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33화 (33/231)

033화

터무니없는 소리에 나는 기겁했다.

“설마요.”

- 이번 전투로 자신감 좀 생기지 않았어?

“그럴 리가요. 아까 떠는 거 봤으면서.”

서지한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무언가 생각하는 듯 가라앉은 그 얼굴을 흘끔거리다가 나는 변명하듯 입을 열었다.

“이번 건 운이 좋았어요.”

- 운이 좋았다고?

“당연하죠. 그 곰이 방심하고 있었으니까 그래도 잡은 거예요. 아까 못 봤어요? 땅 내리치니까 다들 제대로 서 있지도 못 하고 굴러다니던 거?”

- 으음.

“걔가 계속 그 짓만 반복했어도 저는 제대로 서 있지도 못 했을 거예요. 그 상태로 스킬을 써도 빗나갔을 가능성이 높고. 게다가 그놈, 몸놀림도 엄청 빨랐잖아요. 땅 두드리다가 바로 뛰어와서 저를 공격했으면 대처하기 곤란했을 걸요.”

- 그래? 계속해봐.

기분 탓인지 조금 즐거운 얼굴의 서지한이 눈을 빛내며 대답했다.

또 왜 이렇게 신이 났어?

아, 전투 이야기해서 그렇구나.

아무튼 이 싸움에 미친 인간…….

나는 혀를 차고 싶은 것을 참고 서지한이 원하는 대로 싸움 이야기를 잔뜩 해주기로 했다.

“게다가 손이 아니라 머리로 쏘는 스킬이니 조준하기도 힘들다고요.이번에 사람이 안 다친 건 진짜 운이 좋았던 거예요. 그리고 힘 조절을 못했다곤 해도 자주 쓸 수 있는 스킬은 아닌 것 같아요. 저놈들도 그걸 알고 도망갔다가 바로 떼를 지어 왔잖아요.”

- 응응, 그래서?

서지한은 옅게 미소 짓고 있었다.

싸움 이야기가 그렇게 좋냐.

진짜 천성이 전투계 헌터다.

“아까 그 B급 몬스터 같은 강력한 단일 개체를 공격하는 데는 좋지만, 수십 마리가 산개해서 덤비면서 한두 마리를 제물로 삼고 나머지가 저를 쳤다면 절대 못 이겼어요.”

- 충왕포만으로는 그렇지.

“저놈들도 그걸 알고 도망갔다가 다시 돌아왔잖아요. 결과적으로, 이렇게 충왕뇌우에 다 죽긴 했지만.”

- 그럼 된 거 아니야? 충왕뇌우만 있으면 어딜 가든 무서울 게 없잖아.

서지한이 태평한 소리를 했다.

“되긴요. 여기 죽은 몬스터들, 다 F급이랑 E급 몬스터들이에요. B급은 보이지도 않고 C급만 되어도 맞고 좀 다친 상태로 도망쳤다고요.충왕뇌우는 B급한테는 안 통해요.충왕포는 통하지만, 작정하고 피하면 맞출 자신 없어요. 이마로 조준하다가는 인간 팽이가 될걸요.”

E급 몬스터인 그 늑대들도 그렇게나 빨랐는데 B급 몬스터가 제대로 움직이면 얼마나 빠를지 상상하기도 싫다.

보나 마나, ‘앗, 여기 있었는데! 아니, 언제 저기로 갔지! 이쪽인가!아니었나! 잠깐만 가만히 있어봐!’같은 덜떨어진 소리를 연발하며 충왕포를 조준하느라 고역을 치르게 되겠지.

잠깐, 나도 눈치챈 이런 사실을 노련한 전투계 헌터인 서지한이 모를 리가 없다.

뭔가 유도당한 기분인데.

이상한 느낌에 고개를 드니 흐뭇한 얼굴의 그가 더 해보라는 듯, 마치 박수라도 칠 것 같은 기세로 웃고 있었다.

아니, 기특해하지 말라고.

“저기, 서지한 씨. 지금……."

왠지 좀 놀림당한 느낌이다.

뭔가 한마디 하려고 입을 여는데 눈치 빠르게 그가 내 말을 끊었다.

- 솔직히 좀 놀랐어

“뭐가요?”

약간 볼멘소리로 부루퉁하게 대꾸했더니 그가 생긋 웃었다.

- 그렇게까지 분석할 수 있을 줄은 몰랐거든. 네 말대로 너는 이게 첫 전투잖아.

“겁쟁이는 신중하니까요.”

- 보통 이런 식으로 성공적인 데뷔전을 치르면 우쭐해져서 무모해지는 헌터가 많아. 전에 충왕류 관절을 옆에서 쳐서 부순 것도 그렇고, 기본적인 전투 센스는 나쁘지 않은 편이야.

아, 뭐지.

갑자기 왜 칭찬이람.

이렇게까지 직설적인 칭찬을 들으니 얼굴이 간질간질해진다.

보지 않아도 광대가 치솟고 있을게 분명했다.

이거 참, 쑥스럽구먼.

전투계 랭킹 1위가 나더러 전투 센스가 나쁘지 않대요.

“성공적이었어요?”

결국 헤헤 웃는 얼굴을 통제하는데 실패하고 잔뜩 들떠서 묻고 말았다.

- 이 정도면 엄청나게. B급 몬스터를 한 방에 잡았잖아. 확실히, 드물지.

서지한이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거기에 그치지 않고 다시 입을 열었다.

- 강력한 단일 공격, 그리고 광역 공격 스킬을 둘 다 가지고 있다는 것 자체로 마력계 전투 헌터 중에는 손에 꼽힐 만큼 좋은 스킬 조합을 가지고 있는 거야.

계속 칭찬을 들으니 기분이 좋긴 한데, 마냥 태평하게 ‘나 엄청 세다.으하하’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냉정하게 말해서 단점이 없는 건 아니잖아.

“근데 많아 봐야 두 번 쓰면 탈진한다는 게 문제죠. 실전에서 이래도 돼요? 두 번 공격하고 아, 저 힘들어서 쉴게요. 이렇게 해도 되는 거예요?”

진지한 걱정이었는데 서지한은 별일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 뭐, 아이템의 도움을 받으면 되니까.

“으음. 그래도 스킬 조합 좋다는 건 인정해요. 거의 전투 문외한인 제가 이만큼이나 활약한 것도 스킬이 좋아서니까.”

- 좋긴 하지. 마력 능력치가 이렇게 낮은데 이 정도 위력을 보이는 것도 스킬 등급이 워낙 높아서니까. 다시 말하지만, 조합도 좋고. 이런 고등급 광역, 단일 마력 스킬을 둘 다 가지고 있는 건 내가 알기로는 유은담 정도뿐이야. 해외에는 더 있을지도 모르지만 해외 헌터는 잘 몰라서.

“유은담? 어디서 많이 들어봤는데.”

- 전투계 랭킹 3위. 철은 좀 없지만 나쁜 놈은 아냐. 전투 센스도 좋고.

그 설명에 나는 어렴풋이 한 남자를 기억해냈다.

마치 아이돌같이 예쁘장한 얼굴에 발랄하고 통통 튀는 말투.

진짜 연예인처럼 현란한 머리색과 옷차림을 하고 있어서 헌터인데도 개인 팬클럽이 있다던가.

TV 출연도 자주 하고 개인적으로 스트리머 활동도 하고 있어서 대중적으로 많이 알려진 헌터였다.

마치 군인을 보는 것 같은 서지한과는 정 반대 지점에 서 있는 느낌이다.

그래서 서지한이 그를 좋게 평가한 게 좀 의외였다.

안 맞을 것 같은데.

“친해요?”

- 얼굴은 아는 사이지. 악령 왕 실라기스를 잡을 때 같이 싸우기도 했고.

“신기하네요.”

- 귀여운 놈이야. 형, 형 하면서 따르는 게 붙임성도 좋고.

“랭킹 2위는요?”

고랭 커들은 모두 안면을 트고 지내나 싶어서 별생각 없이 던진 말이었는데 서지한의 얼굴이 굳었다.

안 친하구나.

“그, 사이 안 좋아요? 그 사람 성격 별로예요? 굳이 말 안 해줘도 괜찮아요.”

- 아니. 성격은 좀 안 맞지만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야. 아니, 솔직히 좀 나쁜 편이지.

떨떠름한 서지한의 얼굴을 바라보며 나는 랭킹 2위의 프로필을 떠올렸다.

반서후.

별명은 무패의 남자.

공격 흡수와 광역 방어 가능, 동시에 자가 재생 능력을 가지고 있고 어마어마한 체력 능력치와 마력 능력치를 기반으로 끝없이 회복하며 싸우는 헌터.

그가 강해서 무패의 남자라고 불리는 것은 아니었다.

반서후를 이기는 게 이론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서지한이 무엇이든 뚫는 창이라면 반서후는 뚫리지 않는 방패라고 할까.

“하긴, 그렇겠네요.”

- 혹시나 엮이게 되면 최대한 멀어져. 엄청나게 피곤한 성격이니까.

“피곤? 으음, 겉으로 보기엔 괜찮은 것 같던데.”

- 끈질기고, 답답하고. 아무튼 알고 지내서 좋을 거 없어.

그를 무척 잘 아는 눈치다.

유은담에게 보이는 것과는 확연하게 다른 격렬한 반응에 그와 반서후의 관계에 약간 흥미가 생겼다.

“혹시 싸웠어요?”

내 질문에 반서후의 험담을 늘어놓던 서지한이 입을 딱 다물었다.

그리고 잠시 눈알을 굴리더니 내키지 않는 듯 입을 열었다.

- 좀 부딪히긴 했지. 그 거머리 새끼.제 맘대로 안 되면 돌아버리는 놈이라. 내가 남의 말 잘 들어주는 성격은 아니잖아.

그 말을 들어도 어쩐지 쉽게 상상이 가지 않는다.

반서후는 거대한 남자였다.

서지한이 호랑이나 흑표범 같은 날렵한 느낌을 연상하게 한다면 반서후는 등장하는 것만으로 사방을 압도하는 느낌의 흑곰 같은 남자다.

그런 사람이 서지한에게 이러쿵저러쿵하며 ‘내가 시키는 대로 해!’하고 종알거린다고?

믿을 수가 없는데.

아무튼, 반서후 얘기는 여기 까지만 해야 할 것 같다.

서지한이 점점 흥분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일단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랭킹 1위부터 3위까지가 전부 한국인이라니, 보면서도 믿기지가 않네요. 4위부터는 미국이지만. 10위까지만 표시되는데 그 중 세 명이 한국인……."

나름 놀라워 감탄한 건데 서지한은 새삼스럽다는 반응이었다.

그는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 그 순위는 악령 왕 실라기스 공략때 거의 정해진 거야. 보스에 휘하장군급 몬스터까지 전부 한국 공략팀이 잡아먹었으니까. 뭐, 다른 나라에서도 보스 공략을 성공하면 랭킹에 변동이 오겠지.

“그렇구나.”

대충 대꾸하고 나는 계속 몬스터를 루팅 했다.

슬슬 이 지루한 루팅 작업에도 끝이 보이는 것 같다.

마침내 마지막 몬스터의 루팅을 끝내고 허리를 펴는데 사방에 빼곡한나무가 눈에 들어왔다.

그러고 보니, 이것도 채집 가능한것들이네.

“이 나무들은 뭐예요?”

- 이거? 내가 알기로는 힐링 포션재료야.

슬슬 집에 가볼까 하던 참이었는데그 말을 듣고 멈칫했다.

히, 힐링 포션?

“비싼 거 아니에요?”

- 나뭇잎이 힐링 포션 재료로 사용된다고 들었는데. 이렇게 많은 걸보면 그렇게 비싸지는 않을걸. 핵은 꽤 비싸겠지만.

그 말까지 듣고 나니 도저히 떠날수가 없었다.

이 수많은 나무들이 모두 돈 덩어리로 보였던 것이다.

조심스럽게 채집 스킬을 사용해서 나무 하나를 채집해보았다.

16619540742163.jpg

가르니드의 핵(등급: S)x1 획득

가르니드의 원목(등급: A)x258 획득

가르니드의 잎사귀(등급: A)x3265 획득

가르니드의 뿌리(등급: A)x22 획득

가르니드의 수액(등급: A)x26 획득

가르니드의 나무껍질(등급: A)x56 획득

16619540742172.jpg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