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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9화 (19/231)

019화

“당연하죠. 던전만 위험하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것도 아니었잖아요. 새벽에 저 자는 거 쳐다보던 그 미친놈. 힘만 있었으면 바로 그냥, 어휴.”

- 혼내주고 싶으면 방법이 없는 건 아니야. 그리고 힘을 원한다면, 얻을 수 있는 방법도 있지.

굉장히 솔깃한 이야기였다.

깜짝 놀라 먹던 육회를 꿀꺽 삼키고 그를 쳐다보자 그가 너무나 신중한 얼굴로 엄숙하게 입을 열었다.

- 방법을 알려줄 수는 있어. 하지만, 한 가지 나와 약속해줬으면 하는 게 있다.

“뭔데요?”

- 힘이 닿는 한, 이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던전의 보스를 죽이겠다고 약속해줘.

“예?”

잠깐. 당신, 나를 얼마나 강하게 만들 생각인데?

“보스요?”

잘못 들었나 싶어 묻자 서지한은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 그래, 보스.

“그게 몇이나 되는데요?”

직장인의 기본은 업무량이 얼마나 되는지 파악하는 것이다.

예전에는 무턱대고 열정을 앞세워 나서다가 헬게이트에 발을 들여놓은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김 대리님이 구해주지 않았다면 아직도 지난 거래 장부를 정리하며 그 창고에서 늙고 있었을 거야.

- 확실치는 않지만, 던전은 약 60개 정도가 있는 걸로 알고 있다. 각국의 던전 개수는 기밀이니 이보다 좀 더 많을 수도 있지.

“안 할래요.”

망설임의 조각도 없이 즉답하자 서지한이 약간 놀랐다.

이렇게까지 단호하게 대답할 줄은 몰랐다는 표정이었다.

- 왜?

“무서우니까요.”

허세 하나 없는 담백한 대답에 그는 할 말을 잃은 것 같았다.

서지한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다시 물었다.

- 힘이 탐나지 않나?

“탐은 나지만, 던전에 다시 들어가고 싶지 않아요. 보스를 마주치는 건 더 싫고요.”

서지한이 싸우는 걸 멀리서 지켜보기만 했는데도 오금이 저렸다.

내가 아무리 강해져도 그처럼 싸우지는 못 할 것 같다.

그런 나를 도무지 상상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던전 안에서 얼마나 굳게 다짐했던가.

이 던전만 나오면 내 수십억이랑 소박하고 행복하게 알콩달콩 살 거라고.

- 계산기를 좀 두드려보지도 않고?

이건 계산기를 꺼낼 필요조차 없는 문제다.

개고생 하며 무서운 괴물과 싸우고 강해지기 VS 안 강해지고 돈 펑펑 쓰며 행복하게 살기.

이 두 가지 선택지 중에서 고르라는 건데, 당연히 후자를 골라야지!

오히려 서지한이 이렇게 떠보며 질척거리니 마음이 한층 더 굳어졌다.

뭔가 수상해.

느낌이 안 좋아.

이런 식으로 구슬리는 걸 따라갔다가 야근한 게 한두 번이 아니지.

‘모아 씨, 족발 좋아해? 오늘 저녁은 족발 먹을까?’라는 공 대리님을 ‘와, 족발 사주시나 보다! 너무 감사해요!’하고 따라갔다가 그날 새벽 2시까지 야근했던 걸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미끼가 달콤해 보일수록 뭔가 있어. 아주 안 좋은 뭔가가.

“안 할래요.”

거듭 거절했더니 서지한은 어깨만 으쓱하고 더 권하지 않았다.

으음, 막상 거절하고 나니 미련이 좀 남네.

보스를 잡아달라는 건 그만큼은 강해지게 해 준다는 거겠지?

대체 어떤 방법일까.

본인 아이템을 사용하게 해 준다는 건가?

인벤토리 안의 사자의 낫을 떠올려보고 나는 고개를 흔들어 생각을 날려 버렸다.

그 무기는 상징성이 너무 강하다.

서지한의 트레이드마크나 다름없었다.

서지한이라고 하면 새카만 기운을 풍기며 낫을 휘두르는 모습부터 떠오른다.

마치 사신처럼.

그런데 내가 그 낫을 들고 나타나서 ‘오늘부터 새로 들어온 손모아 헌터예요. 이건 사자의 낫입니다’라고 했다가는 언론의 집중포화를 받을걸?

와, 딱히 깊게 생각하지 않았는데도 벌써부터 머리가 아찔하다.

서지한과는 무슨 사이냐며 난리가 나겠지.

그리고 서지한이 왜 나에게 아이템을 줬는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건 무슨 연유인지.

아, 그러고 보니 서지한이 죽은 건 아직 나만 알고 있는 건가.

그의 죽음이 알려졌다면 인터넷이고 TV고 사방팔방에서 떠들어 댈 텐데 그런 뉴스를 하나도 못 봤다.

어, 음.

내가 알려야 하는 건가?

하지만 서지한은 지금 내 옆에 있다. 비록 유령인 상태지만.

이건 무슨, 죽은 것도 아니고 산 것도 아닌 상태 아냐?

죽었다고 알리는 게 맞는 건가?

알리려면 어떻게 알려야 하지?

그걸 어떻게 알고 있냐고 물어보면 어떡해.

역시, 익명제보?

- 왜 그래?

생각에 빠져 빈 접시를 계속 긁고 있었더니 서지한이 말을 걸었다.

새삼 느끼는 건데, 소문과 달리 되게 사교적인 성격이네.

헌터 하나가 감히 자신에게 인사를 했다는 이유로 죽여 버렸다는 소문도 있던데.

“그게 음, 그쪽이 죽었다고 어딘가에 알려야 할까요?”

- 그쪽은 뭐야. 그냥 서지한이라고 불러.

그러지 뭐.

사실 지금도 속으로는 그냥 서지한이라고 막 부르고 있긴 하는데.

뭐 어때, 쟤는 나한테 계속 반말한다고.

“서지한이 죽었다고 알려야 할까요?”

- ……서지한 씨 정도가 좋겠다. 아니, 딱히 안 알려도 돼. 이런 건 자연스러운 게 좋은 거지.

“다행이네요. 익명제보 어떻게 하나 걱정했는데.”

나는 빈 접시를 들고 일어났다.

좋아, 어디 다음에는 튀김을 좀 먹어볼까.

차가운 음식을 먹었더니 뭔가 따듯한 것이 먹고 싶어 졌다.

아삭하고 탱글탱글한 새우튀김과 튀김옷이 예술적인 각종 야채 튀김.

고기메뉴와 마무리 디저트에 커피까지 알뜰하게 다 쓸어먹은 다음에야 나는 부른 배를 부여잡고 뒤뚱뒤뚱 호텔을 나섰다.

처음에 올 때는 분식집 오듯 가볍게 먹고 적당히 배부른 상태로 떠나야지! 하고 생각했는데 막상 먹다 보니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돈도 돈인데, 평소에는 먹기 힘든 맛있는 것들이 잔뜩 있으니…….

평생 다져진 서민의 금전 감각이 그렇게 확 바뀌지가 않는다니까.

그나저나, 내 전 재산으로 이 뷔페에 몇 번이나 올 수 있지?

대충 계산기를 두드려볼까.

뷔페가 15만 원이었으니까…….

내가 가진 현금이 대략 40억쯤이니, 음, 대충 2만 6천 번을 수 있네.

하루 세끼 호텔 뷔페를 먹으면 23년간 먹을 수 있는 돈이군.

평생도 아니고 23년?

어, 뭐지.

갑자기 그렇게 많은 돈이 아닌 것처럼 느껴져…….

하루 45만 원씩 쓰면 23년 만에 없어진다는 거지?

엄마한테 좀 떼어주고 나면 더 적게 남겠네. 으음.

역시 일을 해야겠어.

집에 가는 대로 주말 알바라도 좀 찾아봐야겠다.

- 이제 집으로 가는 건가?

“아뇨, 마트에 들러서 장도 좀 보고, 이불도 사야죠. 으, 들고 가려면 고생이겠네.”

배달시킬까 하는 생각이 잠시 들었지만 이불은 오늘 당장 필요했다.

겨울 찬 공기가 들어찬 반지하방에서 이불도 없이 잘 수는 없지.

- 오늘도 그 집에 간다고?

“그래야지 어쩌겠어요. 바로 이사할 수는 없잖아요. 집이 빠질 때를 기다렸다가……."

집주인에게 이사 간다고 말하고.

이사 들어올 사람에게 집을 보여주고.

내가 이사 갈 집도 구한 다음 이삿날을 정해 서로의 일정을 조율하는 지루하고도 험난한 길을 시뮬레이션하는데 서지한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말했다.

- 그냥 하나 더 사서 이사하면 되잖아.

“아.”

맞아.

돈이 있으니까 그럴 수도 있구나.

뒤통수를 후려치는 것 같은 깨달음에 나는 다시 감탄했다.

와, 그냥 집 하나 더 사놓고 기존 집은 내버려 두고 그냥 새 집으로 이사 가면 끝이라고?

가용자금이 수십억이 되면 이렇게 편해지는구나.

평균 통장 잔고 10만 원이었던 나로서는 상상도 못 할 세계다.

“그러네요. 내일은 집이나 보러 다녀야겠어요. 그전에, 이불이나 사러가요.”

사실 나중에 떠올린 것이지만, 방금 나온 곳은 호텔 뷔페였다.

굳이 집에 갈 필요 없이 호텔에서 하룻밤 자고 다음 날 집을 찾아다니면 그만이었는데.

특별한 날도 아닌데 멀쩡한 집을 두고 생돈을 써가며 밖에서 잔다는 것은 박봉의 자취생이 떠올리기에는 너무 파격적인 사고방식이었다.

* * *

발걸음도 가볍게 마트에 들러 이불을 사다가 택시를 타고 집으로 오니 어느새 저녁때가 훌쩍 지나 있었다.

새로 나온 조미료며, 신기한 생필품이 많아서 한참 동안 구경하고 돌아다니다 보니 시간 가는 줄 몰랐던 것이다.

혼자 돌아다녔으면 별로 재미가 없었을 텐데 서지한이 함께해준 덕분에 무척 즐거웠다.

지겨워하며 짜증을 낼 줄 알았는데 그도 처음 보는 물건들이 많았던 모양인지 신기해하는 내 반응에 일일이 동조해주었던 것이다.

그와 오래 알고 지내지는 않았지만 같이 지낼수록 점점 소문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으음, 원래 소문이라는 건 과장되기 마련이니까.

게다가 꽤 친절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거 정말 저 주셔도 돼요?”

- 그래. 어차피 나는 죽었어. 네가 가지겠다고 하면 막을 길이 없지.아니, 이미 네 것이나 다름없지 않나? 인벤토리에서 썩히느니, 필요한 사람이 유용하게 쓰는 편이 좋잖아.

이불을 들고 낑낑거리며 걷고 있었더니 무척 망설이던 서지한이 인벤토리에서 자신의 반지를 꺼내 끼라고 권해줬던 것이다.

일단 권하기에 꺼내긴 했는데, 반지는 엄지손가락에 껴도 쑥 빠질 만큼 너무 컸다.

대충 손가락에 걸어 두라는 건가 해서 헐렁헐렁하게 끼고 있었더니, 그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 다른 손으로 반지를 감싸서 체온을 옮겨봐.

“이렇게요? 음, 아무 일도……. 앗?”

말 잘 듣는 막내 사원 모아는 신비한 유령이 시키는 대로 반지를 손바닥으로 감싸 쥐었어요.

그랬더니 놀랍게도 반지가 손가락의 크기에 딱 맞게 줄어들었답니다.

와, 고마워, 서지한 유령아.

덕분에 쉽게 반지하 이불 파티에 갈 수 있게 되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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