의 아이템을 둘러보며 나는 던전에 남아 가르니드를 채집하던 때를 떠올렸다.
나무 하나를 채집했을 뿐인데 인벤토리를 열어보니 뭐가 엄청나게 많아서 깜짝 놀랐지.
‘이 나무, 나뭇잎 되게 많이 주네요?’
음, 50에서 200장 정도? 일반적으로 꽤 많이 주는 편이야. 그래서 힐링 포션이 그렇게 저렴하게 팔릴 수 있는 거지.
당시 서지한이 했던 말에는 여러모로 반박할 부분이 많았지만, 나는 일단 힐링 포션에 대해서부터 말했다.
‘10억짜리 힐링 포션이 저렴하다고요?’
미국에서 외과 수술을 받으면 그게 무슨 수술이든지 간에 기본적으로 얼마를 지불해야 하는지 알아? 어떤 외상이라도 후유증 없이 단번에 낫게 해주는 아이템인데, 그 정도 가격이면 저렴하지.
‘하긴.’
나는 서지한의 말에 납득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효과를 생각하면 저렴하긴 하지.
그나저나.
‘근데, 50에서 200장이요?’
응. 꽤 많이 주지?
‘저 방금 3,000장 좀 넘게 들어왔는데요. 가르니드의 잎사귀.’
그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그리고 어딘가 마음에 안 드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진짜 사기야. 그 스킬.
아무튼 덕분에 내 인벤토리에는 현재 백만 장이 넘는 가르니드의 잎사귀가 있었다.
모든 가르니드가 3천 장의 잎사귀를 준 건 아니고, 나무의 크기에 따라 2천 장에서 5천 장 정도 차이가 있었다.
큰 나무는 그만큼 많은 잎사귀를 가지고 있을 테고, 작은 나무는 적게 가지고 있을 테니 그런 차이가 있는 것 같다.
대략 4백여 개쯤 되는 가르니드의 핵과 그만큼의 가르니드 부산물.
F급 수왕류의 마석 36개와 E급 수왕류 마석 6개.
몬스터 부산물은 나중에 처리해야지.
사실 가르니드의 잎사귀가 워낙 많아서 이것만으로도 필요한 아이템 대부분은 다 살 수 있을 것 같다.
“어디 보자. 가르니드의 잎사귀가 필요한 사람이 꽤 많네요?”
마켓을 열어 둘러보며 말하자 서지한이 대답했다.
- 힐링 포션 외에도 사용처가 꽤 많아. 대부분의 식용 아이템 제작에 베이스로 들어갈걸. 제작계 헌터가 아니라서 정확한 건 아냐.
정확하지 않아도 그 정도로도 충분히 도움된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서지한이 알려준 대로 아이템 세탁을 시작했다.
가르니드의 잎사귀로 요걸 사고, 요걸 다시 팔고.
이걸 판 것으로 다른 아이템을 사고, 다시 그걸 팔고.
그런 식으로 반복하자 루터라는 닉네임으로 매우 다양한 종류의 아이템을 판매하게 되었다.
이 정도라면 내가 충왕류와 수왕류 아이템만 판매했다는 의심을 피하기 충분할 것 같다.
게다가 아직은 수왕류 던전 부산물을 마켓에 등록하지 않았다.
공식적으로 루터라는 인물은 수왕류 던전에 간 적이 없는 것이다.
가르니드의 핵은 나중에 다른 던전 몇 개를 출입한 다음 순서를 뒤바꿔서 판매하면 특정될 일이 없을 것 같다.
그렇게 아이템을 세탁하며 나는 서지한의 조언을 받아 가족들의 몸을 지킬 만한 아이템도 몇 개 사들였다.
꽤 많은 아이템을 사고팔았는데도 내 인벤토리에는 아직 많은 아이템이 남아 있었다.
겨우 반나절 채집한 것이 이 정도라니.
서지한의 말로는 어지간한 길드 하나를 당분간 운영할 수 있을 만한 물량이라고 한다.
정말 무지막지한 양이긴 했다.
이런 능력을 전투능력도 없는 상태에서 들켰다면 진짜 채집 노예 인생 직행이었을 것이다.
물론 지금도 안심할 수는 없지만.
절대,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히든 스킬은 들키지 말아야지.
제발 힘내라, 나의 하찮은 거짓말 능력아.
만약 꼬리라도 밟히면 나의 연기력으로 그 의심을 지우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니 애당초 의심받을 일이 없도록 최대한 노력하는 수밖에 없었다.
- 끝났으면 나갈까?
서지한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욕실에서 나오자 테이블에 앉아 있던 승주가 아는 척을 했다.
“큰 거야? 환풍기 돌려, 누나.”
안에서 좀 오래 있긴 했으니 그렇게 생각할 법도 하지.
하지만 서지한이 보고 있는 와중에 듣기에는 좀 민망한 소리였다.
“그런 거 아니야.”
무심한 척 대꾸하면서 승주와 엄마가 앉아 있는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솔직히, 각성 사실을 알고 난 후에도 나를 대하는 태도에 변함이 없는 가족들이 무척 고마웠다.
우리 가족들이 뭔가 나쁘게 행동할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막연하게 좀 불안했던 것이다.
당장 욕실에서 잠깐 들여다 본 휴대폰에는 졸업 후 단 한 번도 연락이 없던 사람들이 친한 척하는 메시지가 가득했다.
물론 그 와중에 차장님과 대리님한테는 아무런 메시지도 없어서 도리어 마음이 불편해졌지만.
에잇, 이 문제는 일단 나중에 생각하자.
내가 삼일 밤낮 야근해야 하는 사고를 쳤을 때도 별말 없이 ‘그럴 수도 있죠’하고 넘어가 줬던 사람들이다.
손모아가 발모아가 되도록 싹싹 빌면 용서해주시겠지?
그전에 일단 가족들부터 어떻게 해야겠다.
“그, 이게 어떻게 된 거냐면…….근데 너 뭐 먹어?”
어떻게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지 헛기침을 하며 운을 떼는데 무언가를 우물거리고 있는 승주와 엄마가 눈에 들어왔다.
“체리.”
입을 아 벌린 승주가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체리인지 뭔지 알아볼 수 없는 형태로 으스러진 음식물에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안 보여줘도 돼.”
"누나도 먹어. 배고파서 선물로 온 과일바구니 하나 뜯었어. 엄청 맛있네. 비싼 건가 봐.”
그 말대로 체리는 거의 자두에 가까운 크기였다.
같이 포장되어 있는 망고나 포도, 키위 따위의 열대 과일도 최고급 수준으로 크고 싱싱했다.
그러고 보니 이게 케르기스의 뿔을 먹고 나서 처음으로 먹는 제대로 된 음식이구나.
그제야 잊고 있던 허기가 몰려왔다.
나뿐만이 아니라 밖에서 애태우고 있었을 가족들도 배가 많이 고팠겠지.
우리는 한동안 말없이 과일을 우물거리며 배를 채웠다.
“이제 어떡할 거니.”
어느 정도 배가 찰 무렵, 엄마가 조용하게 물었다.
예상 못한 질문이었다.
언제부터 각성했느냐, 어떤 능력이 있느냐 같은 말에 대답할 준비만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허를 찔린 기분이다.
애초에 엄마는 내 능력 따위는 궁금하지 않은 듯했다.
한쪽에 틀어져 있는 TV에서는 아직도 내 이야기를 하는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앞으로 많은 것이, 정말 많은 것이 바뀔 것 같다는 느낌.
이 느낌을 나만 받고 있는 것은 아닌 모양이다.
나는 가족들의 표정에서 희미한 불안을 읽었다.
“글쎄. 일단 길드에 가입해서 헌터로 활동해야 하지 않을까?”
사실 나도 잘 모르겠다.
막연하게 전투 능력을 갖추면 조금 더 안전해질 거라고 생각해서 케르기스의 능력을 계승한 것이지, 전투 헌터가 되어서 본격적으로 뭘 해보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
괌 던전 생성 폭발이 아니었다면 아마 적당히 헌터 등록을 하고 각성한 듯 안 한 듯 평범하게 살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만큼이나 이름이 알려진 이상 그런 평온한 일상을 기대하면 안 될 것 같다.
아까도 한국에서 취재팀을 꾸린다고 하지 않았던가.
생각만 해도 피곤해지는 기분이다.
매일매일 집으로 찾아오는 기자들.
가십거리로 전락하는 가족들의 일상을 상상하자 악몽이 따로 없었다.
그러니 가족들을 세간의 관심에서 차단하기 위해서라도 내 뒤를 봐줄 소속은 필요했다.
길드에 들어가면 내 신변에 대해서는 길드 차원에서 법적으로 대응해주겠지.
그럼 혼자서 사람들의 관심에 휩쓸리는 것보다 훨씬 나을 것이다.
“던전에 들어가서 싸우려고?”
"아마도.”
“그건, 위험하잖니.”
차분하게 말하고 있긴 했지만 엄마는 내가 전투계 헌터로 사는 게 싫은 것 같다.
그럴 만도 하다.
승주를 구하려고 뛰어갈 때 본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던 엄마의 표정을 생각하면 아직도 약간 눈물이 날 것 같다.
“좀 하다가 그만두려고. 언론에서 막 덤빌 텐데 길드에 가입 안 하면 어떻게 감당해. 사람들 관심 좀 식을 때까지만이라도 길드 들어가 있는 게 좋을 거야.”
“그건 그래, 엄마. 그리고 진짜 걱정할 필요 없어.”
승주가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다.
그리고 조금 과장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엄마가 못 봐서 그렇지, 누나가 얼마나 센데! 거기 다른 헌터들도 많았거든? 사람들이 막 쫓기니까 그 사람들이 도와주고 그랬어. 근데 그런 사람들도 커다란 곰이 나타나니까 아무것도 못하더라고.”
잘한다. 더 해라, 더 해.
“헌터고 민간인이고 다들 표정이, 막 이래서. 다 죽었다고 생각했거든? 그 곰이 바닥을 막 치니까 사람이 막 굴러가고 넘어지는데, 근데 누나가 그 곰을 딱 노려보는 거야.”
그랬던가?
기억이 잘 안 난다.
하지만 지금 이 시점에 승주가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짐작이 갔기 때문에 나는 말없이 듣고만 있었다.
“그리고 뭐가 쾅하고 번쩍 하더니 그 곰이 한 방에 죽었다니까? 찍소리도 못 하고! 다른 몬스터들도 누나한테 겁먹고 다 후다닥 도망치는데.엄마가 그걸 봤어야 했어. 진짜!”
"그, 그래?”
호들갑 떨며 말하는 승주 덕분에 엄마는 약간 누그러진 표정이었다.
얼떨떨해하는 것 같긴 했지만.
아마 본인의 딸이 그렇게 강하다는 걸 믿을 수 없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