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23화 (23/231)

023화

핫초코를 단숨에 마셔버린 후.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잠시 기다리자 문을 열고 들어온 차장님이 사방을 두리번거리더니 나를 발견하고 반갑게 걸어왔다.

김수현 대리님도 함께.

“모아 씨. 잘 지냈어요? 이런, 얼굴에도 딱지가 졌네.”

내 건너편 소파에 앉으며 차장님이 안타까운 듯 말했다.

그 옆에 앉은 김 대리님도 비슷한 표정이었다.

내 딱지에 별 감흥이 없는 건 옆에 앉은 서지한 유령뿐인 것 같다.

“별로 아프지도 않아요. 살짝 긁힌 거예요. 살짝.”

“다행이네요. 그래도 얼굴 보니 좋다.”

마냥 웃는 차장님과 달리 김 대리님은 잔소리부터 할 기색이었다.

“밥은 먹었어요?”

“대충요. 그냥 집에 있는 걸로 먹었어요.”

혼자 뷔페 가서 밥 먹는 게 쉽지가 않다.

그날 이후로는 그냥 적당히 먹고 싶은 음식을 사서 먹고 있었다.

내 대답이 마음에 안 드는지 대리님의 눈매가 약간 사나워졌다.

“라면만 계속 먹으면 안 돼요.”

"치킨 먹었어요.”

대리님은 뭔가 말을 하려고 입을 벙긋거리다가 고개를 저어버렸다.

타이밍 좋게 음료가 나와서 다행이다.

치킨은 단백질이고 단백질은 몸에 좋다 고요, 대리님.

물론, 눈치가 있기 때문에 이 말을 하지는 않았다.

“두 분은 어떻게 지내셨어요?”

화제도 돌리고 잔소리도 피할 겸 안부를 묻자 대리님이 먼저 대답했다.

“별일은 없었어요. 퇴사 절차 밟고……."

“대리님도 퇴사하셨어요?”

"차장님도 하셨는걸요. 게다가 회사도 어차피 폐업 절차 밟고 있었고."

내 놀란 시선에 차장님이 새삼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사실 지난 인사평가에서 승진 누락됐을 때부터 계속 생각하고 있었어요.”

“하, 그건 진짜……."

김 대리님이 욕설을 삼키며 차가운 음료를 연신 마셨다.

지난 인사평가.

나도 생각난다.

지금처럼 1팀, 2팀으로 나뉘지 않고 마켓팀으로 통칭되던 시절의 이야기다.

회사의 사업 규모가 조금씩 커지고 업무량도 늘어나고 있었기 때문에 조만간 새로운 팀을 하나 더 만들 거라는 이야기가 내부적으로 조금씩 돌고 있었다.

그리고 차장님의 실적이 가장 좋았으므로 새 팀이 생긴다면 분명 차장님이 팀장이 될 거라고 다들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승진자 명단에 차장님의 이름은 없었다.

대신, 하루 근무시간의 8할을 담배 피우고 수다 떠느라 자리를 비우는 남자 과장이 그 자리를 채웠다.

그 사람이 2팀 팀장이 된 것이다.

우리는 그제야 너무 자주 자리를 비우지 말라는 차장님의 말에 과장이 왜 그렇게 건성으로 대답했는지.

그리고 담배를 피우고 돌아오면 늘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고 있었는지 알게 되었다.

다들 차장님이 곧 퇴사할 거라고 생각했다.

부하직원을 상사로 모시게 된 셈이니 사실상 이건 나가라고 등 떠민 거나 마찬가지라는 뒷말도 나왔다.

그러나 차장님은 버텼고, 덕분에 우리도 버틸 수 있었다.

“됐어요. 지나간 이야기 자꾸 꺼내서 뭐해요. 어차피 이미 다 끝난 일인걸.”

“맞아요. 괜히 화만 나죠!”

내가 차장님의 말에 맞장구를 쳐도 김 대리님은 화가 가라앉지 않는지 얼음만 까득까득 씹었다.

그러더니 문득 뭔가 떠올랐는지 차게 웃었다.

“그래도 인과응보라는 게 있나 보네요. 그 치들, 죽은 거 슬프지도 않아요. 사실 합동장례식 안 간 이유도 그거 때문이에요. 가서 웃을까 봐.”

“수현 씨!”

차장님의 외침에 대리님은 약간 찔끔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대수롭지 않게 앞에 놓인 치즈케이크를 퍼먹었다.

2년 동안 질리게 본 모습이다.

다혈질이고 화가 많은 대리님이 선을 넘는 발언을 하면 차장님이 브레이크를 거는 모습.

어차피 하루 이틀 본 사이도 아니고, 너무나 익숙한 대화 패턴이라 언성이 높아졌는데도 편안함이 느껴질 지경이다.

대화가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들고 각자 음료만 쪼록쪼록 빨아먹는 소리가 테이블을 채웠다.

다시 대화를 시작한 것은 차장님이었다.

“사실 퇴사하면서 불안이 없었던 건 아니에요. 나는 나이도 있고, 새 직장을 잡지 못할지도 모르니까. 지금 이직한다면, 팀장급으로 어딘가로 가야 하는데 팀장 자리가 많이 나지는 않거든요. 두 사람이랑은 처지가 좀 다르죠.”

“아, 차장님……."

능력이 있으니 분명 잘될 거라고 말해줘야 하는데 이 말마저 너무 가벼운 위로로 느껴질까 봐 차마 말을 못 하자 대리님이 버럭 나섰다.

“아, 차장님. 왜 애를 놀리고 그러세요. 모아 씨 놀랐잖아요.”

"네? 놀려요?”

“김 대리님, 지금 말하려고 하던 참이었잖아요. 아무튼, 그렇게 걱정했는데 다행히 이직처가 정해졌어요.”

“오! 어디요?”

차장님이 커피를 한 모금 마시더니씨익 웃으며 말했다.

“백광 길드. 헌터 지원 4팀 팀장으로.”

“나도 팀원으로 같이 채용됐어요.”

김 대리님이 장난스럽게 손을 흔들었다.

나는 솔직히 좀 놀랐다.

그냥 일반적인 회사나, 다른 헌터 마켓 중개 회사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본격적인 길드라니.

하지만 한 가지 걱정되는 부분이 있었다.

“그게, 어디예요?”

한국에 헌터 길드가 많은 것도 아닌데, 진짜 생전 처음 들어보는 길드다.

차장님 혹시 사기당하신 건 아니겠지?

“대한 길드 소속 헌터가 나와서 새로 차린 길드예요. 정부에서 정식인가도 받았는데, 아직 언론 발표는 안 됐어요.”

“스타트업이라고요? 차장님, 스타트업은 가지 말라고 저한테 분명……."

“모아 씨, 무슨 걱정하는지 알아요.일이 정말 말도 못 하게 많겠죠. 하지만, 좋은 기회잖아요.”

그렇게까지 말하니 할 말이 없어졌다.

에이, 차장님이 어련히 잘 결정하셨겠지.

괜히 초치지 말고 축하나 해주자.

“아, 축하드려요, 차장님. 거기서도 분명 잘하실 거예요.”

"그렇게 남의 일 말하듯 하지 말아요. 모아 씨. 사실 오늘 찾아온 것도, 새 직장 정해지고 김 대리님이랑 이렇게 팀 꾸리고 나니까 모아 씨 생각이 나더라고요.”

아, 무슨 말을 꺼내렸는지 알겠다.

차장님의 입에서 예상했던 뒷말이 이어졌다.

“나랑 같이 백광 길드에서 일하지 않을래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내가 한참 동안 대답을 못하자 차장님은 백광 길드의 장점을 이것저것 늘어놓았다.

대한 길드에서 갑자기 빠져나왔는데도 팀을 4개나 꾸릴 수 있을 만큼 길드장의 인망이 좋다거나, 월급도 기존보다 훨씬 올라간다거나 하는 이야기들.

분명 굉장히 좋은 기회였다.

예전의 나였다면.

“차장님, 감사하지만 아직 좀 더 쉬고 싶어요.”

“아, 그래요. 큰일이 있었으니까.언제든 연락 줘요.”

두 사람은 약간 실망한 기색이었다.

내가 무척 좋아하며 당장 가겠다고 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영 떨떠름한 반응이었던 모양이다.

분명 각성 전이었다면 뛸 듯이 기뻐했겠지만…….

약간 불편한 기분으로 컵의 얼음만 휘젓는데, 차장님이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그런데 모아 씨, 지금 사는 집 반지하라고 했죠?”

“네. 왜 그러세요?”

대리님과 잠시 눈빛을 주고받은 차장님이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내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약간 도톰한 흰색 봉투다.

흔히, 돈 봉투라고 말하는 물건이다.

“차장님?”

“이거, 김 대리랑 내가 같이 모은 거예요. 부담 가지지 말고 받아주세요.”

내 앞으로 봉투를 쓰윽 밀며 차장님이 진지하게 말했다.

잠깐, 이거 무슨 분위기지?

“이런 거 받을 수 없어요!”

내가 봉투를 열어보지도 않고 화들짝 놀라 손사래치자 김 대리님은 직접 봉투를 집어 내 손에 쥐여 주었다.

이 감촉은, 최근 돈뭉치를 꽤 많이 만져본 내 감각이 말하건대 100장 한 뭉치 정도다.

“우리를 위해서라도 받아주세요.모아 씨.”

김 대리님까지 그렇게 말하자 나는 어쩔 줄 모르고 돈 봉투를 쥔 채 망연해 했다.

“사실, 이제 와서 이런 말 하는 것도 우습지만 회사 다닐 때도 모아 씨가 혼자 반지하에 살고 있는 게 계속 마음에 걸렸어요. 이거로 보증금 해서 제대로 된 집으로 이사해요.”

“맞아요. 거기는 너무 위험해요. 이런 말 하면 모아 씨가 별일 없다고 늘 말하긴 했지만, 지금까지 별일 없었다고 앞으로도 별일이 없으리라는 보장이 없잖아요.”

당장 며칠 전에 별일이 생겨서 그놈을 흠씬 두들겨 패준 나로서는 할 말이 없다.

그렇다고 해서, 이 돈을 받겠다는 뜻은 아니었다.

벼룩의 간을 뽑아먹는 셈이잖아, 이거.

“모아 씨가 던전에서 우리에게 해준 일, 평생 기억할 거예요. 그리고 이 정도는 충분히 받아 마땅해요.”

"맞아요. 앞으로도 뭔가 힘든 일 있으면 말해요. 은인이니까.”

차장님의 말에 대리님까지 이렇게 맞장구를 치니 내가 거절의 말을 해도 앙탈 정도가 되어버린다.

그렇다고 각성자인 내가 월급쟁이의 소중한 돈을 빼먹을 수는 없는데.

뭔가, 뭔가 방법이 없을까?

그래. 이렇게까지 말한다면 두 사람에게만큼은 각성 사실을 말해도 괜찮을지도 몰라.

“차장님, 대리님, 저 사실……."

- 안 돼.

충동적으로 입을 열려는 순간, 서지한이 단호하게 끼어들었다.

왜? 두 사람이 어디 가서 말할까 봐?

그는 차장님과 대리님을 잘 모르니 그렇게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2년 가까이 함께 지내며 본 바로는 두 사람은 절대 그럴 인물이 아니었다.

“드릴 말씀이……."

- 각성했다고 말할 거라면 정말 안 좋은 생각이라고 말해주고 싶군.

멈칫.

사실 유령이 뭐라고 한들 그냥 무시하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 그만이지만, 서지한은 헌터계의 베테랑 중의 베테랑이다.

그의 조언을 무시하기는 쉽지 않았다.

“네, 모아 씨. 할 말이 뭐예요?”

- 잠깐 이야기 좀 하지.

서지한의 대화 요청에 나는 결국 어색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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