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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0화 (20/231)

020화

이런 본격적인 장비 아이템을 실제로 만져보는 건 처음이라 마치 동화에 들어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와, 줄어드는 거 신기해.

얼떨떨하게 반지를 만지고 있는데 눈앞에 알림창이 떠올랐다.

- ‘묵시의 청금석 반지(등급 미감정)’를 착용하였습니다.

- 착용 효과로 사용자의 힘이 10(최소치 조정) 증가하였습니다.

“엑.”

메시지를 읽고 놀란 얼굴 그대로 서지한을 바라보자 그가 약간 쑥스러운 듯 조용히 입을 열었다.

- 사실 아침에 이불을 내다 버릴 때 말해줄까 했는데…….

내가 무거운 거 들고 힘들게 가는 게 마음에 걸렸다고?

그런 건 신경도 안 쓰는 줄 알았는데.

세상에, 서지한.

감격에 찬 눈길로 그를 쳐다보자 그가 헛기침을 하며 어서 가자고 앞서 걷기 시작했다.

어차피 영혼석이 내 손에 있는 이상 3미터 넘게 떨어지지 못하는데.

서지한은 결국 몇 걸음 걷다가 제자리걸음을 하곤 다시 돌아왔다.

대체 이 사람에 대한 나쁜 소문은 누가 퍼뜨린 거야?

분명 성격 더럽고 음습하고 못생기고 서지한보다 약한 놈이 질투해서 퍼뜨린 걸 거야.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이 이야기를 서지한에게 했더니 그는 폭소를 터뜨렸다.

그렇게 시원하게 웃는 건 처음 봤다.

아무튼 그렇게 청춘드라마 같은 상큼한 웃음을 머금고 집으로 돌아온 것까지는 좋았는데…….

빈곤한 단칸방을 보니 갑자기 현실감이 확 들었다.

여기저기 늘어선 살림살이와 낡은 창문, 나가는 길에 대충 창문 틈에 끼워 넣었던 종이 뭉치가 눈에 들어오자 간신히 잊고 있던 불안이 떠올랐다.

순찰 돈다고 했으니 괜찮을 거야.

설마 또 오겠어?

경찰이 돌아다니면 그렇게 수상한 짓을 하지는 못하겠지.

애써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 해도 쉽지가 않다.

엄마 집이라도 근처에 있었다면 오늘 밤은 거기로 갔겠지만 본가는 서울에서 한참 떨어진 거제도였다.

- 그렇게 불안해할 거면서 왜 이 집으로 돌아온 거야.

“친구들은 다 가족이랑 살아서 재워달라고 부탁하기가 좀 그래요.”

- 그게 아니라, 밥 먹었던 그 호텔에서 며칠 묵으며 집을 구하면 됐잖아.

“아.”

생각지도 못한 선택지라 깜짝 놀랐더니 서지한이 혀를 찼다.

- 호텔은 숙박업소야. 밥집이 아니라.

핀잔 주는 말을 듣고 있으니 좀 억울해진다.

“제 월급으로 서울에서 자취하면서 여차하면 호텔에서 잠자는 식의 소비습관을 가졌다간 빚 부자 신세를 면치 못했을걸요.”

내 대꾸에 서지한은 어깨만 으쓱했다.

확실히 밤이 되니까 좀 무섭긴 하는데, 지금이라도 호텔을 갈까?

- 아니면, 다른 방법도 있지.

“어떤 방법이요?”

서지한이 내 손을 가리켰다.

정확히는 아까 나에게 준 청금석 반지를.

- 인벤토리에 그렇게 좋은 아이템을 가득 가지고도 불안해하는 건 너뿐일 거다. 그걸 믿고 집으로 온 건가 했는데, 그것도 아닌 것 같군.

“그건 제 물건이 아니라 서지한 씨 거잖아요. 남의 물건을 함부로 쓰면 안 된다는 건 상식이거든요.”

- 뭐 어때. 죽은 사람 물건이니 주인 없는 거나 다름없지. 그냥 네 거라고 생각해.

그는 그렇게 말했지만 나는 그렇게 하기 힘들었다.

주인이 없다니? 죽었다니?

지금 내 옆에서 꼬치꼬치 잔소리하고 있는 이 사람은 누구야?

적어도 나에게는 서지한은 현재 내 옆에 있는 사람이었다.

죽어서 떠난 사람이 아니라. 그러니 ‘응, 너 죽었으니까 이거 내 마음대로 쓸게. 억울하면 살아나든가’라고 하기는 좀…….

“죽은 사람 치고는 좀 수다스러운데요.”

부루퉁하게 말했는데 그는 오히려 즐거운 얼굴로 짧게 웃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어 음모를 꾸미듯 은밀하게 제안했다.

- 아니면 내 방식대로 이 일을 처리해볼래?

“서지한 씨 방식이요……?”

좀 꺼림칙해서 나도 모르게 대답이 떨떠름하게 나갔다.

그런 나를 꼬여내듯 그가 다시 속삭였다.

- 재밌을 거야.

“재미……."

- 그 새끼를 응징하고 싶지 않아?

“당연히 하고 싶죠.”

으음. 뭔가 좀 꺼림칙한데.

하지만 서지한이 나에게 나쁜 일을 할 것 같지는 않다.

적어도 악의는 없어 보였다.

아니, 오히려 나에게 약간 호감을 가진 것 같다.

착각일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처음 만났을 때 대놓고 경계하며 싫어하던 태도보다는 훨씬 호의적이니까.

- 할래?

그는 수년간 전투계 헌터로 잔뼈가 굵은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라면 이 정도 일은 별것도 아니겠지.

비록 지금은 유령 상태라서 조언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지만, 베테랑의 조언이니 굉장히 도움이 될 게틀림없다.

“할래요.”

결국 나는 이렇게 대답하고 말았다.

서지한이 환하게 웃는 모습이 조금, 아니, 굉장히 찜찜했지만 그 변태 자식을 응징하고 싶다는 내 의지는 진짜니까.

솔직히, 세계에서 가장 강한 헌터의 조언이 좀 기대되기도 하고.

- 그럼 일단 자.

“네?”

- 새벽에나 올 거야. 음, 한두 시쯤이었던 것 같군. 기다리다 지쳐서 잠들면 안 되니까 지금부터 자라고.12시까지는 자고 있어.

충분히 논리적인 이유였기 때문에 나는 새로 사 온 이불을 깔고 대충 씻은 뒤 자리에 누웠다.

잠이 드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안 그래도 실컷 먹고 밖을 돌아다녔더니 식곤증과 피로가 섞여 잠이 살살 오던 참이었기 때문이다.

“그럼, 잘게요.”

마지막으로 서지한을 한번 일별하고 나는 눈을 감았다.

그렇게 몇 시간 자다가 진동 소리에 눈을 떴는데, 어두운 방에서 어슴푸레하게 서지한의 투명한 몸이 보였다.

손을 뻗어 알람을 끄고 일어나려 하자 그가 내 행동을 제지했다.

- 그대로 누워 있어. 자는 척해.

“왔어요?”

- 아니. 하지만 그래야 방심시킬 수 있으니까.

그의 말대로 일단 가만히 기다리기로 하고 누워 있는데 갑자기 슬슬 불안해졌다.

왜 계획을 미리 말해주지 않지?

“그 사람이 오면 경찰을 불러야겠죠?”

- 경찰은 부르지 마. 어차피 별 도움이 안 될 거야.

“하지만……."

- 순찰차의 그림자도 안 보이던데

순찰 강화해준다던 소리는 역시 그냥 말뿐이었던 모양이다.

“그럼 어떡하게요?”

- 일단 잡아야지.

“제가요? 잡을 수 있을까요?”

- 지금 네 힘은 어지간한 성인 남성의 두 배 정도 수준일 거야. 그 정도면 충분하지. 여차하면 다른 아이템을 써도 되고.

확실히 청금석 반지 덕분에 힘이 세지긴 했지.

마트에서도 내가 갑자기 이불을 감자칩처럼 가볍게 들고나가자 사람들이 깜짝 놀라는 바람에 괜히 무거운 척을 하기도 했다.

헌터라 그런지 법보다 주먹을 더 선호하는군.

하긴, 헌터들의 대부분이 법망 밖에 있는 사람들이다 보니 일반인과는 감각이 다를 수밖에 없다.

좋아, 잡는 건 그렇다고 치고.

그 외 다른 계획에 대해 아는 게 하나도 없는데 왜 말을 안 해주는 거야.

“잡아서 어떻게 할……."

- 쉿, 왔다.

서지한이 갑자기 손을 뻗으며 내 입을 막았다.

유령이라 아무 감촉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갑자기 가까이 오니 놀라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리고 침묵하는 내 귓가에 아주 작은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사삭, 스륵, 툭.

문틈에 끼워놨던 종이뭉치가 집 안으로 밀려나 떨어지는 소리다.

온몸의 신경이 곤두섰다.

설마 했는데, 정말 왔잖아?

- 널 보고 있군. 지금부터 내가 시키는 대로 해.

말을 하면 자고 있지 않다는 걸 들킬 테니 나는 짧게 고갯짓만 했다.

하지만 그것도 하면 안 됐던 모양이다.

서지한이 바로 지적했다.

- 대답할 필요 없어. 그냥 내가 하라는 대로만 움직여. 일단, 방금 깬 것처럼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말대로 일단 기지개를 켜고 밤중에 갑자기 깼다는 설정으로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 문 열고 밖으로 나가.

갑자기요?

일단 시키니까 하긴 하겠는데, 이래도 괜찮을까.

“도망가지 않을까요?”

현관문을 나와 소곤거리자 그가 고개를 저었다.

- 기다리고 있군.

으아, 변태 새끼.

내가 밖으로 나오면 무슨 짓을 하려고!

소름이 쫙 끼침과 동시에 화가 치솟았다.

그래, 해보자.

아주 본때를 보여준다. 얼굴에 주먹질을 그냥, 어?

솔직히 좀 무서워서 되는대로 기세를 끌어올리며 밖으로 나왔는데 놈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뭐야? 도망갔나?

- 골목에 숨어 있다. 달려가서 제압해. 밀어서 땅에 쓰러뜨린 다음 눌러.

침을 꿀꺽 삼키고 각오를 다진 후 골목으로 뛰어갔더니 정말로 있었다.

이 밤중에 모자를 푹 눌러쓰고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왜소한 남자가.

어떻게 봐도 수상한 놈이다.

- 제압해.

나는 그대로 놈을 밀쳐서 바닥에 넘어뜨렸다.

가볍게 밀었더니 쉽게 쓰러졌다.

그 위에 올라타고 등을 꽉 누르자 남자가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악, 갑자기 뭐……."

- 입 막아.

마스크 위로 입을 콱 틀어막았다.

남자는 읍읍 소리를 내긴 했지만 바르작거리기만 할 뿐 아무것도 하지 못 했다.

와, 진짜 약하네.

그나저나, 이제 어떡하지? 때리면 되나?

고개를 들자 서지한이 무척 즐거운 얼굴로 나와 남자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엄청 사악한 웃음이다.

- 자,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따라 해. 누가 보냈지?

네? 찾아올 사람 없는데요?

갑자기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어리둥절하게 쳐다보자 그가 손을 흔들어 말을 재촉했다.

- 빨리. 누가 보냈지? 하고 말해. 목소리 깔고.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알 수 없지만 일단 시키는 대로 하기로 했다.

서지한의 조언을 듣기로 했으니까.

“누. 가 보냈. 지.”

당연히 내 의도라곤 조금도 섞이지 않은 말은 무척 어색하게 흘러나왔다.

나의 대사를 들은 서지한이 어처구니없는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 세상에, 앞으로 연기는 절대로 하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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