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1 화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얼굴이 좀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
말을 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면, 그러게 작전을 미리 말해주지 그랬냐고 항변하고 싶다.
“읍, 으븝, 읍.”
아래에 깔린 남자는 내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나도 그래.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어, 변태야.
- 따라 해. 조용히 하는 게 좋을 거야.
“조. 용. 히 하. 는 게. 좋. 을. 거야.”
서지한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 어쩌라고요!
이게 최선이라고요!
내가 평생 이런 말 할 일이 있었어야지!
- 여기를 손가락으로 짚고 살짝 눌러.
그가 손으로 남자의 등 쪽, 갈비뼈 사이를 가리켰다.
일단 시키는 대로 하긴 하는데 뭘 하고 싶은 건지 모르겠네.
- 따라 해. 폐를 뚫으면 소리를 못 지르겠지.
잠깐만요.
그거 제가 뚫어야 해요? 내 손가락으로? 여기 찔러서?
저기요? 이런 말은 없었잖아요?
제가 그걸 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은데요.
좀 더 온건한 방법은 없을까요?
내가 고개를 짧게 저으며 거부하자 서지한이 인상을 쓰며 재촉했다.
- 어서 해.
결국 나는 울며 겨자 먹기로 남자의 갈비뼈 사이에 손가락을 꾹 찔렀다.
아래에 깔린 남자가 방금 낚은 생선처럼 펄떡거리며 발악했다.
“폐. 를. 뚫. 으. 면 소. 리. 를. 못. 지르겠.지.”
- 그 말투 어떻게 안 되나? 뭐, 됐어. 이상한 말투라 그런지 놈도 너를 미친놈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으니 계속 하지.
뭐? 이 변태가 누구보고 미친놈이래!
화가 나서 몸을 콱 짓눌렀더니 남자가 끄응 하고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 그러다 죽겠다. 살살 눌러. 자, 다음 대사 해. 조용히 할래? 아니면 내가 해줄까.
“조용히 할래? 아니면 내가 해줄까?”
- 방금 뭐지? 엄청 자연스러웠어.
고마워요. 진심이 약간 섞였거든.
아무튼 남자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조용히 한다는 뜻이겠지? 조용히 안 할 거라는 뜻으로 고개 흔드는 건 아니겠지?
- 천천히 놔주고 마스크 벗겨내고 목 잡아.
입을 막은 손을 떼어냈는데도 남자는 소리를 내지 않았다.
대신 두려움에 젖은 눈으로 나를 쳐다볼 뿐이었다.
서지한의 지시대로 마스크를 벗겨내고 목을 잡았는데, 손 크기 때문에 울대를 틀어쥔 모양새가 되었다.
- 으음, 생각한 것과 그림이 좀 다르지만 나름대로 괜찮겠지. 목을 잡고 들어 올리라고 하려 했는데, 그럼 목이 뜯기겠군. 여차하면 뜯어버려.
목을대를요? 너무 끔찍하지 않을까요?
아니. 너무 끔찍하잖아. 나한테 뭘 시키려는 거야.
나는 최대한 남자가 조용히 하길 바랐다.
진심이었다.
당신 목 줄기 뜯기 싫어요.
제발 말 잘 들으세요.
저는 살면서 뜯어본 줄기는 고구마 줄기밖에 없는 사람이라고요.
- 다시, 대사. 누가 보냈어?
“누. 가 보. 냈. 어.”
- 연기가 악화됐잖아.
서지한이 뭐라고 하든 나는 무시하고 눈앞의 남자에게 집중했다.
내가 배우야 뭐야.
이 정도면 충분히 잘하는 거지.
“보, 보낸 사람 없습니다. 정말입니다. 저는 그냥 지나가던 사람……."
그는 식은땀을 흘리며 말을 더듬었다.
몸 위에 앉아 있는 나에게도 전해질만큼 등이 땀에 젖는 것이 느껴졌다.
“지나가던 사람?”
서지한이 분명 봤고, 나도 이 자식이 창문에 끼워둔 종이를 밀어내는 걸 봤는데 어디서 발뺌이야.
경찰을 불렀어도 분명 이런저런 이유를 둘러대고 빠져나갔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화를 참기가 힘들어진다.
- 말해. 그 말에 목숨 걸 수 있나?목 잡은 손에 힘 좀 주고, 조심해.목뼈 안 부러지게.
“그 말. 에. 목숨. 걸. 수. 있나?”
목의 숨통을 뜯어낼 듯 쥐었더니 남자가 컥컥하고 숨 막히는 소리를 냈다.
잠시 그러고 있었더니 남자는 갑자기 눈물을 줄줄 흘리며 죄를 실토했다.
이렇게 쉽게?
“죄송합니다. 제가 사람을 못 알아봤습니다. 제발 한 번만 봐주십시오.다시는 안 그러겠습니다.”
- 못 믿겠는데.
“못. 믿겠. 는. 데.”
남자는 어둠 속에서도 알 수 있을 만큼 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 그럼 제가 어떻게……."
- 진심이면 성의 표시를 해야지.
“진. 심. 이. 면. 성. 의. 표. 시. 를. 해. 야.지.”
“아, 당연히 하지요. 성의 표시, 여, 여기 지갑……."
남자가 목이 잡힌 채 손으로 제 옷을 더듬어 지갑을 꺼냈다.
원하는 게 돈이었냐는 듯 급속도로 침착함을 되찾는 남자가 굉장히 꼴 보기 싫었다.
서지한이 시키는 거 무시하고 확 패 버릴까 하는데, 다음 지시가 내려왔다.
- 눈 한쪽에 손 올리고, 말해. 하나 뽑자.
저기요, 잠시만요.
이것도 뽑으면 제가 뽑는 거죠?
울상을 짓고 싶은데 표정관리를 해야 해서 그것도 못한다.
서지한이 턱짓하며 재촉했다.
- 어서 말해.
아, 진짜 싫은데.
“하나. 뽑자.”
“힉, 히이익, 히익!”
그 말을 듣기가 무섭게 무언가가 뜨뜻해진다 싶더니 바닥에 조르륵 떨어졌다.
남자가 오줌을 지린 것이다.
으악, 더러워!
나는 서지한의 말도 듣지 않고 남자를 바닥에 패대기치고 말았다.
도망가면 어쩌나 했는데 남자는 내 손이 닿아 있지 않아도 그 자리에서 옴짝 달싹도 못한 채 떨고 있었다.
“사, 살려주세요. 제가 사람을 잘못 봤습니다. 제발 살려주세요. 부탁드립니다. 선생님, 한 번만 살려주십시오.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빌고 있는 남자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서지한이 지갑을 가리켰다.
내가 남자를 집어던진 바람에 튕겨져 나간 지갑이 저만치에 구르고 있었다.
- 지갑 챙겨.
나는 바닥에 떨어져 있는 남자의 지갑을 주웠다.
열어보니 명함과 주민등록증, 카드와 지폐가 들어 있었다.
뭐야. 꽤 번듯한 대기업 다니는 사람이잖아.
- 말해. 놈에게 전해. 내가 찾아가겠다고.
놈은 또 누구고 나는 누구를 찾아가야 하는가.
이런 의문에 대해 나는 반쯤 포기한 상태로 대사를 말했다.
이것도 슬슬 좀 익숙해지네.
“놈에게 전해. 내가 찾아가겠다고.”
- 오늘은 이것만 받지.
“오늘은 이것만 받지.”
아, 지갑 가지고 있으면 어차피 신원 알고 있으니 함부로 행동 못하겠구나.
음, 이것도 좋은 방법이지.
마음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는데 서지한이 받으라던 건 지갑이 아니었다.
- 손목 잡고 비틀어.
“손목……."
잠깐, 대사가 아니었구나. 네? 정말요? 제가 비틀어요?
- 어서 해. 별거 아냐.
아니, 엄청 별건데.
진짜 엄청 별건데요!
이것만은 못하겠다는 듯 계속해서 거부하자 서지한이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 그럼 대충 몇 대 때려주고 보내.
나도 그러고 싶은데 오줌 지린 남자에게 손을 대고 싶지가 않다.
결국 분풀이로 몇 대 걷어찬 게 전부였다.
솔직히 계속 떨고 있고, 지저분하기도 해서 때리고 싶지는 않았는데 그냥 보내면 나중에 후회할 것 같아서.
- 꺼져.
“꺼져.”
내 허락이 떨어지자 남자는 기듯이 뛰며 비틀비틀 어두운 골목 안으로 줄행랑쳤다.
지갑도 내 손에 있으니, 이걸로 경찰에 신고나 하면 되겠지.
하지만 서지한은 좀 다른 방식의 해결 방법을 제시했다.
- 그 명함은 보관해놔. 은원 관계 전문 헌터가 있으니까. 나중에 기회가 되면 저주술사에게 저주라도 내려달라고 하면 좋겠지.
서지한은 싱글싱글 웃으며 집으로 가자는 듯 앞장섰다.
나는 그와 지갑을 번갈아 보다가 결국 지갑을 인벤토리에 넣어두었다.
그리고 아까부터 좀 궁금했던 부분을 물어봤다.
“그런데, 저 누구 찾아가야 해요?”
- 아니. 그냥 그렇게 말해두면 네가 함부로 접근하기 위험한 상대라고 인식해서 다시 찾아오지 않을 거야.
아하. 역시.
그런 블러핑일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혹시나 서지한이 아는 사람 인가 했지.
"으음."
- 공갈과 협박은 언제나 좋은 화술이지.
“화술은 아닌 거 같은데……."
나의 딴지에도 서지한은 어깨만 으쓱했다.
그리고 서지한의 말대로 그 변태가 다시 이 집에 찾아오는 일은 없었다.
다년간 남 협박하는데 이골이 난전 투헌터의 방법은 정말로 잘 먹혔던 것이다.
그리고 아주 약간, 나는 서지한에 대한 소문의 실체를 본 것 같은 기분이었다.
* * *
“사람을 그렇게까지 때려본 건 처음이에요.”
TV를 보고 있던 서지한이 지겨운 표정으로 나를 흘긋 쳐다보았다.
야밤의 변태 응징 사건으로부터 며칠이 지났지만 나는 아직도 그날을 종종 떠올렸다.
당일에는 방으로 들어와서도 흥분한 나머지 한참 동안 잠을 못 이뤘을 정도였다.
솔직히 아직도 발에 남자를 걷어차던 감촉이 남아 있는 것만 같다.
- 도대체 언제까지 되새김질할 거야.
대꾸하지 않자 서지한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보고 있던 뉴스로 시선을 돌렸다.
TV를 틀어주기 전까지 서지한은 내가 청소하거나 빨래를 개거나 방을 정리하는 것을 빤히 구경하곤 했다.
자는 나를 가만히 쳐다보거나.
어쩌다 잠깐이면 몰라도 며칠 동안이나 계속 그렇게 빤히 쳐다보고 있으니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었다.
결국 그만 좀 보라고 했더니 당당한 대답이 돌아왔다.
- 할 게 없잖아.
그건 사실이다.
유령이 된 그가 휴대폰 게임을 하겠어, 책을 읽겠어?
그렇다고 싱크대의 수세미를 하루 종일 보거나, 벽지 무늬를 셀 수도 없잖아.
생각만 해도 심심하네.
뒤늦게 아차해서 TV를 틀어줬더니 그는 그제야 나를 빤히 쳐다보는 것을 그만두었다.
진작 이럴걸.
그가 보고 있는 TV에서는 아직도 내가 휘말렸던 던전 생성 폭발에 대해 방송하고 있었다.
피해가 컸던 탓인지 신문이고 TV고 연일 그 이야기로 떠들썩했다.
하긴, 피해가 적은 던전 생성 폭발이 어디 있어.
그래도 이번에 터진 던전 생성 폭발은 던전이 생성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소멸해서 던전 안으로 빨려 들어간 공간이 금방 회수된 덕분에 피해가 적은 편이었다.
폭발의 범위는 우리 회사가 있던 지역과 그 인근 8개 동이었다.
그 지역 전체가 던전 안에 삼켜졌다가 던전이 소멸하면서 다시 돌아왔는데, 덕분에 중간에서 끊긴 가스관으로 인한 폭발, 던전 안에서 공격당해서 파손당한 건물, 실종된 사람들로 인근이 아주 난리였다.
그래도 이런 던전 생성 폭발이 한번 일어나면 그 지역 전체가 증발해버리는 게 일반적이어서, 희생이 큰 와중에도 뉴스에서는 살아 돌아온 사람들을 조명하며 희망적인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었다.
지금 보고 있는 것은 네 명이 출연한 토론형 뉴스였다.
말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다양한 의견을 전달하는 형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