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7화
아니, 그렇잖아.
상식적으로 이런 물건을 보면 재료 아이템이나, 어디 제작 스킬을 가진 사람에게 맡길 생각을 하지 입에 넣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잖아?
- 처음에는 나도 제작계 각성자에게 들고 갔어. 하지만 재료 아이템이 아니라는 말만 듣고 돌려보내졌지.
"으음."
- 어렵게 얻은 보스 몬스터 부산물인데 그냥 인벤토리에 썩힐 수도 없잖아. 이런저런 시도를 하다가 결국 알아낸 거야.
나는 서지한이 온갖 고민을 하다가 조심스럽게 뿔 조각을 갉작이는 모습을 상상했다.
저 차갑고 잘생긴 얼굴로 그러고 있는 모습을 떠올리니 표정관리를 하기가 힘들다.
내가 표정을 통제하기 위해 애쓰는 동안 서지한이 한 마디를 덧붙였다.
- 이걸 아는 건 내가 아는 한 나뿐 일거다.
아주 귀중한 조언을 들은 거라며 서지한이 뻐겼지만 나는 순수하게 고마워할 수가 없었다.
케르기스의 뿔은 정말로 맛이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나는 맛없는 음식을 오래 견딜 수 있는 타입이 아니었다.
앞날을 생각하니 심히 걱정이 된다.
“하나 더 물어볼 거 있는데, 소스 뿌려서 먹어도 돼요?”
이건 중요한 문제였다.
다행히도 서지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약간 어이없어 하긴 했지만.
- 다 먹기만 한다면 방법이야 어떻든 상관없을걸.
그나마 다행이군.
“오늘은 여기까지만 먹을래요.”
서지한과 이야기하는 내내 틈틈이 뿔을 갉아먹었더니 배가 터질 것 같다.
그리고 아무래도 아무런 맛이 없으니 많이 먹기가 힘들었다.
다 먹으려면 얼마나 걸리려나.
적어도 한 달은 걸릴 것 같은데.
- 뿔은 인벤토리에 다시 넣어놔.
“그러려고 했어요. 누가 보면 큰일이니까……."
인벤토리로 뿔을 회수하고 휴대폰을 보니 벌써 시간이 새벽녘에 접어들고 있었다.
어쩐지 피곤하더라.
시간을 인식하고 나니 피로가 확 몰려들었다.
나는 근사한 호텔 욕실을 감상할 여유도 없이 대충 몸을 씻고 침대 위에 드러누웠다.
쿠션감 끝내주네.
불을 끄고 침대에 눕자 창문으로 도시의 불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반지하에 있을 때는 불을 켜도 어두웠는데, 여기는 불을 꺼도 밝구나.
커튼을 칠까 하고 창문을 바라보자 테라스 난간에 아슬아슬하게 걸터앉은 서지한이 보였다.
고층이라 바람이 무척 강할 텐데 그의 머리칼은 차분하기만 했다.
홀로 앉아 도시를 내려다보는 서지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반투명한 등이 금방 사라질 것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그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앞으로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걸까.
회사를 다니면서 경력을 쌓고, 적은 월급을 모아 근근이 노후를 준비하며 소박하게 살 거라고 생각했던 나의 미래는 송두리째 사라졌다.
가늠이 되지 않는 미래를 앞에 두고 나는 설렘과 불안을 동시에 느끼고 있었다.
내가 느끼는 이 감정을, 서지한도 똑같이 느끼고 있을까.
그도 이런 미래는 예상하지 못했을 텐데.
만약 내가 수명이 다해 죽기라도 하면 서지한은 어떻게 되는 걸까.
혹시 그 온통 하얀색밖에 없다는 영혼석 안에서 혼자 영원히 있어야 하는 걸까.
그건 생각만 해도 너무 무서운데.
고독하고 외로운 반투명한 등을 보며 나는 까무룩 잠이 들었다.
내일은 서지한을 위해서 좋은 절을 알아봐야지.
* * *
새로운 스킬을 얻어 전투계 헌터로서의 미래를 구상할 수 있게 되자 나는 자연스럽게 집 찾기를 그만두었다.
길드에 가입해 본격적인 헌터로 활동하게 되면 자금출처 조사 없이 마음껏 돈을 쓸 수 있는데 굳이 지금 골머리 썩이며 저렴한 집을 찾아다닐 이유가 없다.
스킬을 얻고 길드에 가입해서 제한 없이 돈을 쓸 수 있게 될 때까지는 스위트룸에 머무를 생각이었다.
솔직히 처음에는 스위트룸의 가격에 무척 거부감을 느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돈을 쓰는 만큼 점점 금전 감각이 자라났다.
아니, 상황에 익숙해진다는 표현이 더 맞을 것 같다.
예전이었다면 내 한 달 월급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돈을 펑펑 쓰는데도 인벤토리의 현금은 줄어드는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그걸 보고 나니 이제 몇 백만 원정도는 나에게 있어서 소액이 되어버렸다는 실감이 들었던 것이다.
덕분에 부서진 반지하방을 변상할 때도 돈이 전혀 아깝지 않았다.
어쩐지, 서지한이 겨우 1억 가지고 그러냐며 혀를 찬 이유를 좀 알 것 같기도 했다.
일을 할 필요도 없어진 덕분에 나는 매우 단조로운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일어나면 케르기스의 뿔을 먹고, TV를 좀 보거나 좋은 절을 찾아 잠시 외출하고 돌아와서 또 뿔을 먹는 나날이다.
뿔만 다 먹고 나면 길드에서 전투계 헌터로 활동할 수 있을 테니 걱정할 게 없었다.
지금 나의 유일한 걱정은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를 서지한의 미래였다.
그런 이유로 오늘도 나는 그를 위해 절을 방문했다.
“사람 많네요.”
- 그러게.
한낮의 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지는 절의 앞마당에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가족끼리 온 사람도 많고, 혼자서 방문한 사람도 꽤 있었다.
사실 평일 낮이라 사람이 없을 줄 알았는데 많아서 꽤 놀랐다.
유명한 절이라 그런가.
웹사이트는 굉장히 허접했는데, 갑자기 좀 믿음이 생긴다.
벌써 일곱 번째 절이니 소득이 좀 있어야 할 텐데.
“스님을 좀 찾아보죠.”
서지한이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고 따라왔다.
사실 처음 절을 방문할 때까지만 해도 서지한은 기가 막힌 표정이었다.
쓸데없는 짓 하지 말라며 빈정거리기도 했다.
하지만 본인도 이 상황이 막막한 건 마찬가지라서 결국 나에게 논리로 밀렸다.
서지한, 너 평생 영원히 유령으로 살래?
나 잘못되면 어떡하려고 그래!
뭐라도 해봐야지!
뭐, 이런 느낌으로 말했더니 그도 결국 수긍했다.
나에게 말로 밀렸다는 것에 꽤 충격을 받은 것 같았지만, 알 게 뭐야.
“여기는 당일 예약 천도재도 가능하다고 해서 예약하고 왔어요.”
인터넷에서 일부러 천도재 잘하는 절을 찾아서 왔다.
이곳은 천도재 전문이라 그런지 거의 매일 천도재를 지내는 덕분에 예약하기가 무척 쉬웠다.
절 웹사이트에 노랑과 빨강으로 현란하게 ☆성불★전문☆이라고 적혀있던 배너 때문에 약간 신뢰도가 떨어지긴 했지만, 자고로 많이 하는 곳이 실력이 있지 않겠어?
- 하…….
잘 따라오는가 싶던 서지한이 갑자기 자괴감 어린 기색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아까 웹사이트를 볼 때도 ‘이런 사기 같은 것에 의지해야 하다니’하고 무척 괴로워했는데 그 연장선인가 보다.
사실 서지한의 저런 모습을 그동안 하도 많이 봐서 이젠 신기하지도 않다.
랭킹 1위님 생각보다 멘탈이 좀 약한 편이네.
“아, 또 왜 그래요. 빨리빨리, 성불 할 의욕을 가지자고요. 열심히, 힘차게 성불하는 거예요.”
- 하…….
주먹을 불끈 쥐고 발을 구르며 그의 의지를 끌어올리려고 했지만 서지한은 여전히 비척비척 걸어서 따라올 뿐이었다.
어차피 내가 가면 자동으로 이동하게 되어서 걸을 필요가 없는데 늘 저렇게 걷는단 말이야.
“그나저나 스님이 어디 있지.”
- 저쪽, 법복 입은 대머리 아냐?
“대머리라니요!”
불경하기 짝이 없는 소리에 깜짝 놀라 외쳤다가 얼른 입을 다물었다.
다른 사람 눈에는 가만히 걷던 내가 혼자 대머리라고 소리친 격이었다.
뒤늦게 놀려 먹힌 걸 알고 그를 노려보자 서지한이 즐겁게 웃었다.
하, 내가 공덕을 쌓는다.
- 말해두지만 난 이런 거 안 믿어.평상시였다면 거들떠도 안 봤을 거다.
“그러시겠죠.”
불손하게 대꾸하고 나는 그가 가리킨 스님에게 다가갔다.
나의 접근을 알고 그쪽에서 먼저 합장하며 인사를 건네 왔다.
“안녕하세요. 오늘 천도재 예약한 손모아인데요.”
“아, 그 이름 없는 영가를 천도하신다는 불자님이시군요.”
천도재는 보통 성불을 기원할 사람의 이름을 알아야 한다고 한다.
하지만 랭킹 1위 서지한의 명복을 좀 빌어주세요, 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을 리가 없기 때문에 나는 그냥 대충 이번 던전 생성 폭발 사고로 죽은 사람들을 모두 천도하고 싶다고 의뢰했다.
절에서도 훌륭하다며 칭찬해 줄 뿐 딱히 이상하게 보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곧 시작할 겁니다. 이쪽으로 드시지요. 아, 식사는 하셨는지?”
한 법당을 가리키던 스님이 문득 질문했다.
점심때를 살짝 넘긴 시간대라 그런 모양이다.
“네, 먹었어요.”
오늘도 케르기스의 뿔에 호텔 김치를 올려서 잔뜩 먹고 나왔다.
부지런히 먹은 덕분에 케르기스의 뿔은 꽤 많이 줄어든 상태였다.
으음, 얼마나 먹었더라.
충왕 케르기스의 뿔
100% 섭취 완료 시 충왕 케르기스의 스킬을 계승합니다.
현재 진척도 35%
계승 가능 스킬
〈S급 충왕포〉(액티브)
〈S급 충왕뇌우〉(액티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