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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4화 (24/231)

024화

“잠시, 전화 좀 하고 올게요.”

갑자기?”

“급한 전화인데, 방금 생각이 나서요.”

화장실에 다녀온다고 할까 했지만 그랬다가 대리님이 같이 가자고 하면 낭패다.

게다가 집에 있는 개인 화장실이면 몰라도 공중 여자 화장실에 서지한을 데리고 들어가기가 좀 곤란했다.

본인도 들어가기 꺼리고.

사실 밖에서 서지한과 대화할 때마다 주변 시선이 무척 신경 쓰였다.

간혹 무서워하며 거리를 두는 시민도 있었다.

이해한다.

나도 진지하게 혼잣말하며 웃거나 고민하는 사람을 보면 그런 반응일 테니까.

아무튼 경찰에 신고당하기 전에 어떻게든 방법을 마련해야 했는데, 그 고민의 결과가 바로 이거다.

전화하는 척하기.

처음에는 대화할 때마다 전화기를 귀에 대고 통화하는 시늉을 했지만, 나중에는 그냥 귀에 블루투스 이어폰을 꽂고 다녔다.

그러면 갑자기 혼잣말을 해도 전화통화를 하는 줄 알고 다들 넘어간다.

그래도 내 귀에 꽂은 이어폰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다들 좀 이상하게 쳐다보기 때문에 되도록 휴대폰을 귀에 대는 방식을 이용하는 편이었다.

아무튼, 카페 뒤쪽으로 나와서 나는 서지한을 설득하려고 노력했다.

“비밀로 해달라고 하면 괜찮을 거예요. 어디 가서 남의 비밀 막 말하고 다닐 그런 사람 아니에요. 2년이나 봐왔는데요.”

삐딱하게 선 자세로 팔짱을 끼고 내 호소를 듣던 서지한이 고개를 저었다.

- 두 사람의 인성 문제가 아니야.

“그럼요?”

- 비밀은 언제나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좋은 거야.

“그건 그렇지만, 제 사정이 어려운 것도 아닌데 이렇게 돈을 받으면 두 분을 기만하는 것 같아서……."

나를 걱정해주는 사람에게 무언가를 숨기는 것은 상상 이상으로 양심이 괴로워지는 일이었다.

서지한은 다 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선을 그으며 가벼운 어조로 대꾸했다.

- 네가 어떤 결정을 하더라도 나는 어차피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네 마음이 불편한 것도 네가 알아서 해야 할 문제지. 나는 그냥 조언해줄 뿐이야. 꼭 들을 필요는 없어.

강요하지 않고 이렇게 한 발 물러서니 오히려 그의 충고를 더 무시하기 힘들어진다.

갈등하는 마음이 얼굴에 드러났는지 그가 약간 부드러운 목소리로 달래듯 말을 이었다.

- 한 가지 확실한 건, 진실을 말하게 되면 너는 홀가분해질 거야. 대신 저 두 사람은 네 비밀을 지켜주고 각성자 은닉범이 되겠지만.

각성 사실 은닉은 범죄다.

지금까지 나와는 거의 관련이 없을 범죄라고 생각해서 그런지 상기하는 게 좀 늦었다.

내 사정 때문에 두 사람이 죄를 짓게 할 수는 없었다.

내 결심을 굳히듯 서지한이 조용히 덧붙였다.

- 진실을 다 털어놓는 게 늘 좋은 것은 아니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결국 돈 봉투를 돌려주지 못한 채 두 사람과 작별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주머니 속의 돈 봉투를 만지작거리며 추운 밤길을 걸어오니 마치 세상에 혼자 남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고마워야 할 돈 봉투가 가시처럼 가슴을 찔렀다.

가족처럼 나를 아껴준 두 사람에게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불편한 기분과 앞으로도 각성 사실을 숨겨야 한다는 부담감으로 목구멍이 콱 막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게 옳은 거겠지.

이렇게 하는 게 옳은 거겠지.

집에 온 후에도 나는 계속 침울한 상태였다.

- 이봐.

불도 켜지 않고 방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더니 서지한이 나를 불렀다.

“아, 미안해요. TV 켜드릴게요.”

- 아니, 그게 아니라. 나를 뭐로 보고……. 그렇게 처져 있는 꼴 못 봐주겠군.

“TV 켜지 마요?”

- ……일단 켜.

TV를 켜주자 잠시 그것을 들여다보는 듯하던 서지한이 넌지시 말을 걸었다.

- 살면서 거짓말한 게 처음도 아니면서 뭘 그렇게 가라앉아 있는 거야.

“저는 원래 거짓말을 안 해요.”

당당한 내 말에 서지한이 아니꼬운 표정을 지었다.

- 흐음, 정직한 성격이다 이거야?

“아뇨, 어릴 때부터 뭔가 숨겨도 늘 바로 들통나더라고요. 그래서 자꾸 금방 들키니까 안 하게 되었어요. 그리고 솔직히 지금도 들킬까 봐 너무 불안해서 다 털어놓고 싶어요.”

정말 이상하게도 엄마는 내가 무슨 거짓말을 하든 늘 알아챘다.

엄마뿐만이 아니다.

친구도, 선생님도, 회사 사람도.

내 거짓말은 늘 얼마 가지 못해 들켰다.

내 말에 서지한이 뭔가를 떠올렸는지 고개를 주억거리며 저 혼자 납득했다.

- 하긴, 그 연기력을 생각하면…….

“네?”

- 아무것도 아냐.

하긴, 저 성격이면 뭔가를 치밀하게 감추는 것도 힘들겠지, 같은 기분 나쁜 말을 중얼거리던 그가 가볍게 한 마디 툭 던졌다.

- 계속 거짓말을 하며 살 자신이 없으면, 차라리 헌터로 등록해서 살아.

“채집 스킬 하나밖에 없는데. 히든 스킬이 있긴 하지만 이거 밝혀도 될까요?”

- 괜찮겠지.

“아, 정말요?”

뭔가 엄청 안 좋은 일을 당할 것 같아서 무조건 숨기는 게 상책이라고 생각했는데 베테랑이 이렇게 말할 정도면 밝혀도 괜찮지 않을…….

- 일단 네 가족 목숨 줄부터 저당 잡힌 다음 온갖 협박 다 받으면서 평생 루팅만 하다가 죽겠지만, 뭐, 어쩔 수 있나.

야. 서지한.

울컥해서 그를 째려보자 서지한이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싱글벙글 웃는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 왜?

“그러면 안 되니까 지금 고민하고 있는 거잖아요. 일단 히든 스킬만은 절대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을 거예요. 으음, 남은 건 채집 스킬뿐인데 이거만 가지고 길드에 가도 받아줄까요?”

- 아니.

“그럴 거라고 생각은 했어요.”

으음, 전투 스킬이 하나도 없는 각성자가 각성 사실을 밝히고 할 만한 일이라.

아, 역시 그거밖에 없나.

“마켓 관리자 할까요? 돈도 많이 주고 일도 편한데.”

- 진심이야?

“어, 괜찮지 않나요?”

- 마켓 관리자를 하면 네 마켓 닉네임을 회사에 알려줘야 하는 거 아냐?

“그렇죠? 그래야 회사에서 제 업무상황을 알 수 있으니까……."

나의 얼떨떨한 대답에 서지한은 혀를 차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앞날이 정말 걱정된다는 표정이다.

- 아까 뉴스 못 봤나 본데, S급 에비타니스의 핵을 마켓에 올린 루터라는 각성자가 대체 누구인지 시끌시끌하던데. 네 신분이 밝혀진 다음 사람들이 s급 에비타니스의 핵을 어디서 얻었냐고 물으면 뭐라고 대답할 건데?

“아.”

아까 전화받을 때 뉴스 토론에서 잠깐 에비타니스를 언급하는 것 같았는데 그게 이 내용이었나 보다.

뉴스 기사에는 크게 뜨지 않았는데.

하긴, 헌터 업계 정보는 민간 뉴스에 잘 나오지 않으니까.

그럼 어떡하지?

잠깐, 내 스킬이 문제인 거지 각성 사실을 밝히는 것 정도는 별 문제가 없지 않나?

각성했는데 채집 스킬뿐이라고 하면 되잖아.

이 말을 그대로 했더니 서지한이 코웃음 쳤다.

- 그걸 과연 믿어줄까. 분명 스킬을 감추고 있다고 생각하겠지. 게다가 너는 얼마 전 소멸한 던전에 휩쓸린 사람이잖아. 충왕 케르기스의 죽음과 관련이 있다고 추측하는 놈들도 나올 거야.

“으음.”

- 그런 놈들이 달라붙어서 본격적으로 뒷조사를 시작하면, 네 허술한 연기로 그걸 빠져나갈 수 있겠어?

머리가 아프다.

사방이 꽉 막힌 치과 의자에 앉아있는 기분이었다.

서지한의 말을 한마디씩 들을 때마다 치과 드릴 소리가 한 옥타브씩 올라가는 것 같은 스트레스가 느껴졌다.

“결국 아무 방법 없이 숨기고 또 숨기다가 들통나면 그대로 끝장이라는 소리네요.”

서지한은 어깨만 으쓱했다.

그리고 제 일이 아니라고 태 연하게 대꾸했다.

- 너무 나쁘게 생각하지는 마.

“어떻게 나쁘게 생각을 안 해요?

하, 이런 이용당하기 딱 좋은 히든 스킬만 줘서 나더러 어쩌라고. 차라리 일반적인 헌터로 살 만큼만 힘이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 아주 땅을 파고 들어가겠군.

당사자는 심각해 죽겠는데 옆에서 계속 깐족거리는 말만 하는 서지한이 무척 얄미웠다.

그는 아까부터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방긋방긋 웃으며 나를 보고 있었다.

내가 고민하는 게 재밌냐?

- 방법이 아주 없는 건 아니지.

머리를 감싸 쥐고 끙끙 앓던 나는 슬쩍 고개를 들었다.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안 들어도 알겠다.

하지만 그 방법은…….

“던전 보스 잡으면 강해지게 해 준다는 거요?”

서지한은 여상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까딱였다.

너무 별일 아닌 것처럼 말해서 나도 순간 혹했을 정도지만, 역시 아냐.

그건 아냐.

“보스는 너무 무서워요……."

그날, 서지한과 싸우던 충왕 케르기스의 모습을 떠올리기만 해도 온몸이 움츠러들었다.

내가 겁을 잔뜩 집어먹자 서지한이 몇 번 설득하다가 결국 별수 없다는 듯 제안했다.

- 굳이 보스를 안 잡아줘도 조금 정도는 도와줄 수 있어.

뭐? 진짜?

“정말요?”

- 예전에 그놈 때릴 때 보니 힘을 가진다고 사람 마구 치고 다닐 것 같지도 않고, 조금 정도는 도와줘도 될 것 같아서.

“예전에 그놈? 아, 그 변태.”

바로 얼마 전에 있었던 일이라 금방 말귀를 알아들었다.

우리 집을 훔쳐보다가 야밤에 나에게 흠씬 두들겨 맞았던 그 남자를 이야기하는 거다.

“으음, 어떻게 강해지게 해 줄 건데요?”

가장 먼저 생각나는 건 서지한의 장비 아이템이었다.

사자의 낫과 그가 장비하고 있던 물건들 말이다.

하지만 그는 전혀 다른 아이템을 언급했다.

- 흠, 케르기스의 뿔을 가져왔다고 했지?

“네.”

케르기스의 뿔?

이건 그냥 재료 아이템 같은데.

아, 혹시 아는 아이템 제작자라도 있나?

하지만 그 사람이 내 신분을 감춰준다는 보장이 없잖아.

“그런데 저 제작 스킬 같은 건 없어요.”

- 그런 건 필요 없어. 일단 꺼내봐.

어쩌려고 그러는 거지?

일단 꺼내라고 하니, 인벤토리를 열어 케르기스의 뿔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밖으로 꺼낸 순간, 나는 기겁하고 뒤로 물러섰다.

인벤토리 안에서는 그저 한 칸을 차지하고 있을 뿐이던 케르기스의 뿔은 밖으로 나오자 어마어마한 크기로 돌변했다.

콰이앙.

거대한 케르기스의 뿔은 내 좁은 방의 한쪽 벽을 부수고 책장과 책상, 싱크대 일부까지 밀어 으스러뜨리며 모습을 드러냈다.

돌가루가 투둑 투둑 떨어지는 박살난 시멘트 벽, 부서진 책상 아래로 떨어진 컴퓨터, 뿔에 깔려 보이지도 않는 각종 세간살이 등.

가득 들어찬 케르기스의 뿔 때문에 내 방은 삽시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서지한 씨.”

엉망이 된 방에 망연하게 그의 이름을 부르자 서지한도 경악한 얼굴로 이 난장판을 쳐다보고 있었다.

- 아, 아니. 나도 몰랐어. 이렇게 클 줄은…….

그러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그는 드물게 말을 더듬으며 결백을 주장했다.

그 귀한 모습에도 불구하고 나는 빠진 넋을 회수하기 어려웠다.

어떻게 할 거야.

서지한 말대로 했는데 집이 부서졌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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