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5화
“일단은 집어넣죠.”
자동차만큼이나 큰 크기의 뿔 때문에 방은 한 발짝 떼기도 힘들 만큼 비좁았다.
내 말에 서지한도 별 반대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강해지는 방법도 방법이지만, 지금이 사태를 수습해야 한다.
뿔을 집어넣고 보니 집은 생각보다 더 엉망이었다.
잠깐 사이 무슨 대포라도 맞은 것처럼 파탄이 난 집을 보자 눈앞이 아찔해졌다.
이걸 어쩌면 좋아.
급히 벽 모서리에 붙은 덕분에 다치지는 않았지만, 집은 정말 큰일이 났다.
현관문만 멀쩡하지 한쪽 벽은 포탄이라도 맞은 것처럼 움푹 파였고.
욕실의 문틀도 비틀린 데다 문짝은 안으로 들어가서 허리를 접고 있었다.
싱크대는 절반 정도가 날아갔는데, 그 와중에 어딘가 수도관도 건드렸는지 바닥 장판에 물이 천천히 스며들기 시작했다.
- 내가 얻었던 악령 왕 실라기스의뿔 조각은 이렇게 크지 않았는데……. 이렇게 될 줄은 정말 몰랐어.
뻔뻔하게 나올 줄 알았는데 서지한은 진심으로 당황한 표정이었다.
그가 일부러 이런 게 아니라는 건 충분히 느껴져서 별로 화가 나지는 않았다.
그저 이 상황이 황당할 뿐.
“어느 정도 크기를 예상했는데요?”
- 이 정도?
서지한이 팔을 들어 한 아름 정도 되는 크기를 묘사했다.
나는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지금 이 난장판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암담해서 아무 생각도 없는 상태라 그냥 그러려니 했다.
- 아무래도 네 스킬의 영향인 것 같은데. 완전히, 케르기스의 뿔을 그대로 뽑아온 것 같군.
“그러게요……."
대충 대꾸하고 나서 일단 집주인 아주머니의 전화번호를 찾기 시작했다.
이 사태를 뭐라고 설명하면 좋을지 생각하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뭐라고 하지?
집 안에서 폭탄이라도 터진 것 같은 상황인데, 뭐라고 해야 하냐고.
- 그냥 지나가던 미친 헌터가 서로 싸우다가 집을 박살내고 갔다고 해.
서지한이 별일 아니라는 듯 말했지만 나는 그럴 수 없었다.
그리고 그건 너무 성의 없는 변명이잖아.
믿을 리가 없어.
“그걸 믿을까요?”
- 믿을 거야. 그럼 네가 부쉈다고 하려고?
서지한의 말대로 했다가 집을 부숴먹었으니 엄밀히 말하자면 서지한 탓이지.
하지만 책임소재를 가리는 것보다 더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다.
여기 집주인은 꽤 좋은 사람이었다.
이런 식으로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는데.
“그럼 아주머니가 수리비를 내야 하잖아요.”
- 수리비는 네가 내면 되잖아. 그 이상한 헌터들이 수리비로 쓰라고 돈도 줬다고 해.
“돈요?”
- 뭐, 이상한 놈들이니까 돈을 좀 주고 갔을 수도 있겠지.
“믿을까요?”
- 안 믿으면? 대충 1억 정도 주고 갔다고 해.
그렇게나 많이?
물론 배상은 하겠지만 그건 너무 금액이 큰 게 아닐까요.
“1억이요?”
- 그 정도면 충분히 수리하겠지.
심드렁하게 말하던 서지한은 내가 그 액수에 깜짝 놀라고 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고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었다.
- 그깟 1억이 뭐라고? 앞으로 헌터 생활하게 되면 던전 한 번만 가도 수 백억은 벌어들일 텐데.
와, 그깟 1억이라니.
정말 위화감이 느껴지는 단어다.
서지한이 그렇게 말해도 나는 그저 멀게 느껴질 뿐이었다.
솔직히, 인벤토리에 있는 40억을 쳐다만 봐도 배가 부른 것 같은데, 수백억이라니.
밥 안 먹고도 살 수 있게 되는 거 아냐?
- 아까워하지 말고 써. 그깟 몇 억 정도는 푼돈으로 느껴질 만큼 벌게 될 테니까.
자신만만하게 웃는 서지한과 달리 나는 그저 미심쩍기만 했다.
정말 그럴까?
사실 지금도 각성자가 되었다는 실감이 나지 않는다.
그냥 복권에 당첨된 백수나 다름없이 살고 있어서 그런지도.
서지한이 도와줘서 힘을 얻게 되면 이런 생활도 좀 달라질까?
하긴, 헌터가 되어 길드에 들어가면 계속 던전을 다녀야 할 테니 싫어도 실감이 날 수밖에 없겠지.
“일단 연락할게요.”
전화기를 들고 번호를 찾았지만 마음이 무거웠다.
서지한이 말한 알리바이가 통할 것 같지가 않았다.
하지만 다른 뾰족한 수가 생각나지도 않았으므로, 나는 파손된 벽과 가구를 사진 찍은 뒤 집주인에게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 안녕하세요, 세입자 손모아입니다.
거주 중에 갑자기 헌터들이 들이닥쳐서 싸우면서 집을 다 부숴버렸어요. 다행히 수리비는 받았지만 집을 빼야 할 것 같습니다.
메시지를 보내고 몇 분 지나지 않아 바로 집주인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무척 놀랐는지 목소리가 한껏 높아져 있었다.
-여보세요? 집주인인데, 이게 무슨 일이래요?
그러게 말입니다.
서지한이 갑자기 뿔을 꺼내라고만 안 했어도…….
“저도 무슨 일인지 모. 르. 겠. 어. 요.”
어색하게 나간 거짓말에 서지한이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자연스럽게, 손모아, 자연스럽게 해.
-아유, 아가씨도 너무 놀랐나 봐.말도 제대로 못 하네. 그럴 만하지, 다친 데는 없어요? 세상에, 이게 대체 무슨 일 이래. 그럼 오늘 거기서 못 자죠?
다행히 집주인은 내가 너무 놀라 얼어 버렸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직접 만나서 이야기했다면 이 어색한 표정 때문에 분명 의심을 샀겠지만, 전화라서 다행이었다.
“네. 몸은 괜찮아요. 나가서 자려고요.”
-내가 지금은 못 가고, 내일 가볼게요. 방도 뺀다고?
“네.”
-하긴, 수리하려면 거기서는 못 살지. 갑자기 이게 무슨 날벼락인지……. 아무튼 알았어요. 내가 내일 가보고 경찰 신고할게요. 많이 놀랐을 텐데 오늘은 일단 쉬어요.
경찰에 신고해도 아무 소득도 없을 테지만, 나는 일단 알겠다고 답변했다.
그걸로 통화는 끝이었다.
통화 내내 여기저기서 말소리가 들렸는데, 아무래도 저녁 모임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아마 바빠서 대강 통화하고 끊은 것 같다.
통화 말미에 ‘무슨 이상한 헌터가 내 셋방을 다 부숴놓고 갔다지 뭐야 글쎄. 아무튼 헌터들이 문제야’라고 하는 목소리도 살짝 들렸다.
“어……."
- 별거 아니었지?
“네……."
생각보다 간단하게 집주인과의 통화가 종료되어서 좀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집을 부수고 간 헌터가 누구냐고 묻거나 하면 어쩌나, 모른다고 딱 잡아떼야 하나 걱정했는데 집주인은 놀랄 만큼 관심이 없어 보였다.
아마, 수리비를 내고 갔다는 이유 때문인 것 같다.
“각성하고 나서는 하루 종일 거짓말만 하면서 사는 기분이에요.”
침울하게 중얼거리자 서지한은 짧게 한숨을 쉬더니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마. 별일도 아니야. 그나저나, 일단 자리를 좀 옮기지.
하긴, 서지한은 산전수전을 다 겪었을 테니 이 정도 일은 아무것도 아니겠지.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멀쩡한 소지품을 챙긴 다음 밖으로 나왔다.
택시를 타고 이동한 곳은 이전에 한번 뷔페를 먹으러 왔던 호텔이었다.
외제차가 즐비한 호텔 문 앞에서 내가 타고 온 택시는 괜히 이질적으로 보였다.
그냥 집 근처 아무 여관이나 갈걸 그랬나?
아니다.
사실 서지한이 예전에 호텔에 묵지 않고 집에 왔다고 핀잔을 줬을 때부터 은근히 여기에 머물러보고 싶었다.
여기서 내내 살지는 못하겠지만, 잠깐 머무는 것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잖아.
나는 이제 부자다.
이런 것에 익숙해져도 된다고.
밤에 온 호텔은 조명에 빛나는 샹들리에 때문인지 낮보다 수십 배는 더 고급스러워 보였다.
그 부유한 분위기에 기죽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내 머리 위에 ‘from 반지하’라는 딱지라도 붙어 있는지 여기저기서 시선이 달라붙었다.
“그, 숙박하려고 하는데요.”
로비 한편에 있는 호텔 프런트에 다가가자 내 쭈뼛쭈뼛한 태도에도 불구하고 직원이 몹시 친절하게 웃었다.
“환영합니다. 며칠 머무르실 예정이신가요?”
- 일단, 일주일로 해.
“일주일이요.”
내 대답을 듣고 화면에서 무엇인가를 조작한 직원이 다시 질문을 던졌다.
“어떤 객실을 제공해드리면 될까요 ?”
- 스위트룸.
나는 깜짝 놀라서 서지한을 돌아보았다.
직원은 내가 갑자기 허공을 쳐다보는 이상한 행동을 하는데도 내색하지 않고 영업용 미소를 지으며 대답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잠깐, 스위트룸이면 너무 비싸잖아요.
무, 물론 언젠가 복권에 당첨돼면 한 번쯤 해보고 싶은 일 목록에 있긴 해.
하긴 지금 상황이 복권에 당첨된 거나 다름없나?
갑작스럽게 거금을 쓰는 것에 거부감이 들어 우물쭈물하는데, 서지한은 뭐하냐는 듯 직원을 향해 두어 번 턱짓했을 뿐이다.
빨리 하라는 뜻이군.
“그, 스위트룸 주세요.”
직원은 잠시 놀라긴 했지만 노련하게 표정을 관리하며 방을 안내해주었다.
현금으로 결제를 하고 직원을 따라가 카펫이 깔린 호텔 복도를 걸은 끝에, 척 보기에도 비싸 보이는 문 앞에 도착했다.
“이 방입니다.”
문을 열자 어디 드라마나 잡지에서 본 것 같은 근사한 공간이 나타났다.
카드키를 건네받으며 주춤주춤 들어서자 눈앞이 환해지는 것 같았다.
방 안은 마치 신전 같은 분위기로 꾸며져 있었다.
훌쩍 높은 천장에는 눈부신 샹들리에와 화려한 조명이 있었다.
전체적으로 흰색과 금색 기조라 무슨 궁전에 들어온 것 같았다.
“실내용 슬리퍼입니다.”
하지만 서지한은 익숙한 모양인지 어느새 소파에 앉아 심드렁한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 5성 호텔도 아니고, 그냥 시내에 있는 일반 호텔일 뿐이잖아. 이 정도는 써도 돼.
나는 대꾸도 못 하고 휘황찬란한 방을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 사이, 방의 안내를 마친 직원 이인사를 건넸다.
“그럼, 편히 쉬시고 필요한 서비스가 있으시면……."
“아, 네. 안녕히 가세……."
마주 작별인사를 하는데, 서지한이 급히 나를 불렀다.
- 나가기 전에 저기 응접실에 있는 테이블 다 치워달라고 해. 뿔 꺼낼자리가 필요하니까. 스위트룸으로 한 이유가 이건대, 그냥 보내면 안 돼.
그런 서비스도 요구할 수 있어요?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