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31화 (31/231)

031화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기세 좋게 달려들던 놈이 옆으로 휙 날아가 처박혔다.

차에 치이기라도 한 것처럼.

“Are you okay?”

약간 가무잡잡한 피부에 키 작은 남자.

새카맣고 선량한 인상의 둥근 눈이 나를 향했다.

한 발 늦게 나는 그가 한국인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괜찮아요. 아니, 그러니까. 0K, 아임 오케. 그보다 내 동생, 어. 그러니까. My brother is here?”

너무 급해서 올바른 말을 썼는지도 모르겠다.

애초에 업무에 영어를 쓸 필요가 없어서 영어를 잘하지도 못한다.

절박한 이 심정에 영어로 말해야 한다는 사실을 떠올린 것조차 기적이었다.

“Brother?”

그래도 한 단어는 통한 모양이다.

헌터로 보이는 남자가 반문했다.

“Yes! Yes! 예쓰요! 내 동생, 이렇게. 아시안! 나 닮았어. Like me!봤어요? See? 보셨어요?”

이 남자가 승주의 얼굴을 알고 있을 리가 없다는 논리적인 깨달음이 뒤늦게 찾아왔다.

뭔가 더 설명할 여유는 없었다.

애초에 길게 이야기를 할 수 있을만한 여유로운 상황이 아니었다.

쫓기는 사람은 많고 헌터는 몇 없다.

남자는 어느새 휙 사라져서 공격받는 다른 사람을 구하러 떠났다.

전투계 중에서도 격투 쪽인지 몸놀림이 굉장히 날쌔 보였다.

하지만 그리 강하지는 않은 모양인지 무척 고전하는 듯했다.

한 놈 두 놈 발로 차서 날려버린 듯했지만 두세 놈이 역공해오자 발이 묶여 금세 무력화되어버렸다.

하지만 다행히도 다른 헌터가 끼어들어 도와준 덕분에 그들은 다시 사람들을 구하러 뛰어다닐 수 있게 되었다.

- 젠장.

서지한은 피가 들끓는 듯한 표정으로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며 마음을 가라앉히려는 기색이었다.

- 상황이 안 좋은데. 이쯤 몰리면…….

나는 곧 서지한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었다.

쫓기는 사람을 헌터가 구하고, 그 헌터에게 잔챙이들이 달려들고, 잔챙이를 묶어두는 사이 민간인들이 도망치며 그럭저럭 평형을 유지하던 전황 속에서 문득 압도적인 존재감이 느껴졌다.

피부가 찌릿하게 울리고 머리카락이 곤두서는 것 같은 감각.

서로 물고 뜯고 울고 짖던 모든 이들이 일제히 한 방향을 보게 만드는 위압감.

한눈에 보기에도 심상치 않게 강해 보이는 몬스터의 등장이었다.

그르르.

저런 게 존재할 수 있나 싶은 압도적인 크기의 곰이었다.

마치 5층짜리 빌라가 걸어 다니는 것 같았다.

놈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발에 걸린 거목이 와지끈 부러졌다.

아름드리나무를 나무 꼬챙이로 보이게 할 정도로 거대한 놈이 조용히 으르렁거렸다.

나를 구해주었던 남자 헌터가 가까스로 몸을 지탱하며 곰을 응시하는 게 보였다.

무언가 중얼거리는 얼굴은 완전히 절망에 휩싸여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여기서 싸우던 몇 안 되는 헌터 모두가 전의를 상실한 채 마치 비각성자처럼 넋을 잃은 상태였다.

뺨이 굳어버리는 것 같은 두려움 속에서 나는 가까스로 인벤토리를 떠올렸다.

사자의 낫.

그리고 서지한의 장비들을 꺼내야 한다.

그것들을 전부 꺼내더라도 저 괴물을 상대로 얼마나 대적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야 했다.

직감이었다.

사방팔방 흩어져 있던 몬스터들은 거대한 곰이 나타나자마자 일제히 놈에게로 집합했다.

마치 사열이라도 하는 것 같은 형태였다.

그 사이 곰은 헌터 몇몇이 분투 끝에 죽이는 데 성공한 소형 몬스터들의 시체를 눈에 담고 있었다.

나는 이 뒤의 전투 양상이 어떻게 흘러갈지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소형 몬스터에도 고전했던 이 헌터들이 저 곰을 대적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이를 악물고 사자의 낫을 꺼내 들려는 순간, 나는 발견했다.

곰에게로 모여드는 몬스터들의 틈바구니에 공포에 질린 승주가 납작 엎드려 있는 것을.

비록 뒤통수뿐이고, 풀에 가려서 간신히 옷만 보이는 상황이었지만 틀림없이 승주였다.

“승주야!”

소리를 지르자 순간 승주가 이쪽을 본 것 같았다.

아니, 봤다.

확실하게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그런 승주를 향해 곰이 손을 높게 치켜들더니 그대로 땅을 내리쳤다.

땅거죽을 뒤집을 듯한 충격파가 작은 지진을 만들며 사방을 휩쓸었다.

흙먼지가 솟아오르더니 몇 미터도 넘는 높이로 튕겨 나온 승주가 거친 바닥을 굴렀다.

그 모든 순간이 너무나 느리게 보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엄청나게 빠른 동작이었다.

돌멩이처럼 바닥을 구른 승주는 땅에 얼굴은 묻은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승주야?

머리가 하얗게 질리는 것 같은 두려움.

그리고 눈앞이 시뻘겋게 달아오르는 것 같은 분노가 치솟았다.

내 동생을!

저 곰을 죽여야 해.

맹목적인 적의가 머릿속을 지배했다. 생각 같은 건 하지 않았다.

죽인다.

죽여야 한다.

그런 내 살의에 스킬이 반응했다.

머리가 뜨거워지는 것 같다.

분노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실제로 이마가 달아오르고 있었다.

충왕포.

스킬을 떠올리자 기술이 형상화되기 시작했다.

- 손모아, 진정해. 힘 조절. 힘 조절해.

서지한이 곁에서 뭔가 말하고 있었지만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힘 조절?

그거 어떻게 하는 건데.

나 그런 거 몰라.

그냥 저 곰을, 여기 있는 놈들을 다 죽일 거다.

모든 힘을 다해서.

이마가 화끈거리면서 동시에 머리 위쪽이 밝아졌다.

거대한 에너지가 모여드는 것이 느껴진다.

- 살살 해. 지금 너무, 손모아. 잠깐. 그렇게…….

서지한의 목소리를 배경음으로 깐 채 스킬이 완성되었다.

스킬은 나의 의지에 화답하여 곧장 곰에게로 쏘아졌다.

콰아아아아!

예상했던 것보다, 아니, 의도했던 것보다 너무나 압도적인 힘이었다.

내 이마에서 시작된 거대한 빛줄기는 내 몸통만큼이나 굵어지며 직선으로 뻗어나갔다.

눈을 뜨기 힘들 정도로 시야가 밝아져 나도 모르게 눈을 감고 얼굴을 찌푸렸다.

다시 눈을 뜬 순간, 나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몸통에 거대한 구멍이 뚫린 곰이 보였다.

바닥을 깊게 파헤친 거대한 크레이터가 나와 그 곰 사이를 잇고 있었다.

놈과 나 사이에 있던 나무도, 돌도, 잡초도 모조리 증발해버린 상태였다.

구멍 뚫린 곰이 천천히 무릎을 꿇고 쓰러졌다.

이어서 겁에 질린 몬스터들이 뒤늦게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모든 순간을 목격한 생존자들이 턱이 빠질 것 같은 표정으로 나를 돌아보고 있었다.

빼꼼 고개를 든 승주가 ‘누나……?’하고 입모양으로 나를 부르는 것도 보였다.

그 현장을 휩쓴 충격적인 적막 앞에서 나는 뒤늦게 이성이 돌아왔다.

이, 이걸 어쩌지.

뭐든 말해서 이 상황을 수습해야 해.

생각이 말을 빚어내기 전에 입이 먼저 움직였다.

“제, 제가 한 거 아니에요.”

물론 알아듣는 사람도 없고, 통하지도 않는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 푸춥.

옆에 서 있던 서지한이 웃음을 참는 소리가 들렸다.

나도 알아.

나도 안다고.

이상한 소리 했다는 거 알고 있다고.

웃지 마라, 서지한.

아, 웃지믈르그.

- 그걸 거짓말이라고 한 거야?

조용히 하세요!

내가 눈짓을 해도 그는 배를 잡고 웃었다.

평소였다면 그 모습에 볼멘소리라도 한 마디 했겠지만, 지금 나는 그럴 여유가 없었다.

모든 몬스터들이 꼬리가 빠져라 도망친 이 현장에 남은 것은 나와 나에게 쏟아지는 수십 쌍의 놀란 시선뿐이었다.

내게서 눈을 떼지 않는 사람들이 너무 부담스럽다.

회의시간에 지각해서 뒤늦게 참석할 때보다 수백 배는 되는 압박감이었다.

왜, 왜 계속 쳐다보시지?

아, 내가 방금 충왕포 쏴서 쳐다보시는 거구나.

어,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해야 그만 보게 하지?

저기, 그만 봐주세요.

저쪽 몬스터 도망가는 거 구경하시는 게 어떨까요?

주목받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나는 무언가 해야 한다는, 보여줘야 한다는 의무감이 강해졌다.

뭘 하는 게 좋을까.

이 이상 뭘 하면…….

아.

나는 화살처럼 꽂히는 시선을 온몸에 주렁주렁 매달고 삐꺽삐꺽 앞으로 걸어 나갔다.

몬스터와 나 사이에는 충왕포가 닦아둔 길이 놓여 있었다.

그 길을 따라 직진.

그러고 보니 충왕포에 사람이 휘말리지 않아서 천만다행이다.

다들 곰을 보고 겁에 질려 뿔뿔이 흩어져 있던 것이 절묘했다.

돌이고 나무고 가리지 않고 박살 내버린 이 스킬에 사람이 휘말렸으면 어떻게 되었을지 상상도 하기 싫다.

싸우는 상대가 몬스터라서 다행이었다.

이건 정말 사람에게 쏠 물건이 아니야.

하지만 한편으로, 서지한은 이 스킬의 진짜 주인인 충왕 케르기스가 쏘는 것을 맞고도 멀쩡했다.

내가 쏜 충왕포는 그때에 비하면 위력도, 크기도 절반이 채 안 되는 수준이다.

이 약화된 충왕포조차 저렇게 강한 몬스터가 한 방에 터져나가는 위력인데, 진짜를 맞고도 끄떡없던 서지한이 새삼 감탄스럽다.

양철 인형처럼 삐걱대며 걸어간 나는 마침내 몬스터의 앞에 도착했다.

채집 스킬을 사용해 곰을 루팅하자 거대한 시체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이어서 알림 메시지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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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왕류의 가죽(등급: B)x1 획득

수왕류의 발톱(등급: B)x16 획득

수왕류의 고기(등급: B)x1 획득

수왕류의 마석(등급: B)x1 획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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