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8화
어지간해서는 잘 연락하지 않는 남동생 손승주가 어쩐 일로 전화를 한 것이다.
뭐지? 용돈 달라는 건가?
“여보세요?”
법당 안에서 전화를 받을 수는 없었기 때문에 나는 슬쩍 밖으로 빠져나왔다.
서지한도 덩달아 얼른 법당을 뛰쳐나왔다.
어지간히 있기 싫었던 모양이다.
-누나?
낯익은 목소리가 수화기에서 흘러나왔다.
안부 인사 같은 것은 주고받을 필요가 없는 사이였기 때문에 나는 바로 본론을 물었다.
“어, 무슨 일이야?”
-오늘 저녁에 시간 괜찮아?
“응. 별일은 없는데, 왜?”
-저녁 같이 먹자. 엄마도 올 거야.
“엄마도 온다고?”
-응.
뭐지? 갑자기 무슨 일이지?
보통은 엄마가 밥을 같이 먹자고 하는 편인데 손승주가 연락을 한 것도 그렇고 좀 이상하다.
엄마라는 말을 듣자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인벤토리에 있는 탈출석이었다.
언제 어떻게 줘야 할지 고민했는데, 오늘 만나서 각성한 걸 말하고 그냥 줘버릴까?
아니면, 길드에 가입한 다음에 주는 게 나을까.
“그냥 밥만 먹자고?”
-할 말도 있고.
“너 자퇴하는 거 아니지?”
-아니야.
“학점 망했어?”
-아니야.
“휴학한다고?”
-아, 그런 거 아니야! 고기 먹을 건데, 괜찮지?
“고기 좋지.”
대꾸하는 순간 법당으로 들어가던 스님과 눈이 마주쳤다.
앗, 뭔가 잘못한 건 아닌데 잘못한 느낌..
어색하게 스님의 시선을 피하는데 남동생이 약속시간과 장소를 외치고 전화를 툭 끊었다.
“갑자기 안 하던 짓을 하네……."
끊긴 전화를 보며 의아해하고 있으니 서지한이 슬쩍 다가왔다.
- 가보면 알겠지.
* * *
“이렇게 얼굴 보니까 좋다.”
이글거리는 불판을 앞에 두고 남동생이 낯간지러운 소리를 했다.
대체 무슨 바람이 불어서 안 하던 소리를 하는 건지.
얘 왜 이러냐고 엄마한테 눈짓을 해도 엄마도 전혀 모르는 눈치다.
“너 사고 쳤어? 왜 자꾸 그래, 불안하게……."
“그런 거 아니래도.”
나의 의심 어린 눈길에 남동생이 순수한 표정을 지었다.
뭐지. 대체 뭘까.
아.
“나 죽을 뻔했다고 하니까 놀라서 그래?”
역시 짚이는 건 던전 생성 폭발밖에 없다.
아마 엄마한테서 내 소식을 전해 들은 모양이지.
그렇게 생각하니 설명이 된다.
하지만 승주는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응? 누나 무슨 일 있었어?”
금시초문이라는 반응에 나는 바로 엄마를 돌아보았다.
“엄마, 얘한테 말 안 했어?”
"승주 걱정할까 봐 일부러 말 안 했어.”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황당해서 입을 다물지 못하자 아무것도 모르는 승주만 난리가 났다.
“뭔데? 무슨 일인데?”
"나 얼마 전에 있었던 던전 생성 폭발. 거기 휘말렸었잖아.”
담담하게 말했는데 승주는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뭐? 누나 회사 있는 데가 거기였어? 어디 다쳤어? 괜찮아?”
"멀쩡해. 누나 회사 어디 다니는지도 모르냐.”
사지가 제대로 붙어 있나 허겁지겁 살펴보던 동생이 내 핀잔에 부루퉁하게 입술을 내밀었다.
“누나도 나 어느 학교 인지도 모르잖아.”
“알아. T대.”
“아닌데. 편입해서 도대인데.”
"크흠.”
할 말이 없다.
언제 편입을 했대.
내가 헛기침을 하며 물잔을 들자 기세를 잡았다고 생각했는지 승주가 재차 입을 열었다.
“그리고 나 다리 부러진 건 들었어?”
다리?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뭐? 어쩌다가!”
깜짝 놀라 묻자 승주가 배시시 웃었다.
“편의점 아르바이트하고 있는데 트럭이 돌진해서……."
“뭐라고?”
“지금은 다 나았고. 배상금은 두둑하게 받았어.”
“그걸 말이라고 해? 엄마, 왜 나한테 말 안 했어?”
어처구니가 없어서 엄마를 보자 태연한 대답이 돌아왔다.
“모아 일하는데 놀랄까 봐 말 안 했다.”
“엄마, 말 좀 해줘.”
“그래, 말 좀 해줘.”
우리 두 사람이 이렇게 말해도 엄마는 어깨만 으쓱할 따름이다.
그리고 이 모든 대화는 서지한이 고기집 벽에 기대어 지켜보고 있었다.
꽤 재미있는지 눈빛이 생생했다.
적어도 아까 불경 듣고 있을 때보다는 훨씬 좋아 보였다.
사실 여기에 오기 전 서지한을 인벤토리에 넣으려고 했다.
가족들과 투닥거리는 모습까지 보여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지한은 계속해서 거부했다.
마지막에는 ‘네가 인벤토리에 넣겠다면, 들어가야겠지’하고 아련하게 슬픈 표정을 지어서 어쩔 수 없이 동행하게 되었다.
여우야, 아주.
“그나저나 너무 무리한 거 아니야?”
불판 위에서 구워지고 있는 고기는 모두 소고기였다.
게다가 무슨 일인지 돈이 없어서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는 거지 손승주가 이걸 사겠다고 선언했다.
여차하면 내가 결제할 생각으로 묻자 승주는 씩 웃었다.
“무리라니. 흠흠, 이건 이제 나한테 아무것도 아니야.”
“뭐야. 진짜 이상하게.”
잘 익은 고기 한 점을 집어서 우물거리며 나는 언제 각성 사실을 말할지, 그리고 언제 엄마에게 탈출석을 쥐여 줄지 타이밍을 노리고 있었다.
대화가 약간 소강상태에 접어들자 고민이 더욱 거세진다.
지금 말할까?
아니면 길드에 들어간 뒤?
어차피 길드에 들어갈 건데 지금 줘도 상관없지 않을까.
“저기, 나 말할게……."
약간 충동적으로 입을 떼는 순간 승주가 내 말을 가로채고 끼어들었다.
“큼, 크흠. 여러분. 제가 중대 발표할 것이 있습니다.”
뭐지.
설마, 손승주도 각성했나?
갑자기 스친 생각에 나는 살짝 긴장했다.
하지만 승주의 발표는 완전히 다른 내용이었다.
“나 복권 당첨됐어. 2등.”
테이블 위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엄마는 믿기지가 않는 눈치였고, 나는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진짜인가?
각성하고 복권 당첨됐다고 핑계 대는 것 아냐?
“진짜야?”
내 말에 승주가 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종이쪽지를 건넸다.
보니 복권 당첨금 지급 영수증이었다.
금액은 약 8200만 원 정도.
“봤어? 봤지? 내가 복권 잘 안 사는 사람인데, 그날 갑자기 딱 그런 기분이 들어서 샀거든. 어제 별 기대 없이 맞춰봤는데. 당첨인 거야!와, 진짜 당첨되는 순간에 울 뻔했잖아. 오늘 아침에 바로 가서 돈 받아왔어!”
승주가 저렇게 신이 나서 떠드는데 여기서 내가 각성자라고 말하면 괜히 저 신난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게 되는 꼴이고.
으음, 다음에 말하자.
어차피 뿔 곧 다 먹으니까. 길드 가입하고 말하면 되겠지.
“그래서 말인데, 우리 해외여행 가자! 엄마, 괜찮지? 누나도 괜찮지?지금 백수잖아! 가족 해외여행 가자!”
나쁘지 않은 생각이다.
각성자가 된 걸 쉽게 밝힐 수 있는 상황이었다면 나도 돈을 얻자마자 가족들에게 해외여행부터 떠나자고 했겠지.
내가 본격적으로 헌터 활동을 하게 되면 바빠질 테고, 시기상 별 달리할 일이 없는 지금이 적기인 건 확실하다.
게다가 나도 그렇고, 엄마도 그렇고 둘 다 외국에 가본 적이 없었다.
승주는 학교에서 가는 수학여행으로 중국이라도 한번 갔다 왔지만, 나 때는 막 던전이 생겨나고 혼란스러운 시기라 그런 여유가 없었다.
“나는 괜찮은 것 같아.”
선선히 동의하자 승주의 기대어린 눈빛이 엄마에게 쏟아졌다.
“언제 가려고? 영주 엄마네 농사일 도와줘야 하는데.”
떨떠름하긴 했지만 거의 승낙이나 다름없는 말이 떨어지자 승주의 입이 귀까지 걸렸다.
“여권만 있으면 바로라도 갈 수 있어! 나 방학 끝나기 전에 가자!”
"이 겨울에? 추워서……."
“따듯한 나라로 가면 되지!”
"지금 이렇게 추운데 거기는 따듯하다고?”
“그러엄! 서울보다 거제도가 더 따듯하잖아. 거제도보다 더 아래에 있는 나라에 가면 정말 여름 같아.”
농사만 지으며 살아서 외국에 대한 개념이 별로 없는 엄마는 승주의 말이 와 닿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엄마의 덤덤한 얼굴에 설렘이 조금씩 번지는 걸 보자 가슴이 뿌듯해졌다.
엄마의 얼굴을 들여다보다가 문득 혼자 멀뚱멀뚱 서 있는 서지한이 눈에 들어왔다.
해외라.
나중에 바티칸이라도 가볼까.
나는 외국으로, 서지한은 천국으로.
좋잖아?
“어디로 갈까.”
잠깐 서지한을 쳐다보는 사이 화제는 어느새 여행지를 고르는 곳까지 흘러왔다.
승주가 휴대폰을 들고 이리저리 검색하더니 불쑥 화면을 들이밀었다.
“여기 어때?”
“괌?”
“많이 간대. 관광할 것도 많고.”
"나는 상관없어. 엄마만 괜찮으면.”
엄마가 별다른 반대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여행지는 순조롭게 괌으로 정해졌다.
승주의 휴대폰으로 여행지를 살펴보는 엄마는 드물게 들뜬 표정이었다.
앞으로 헌터를 하게 되면 전 세계를 다 돌아다닐 수 있게 해 드려야지.
혼자 자식 둘을 키우느라 엄마는 너무 많은 고생을 했다.
“그리고 이거. 엄마랑 누나 계좌로 돈 보냈어.”
승주가 뿌듯한 듯 뻐기는 듯이 계좌 이체 기록을 보여주었다.
나에게 천만 원, 엄마에게 3천만 원을 입금한 내역이다.
그나저나 손승주, 복권 당첨 금액을 숨길 생각도 안 하고 이렇게 투명하게 공개해도 돼?
돈 욕심이 없는 건지.
물론 우리 가족이 복권 당첨금 내놓으라고 할 성격은 아니지만.
하긴, 승주는 어릴 때부터 굉장히 솔직한 성격이었다.
뭔가 감추는 걸 싫어했지.
어설픈 거짓말을 하다가 들켜서 혼나는 나를 보고 자란 탓일까.
승주도 나도 무언가를 숨기면 반드시 들통이 난다고 믿는 경향이 있었다.
“안 줘도 되는데……."
만약 이번 달 운세를 봤다면 돈복이 터졌다고 나왔을 것 같다.
차장님이랑 대리님이 주신 돈도 그렇고, 승주가 준 돈도 그렇고.
예상치 못한 돈들이 여기저기서 들어왔다.
예전이었다면 기쁘게 받았겠지만, 사실 지금의 나로서는 거의 필요가 없는 돈이다.
반쯤 진심으로 한 말이었는데 승주는 내가 괜히 뺀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무슨 소리야. 안 주면 섭섭해했을 거면서. 직장도 없는데 어떡하려고 그래.”
제법 의젓하게 하는 소리를 들으니 이게 누구인가 싶다.
그래도 이 돈은 나중에 길드에 들어간 뒤에 돌려줘야지.
차장님과 대리님이 준 돈도 그때 돌려주면 되겠다.
“그럼 언제 출발하는 거야?”
내 질문에 승주가 함박웃음을 지었다.
“최대한 빨리. 엄마랑 누나 여권 없지?”
“만들어야 해. 해외 갈 일이 없어서……."
“그럼 대충 2주 뒤에 가자. 예약은 내가 할게!”
내 여권 만들 때 엄마 여권도 같이 만들면 되겠군.
“근데 손승주. 아르바이트하고 있지 않았어? 이렇게 갑자기 그만둬도 돼?”
“응. 안 그래도 사장이 나 머리 나쁘다고 걸핏하면 자른다고 그랬는데, 어제 또 그러길래 그냥 자르라고 하고 나왔어.”
어깨를 으쓱한 승주는 홀가분한 얼굴로 불판의 고기를 몇 점 더 올려놓았다.
벌써 머릿속이 여행 갈 생각으로 가득 찼는지 콧노래도 하고 있다.
어쨌든 행복해 보여서 좋긴 하는데, 떠날 때는 떠나더라도 나에게는 중대한 과제가 남아 있었다.
기한은 2주.
그 안에 케르기스의 뿔을 전부 먹어치워야 한다.
여행지에 가서도 이걸 먹을 수는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