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8화
돈뭉치를 몇 개 꺼내서 손에 들고 있으니 너무 행복했다.
이게 꿈이 아니라 현실이라는 게.
마켓에서 볼일을 다 끝내고 나니 그제야 엉망인 집안이 눈에 들어왔다.
어제도 덮고 잔 피투성이 이불이라든가, 쌓여 있는 설거지 거리 같은 것들?
일단 이불부터 좀 버릴까.
평소였다면 그냥 세탁해서 썼겠지만, 돈도 많은데 버리고 새로 사지 뭐
커다란 종량제 봉투가 필요할 것 같아서 집을 나서려는데 서지한이 당연하다는 듯 따라붙었다.
아니, 따라오시면 안 되죠.
“잠시만요. 그냥 집에 계세요.”
- 왜?
“왜라뇨. 이대로 밖으로 나갔다가 사람들이 보면 어떡해요.”
- 사람들이?
“그렇잖아요. 지금 유령 모습인데.”
- 그거라면 괜찮아. 다른 사람은 나를 볼 수 없으니까.
그걸 댁이 어떻게 알아?
전에 영혼 뽑혀본 적 있으신지?
이상하게 확신에 찬 어조로 말하는 게 수상해서 빤히 바라봤더니 서지한이 어깨를 으쓱했다.
- 내가 보였다면 나와 눈이 마주쳤겠지.
“눈이요? 무슨 말인지 이해가 잘……. 여기 저 말고 누가 더 있다고 그러세요? 아, 혹시 저 잘 때 밖에 나가셨어요?”
- 아니, 나는 내 영혼석에서 멀리 떨어질 수 없는 것 같아.
“어, 그럼 누구를 말하는 거예요?”
질문하면서 갑자기 소름이 돋았다.
듣기 전인데도 어쩐지 그의 대답을 예상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서지한은 내 반지하 창문을 턱짓하며 대답했다.
- 어젯밤 네 방 창문으로 자는 너를 계속 쳐다보던 놈.
“네?”
반사적으로 반문하고 나니 심장이 마구 뛰었다.
누가? 언제부터 그랬던 거지?
전혀 몰랐다.
창문은 모두 불투명 유리로 되어있는데, 한쪽 창문이 살짝 열린 곳이 있긴 했다.
각종 전선을 빼내느라 어쩔 수 없이 약간 뚫어둔 곳인데 그 틈으로 쳐다본 모양이다.
“왜, 왜 안 깨웠어요?”
- 깨웠어. 하지만 자고 있을 때는 내 말을 듣지 못 하는 것 같더군.아, 다른 사람에게는 내 목소리도 안 들리는 것 같아.
서지한은 태연하게 그런 소리를 주절거리더니 아무렇지도 않게 한 마디 덧붙였다.
- 이사를 하는 게 좋겠군. 여기는 보안이 정말 최악이야. 지나가던 길고양이도 몇 마리 이쪽을 들여다보던데.
나는 대꾸하는 대신 창문 틈을 메꿀 만한 물건을 찾아서 집을 분주하게 돌아다녔다.
그런 나를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응시하던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 또 오면 잡아다가 팔다리라도 부러뜨려서 어디 던져두면 돼.
“제가 어떻게 그놈 팔다리를 부러뜨려요?”
- 비각성자였어. 각성자 상대로는…….
“제 능력치도 한없이 비각성자에 가깝거든요?”
그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흥분한 나를 진정시키고 싶은지 이런저런 말을 고르다가 결국 포기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 경찰에 연락해보는 건 어때?
“증거가 없다고 안 받아줄걸요.”
지난번, 현관 근처에 얼씬거리는 수상한 남자를 경찰에 신고했다가 받은 퉁명스러운 대답을 아직 잊지 않았다.
잠깐, ‘이’놈 그놈인 거 아냐?
- 밖에서 들여다봤으니 CCTV에 찍혔을 거야.
서둘러 밖으로 나가보니 정말로 길가를 찍고 있는 CCTV 몇 대가 보였다.
그중 한 대는 정확히 우리 집 쪽을 향해 있기도 했다.
마침 파출소가 그리 멀지 않아서 단숨에 달려갔다.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이런저런 수다를 떨고 있던 경찰들이 시선을 던졌다.
그중, 가장 출입구와 가까운 남자 경찰 하나가 알은체를 했다.
“무슨 볼일로 오셨습니까?”
"신고하려고요! 어젯밤에 누가 제 집 창문으로 집안을 계속 들여다봤어요.”
“그때 당장 신고 안 하시고 왜 지금……. 확실한 거 맞죠? 착각했다거나……."
“착각 아니에요.”
단호하게 대답했지만 남자 경찰은 오히려 나를 의심스러운 눈으로 응시했다.
그러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 대답했다.
“증거가 없으면 힘듭니다.”
"있어요. CCTV. 그 사람이 집안을 들여다보는 게 찍혔을 거예요.”
"CCTV가 있어도 좀 힘든데…….저쪽 근방 사시나요?”
“네, 저쪽이요!”
“일단 당분간 순찰을 강화할 테니, 수상한 사람이 보이면 다시 신고해주세요.”
다시 신고하라고?
나는 어쩐지 그놈을 잡지 못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말없이 가만히 서 있자 경찰이 심드렁하게 다시 입을 열었다.
“지금으로서는 할 수 있는 게 없어요. 가보셔도 됩니다.”
결국 나는 별 소득 없이 경찰서를 나설 수밖에 없었다.
내 옆의 서지한은 이런 경우는 처음 봤다는 듯 황당하게 서 있다가 결국 혀를 차며 팔짱을 꼈다.
- 쓰레기로군.
“말했잖아요. 별 도움 안 된다니까요. 그래도 순찰 돌아준다고 하니까……."
- 아니, 그러지 않을걸.
“어떻게 알아요?”
- 네가 나가고 바로 점심메뉴나 정하러 갔으니까.
그럴 줄 알았다.
내가 대수롭지 않게 어깨만 으쓱해버리자 서지한은 무언가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대충 알 것 같다.
“그렇게 볼 것 없어요. 뭐, 하루 이틀도 아니고. 어차피 이사 갈 거니까.”
돈이 이만큼이나 생겼으니 더 이상이 지긋지긋한 반지하방에 살지 않아도 된다.
그렇게 생각하니 기분이 좀 나아졌다.
일단 집에 가서 이불이나 내다 버려야지.
마트에 가서 새 이불도 좀 사고.
집에 가는 길에 대형 쓰레기봉투를 구해다가 이불을 욱여넣고 있으니 갑자기 약간 현기증이 났다.
그러고 보니 어제 점심때 죽 몇 숟갈을 뜬 것 외에는 먹은 게 없네.
내가 휘청하는 것이 보였는지 서지한이 말을 걸었다.
- 어디가 안 좋은가?
“아뇨, 그냥 배가 고파서요. 뭔가 맛있는 거라도 먹어야겠네.”
그렇게 대꾸하고 낑낑거리며 쓰레기봉투를 내다 버린 뒤 돌아보자 서지한이 또 뭔가 알 수 없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뭐 할 말 있으세요?”
무슨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사람을 쳐다보시네.
그는 그냥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아까 경찰서 이후로 기분이 계속 안 좋아 보인다.
기분 안 좋을 때는 맛있는 거 먹는 게 제일 좋은데, 유령이라 그거도 못 하네.
불쌍한 서지한.
그나저나 뭘 먹어야 잘 먹었다고 소문이 날까.
휴대폰으로 근처 음식점을 검색하는데 배가 고파서 그런지 보이는 것마다 전부 먹고 싶다.
으음, 뭘 먹는 게…….
아.
호텔 뷔페.
예전에 딱 한번 회사 회식으로 가본 적이 있다.
평소 일반적인 뷔페도 큰 맘먹고 가는 주머니 사정이라, 호텔 뷔페는 난생처음이었지.
나중에 검색해보니 10만 원이 훌쩍 넘는 뷔페였다.
‘부자들은 이런 데 그냥 분식집처럼 오겠죠?’
‘그냥 가볍게 식사하고 싶으면 와서 먹고 가지 않을까요?’
‘부럽다. 나도 복권 당첨되면 그럴래요. 일단 소화제 먹고 올게요.’
그때 김 대리님과 시시콜콜 나누었던 대화가 떠올랐다.
혼자서 뷔페에 가는 건 난이도가 좀 높지만, 오늘은 평일이라 친구들도 전부 출근한 상태라 어쩔 수 없었다.
으음, 호텔 뷔페는 그래도 사람이 좀 적어서 혼밥 할 만하지.
응. 그래, 가자.
결단을 내리고 나는 바로 밖으로 나가 택시를 잡았다.
뷔페가 맛있다는 호텔 중 가장 가까운 곳을 찾아가서 쭈뼛쭈뼛 현금결제를 하고 식사를 시작했다.
서지한은 내가 접시를 서너 번 비우는 동안 내 건너편 의자에 앉아 한 마디도 하지 않고 먹는 모습만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아까부터 왜 이렇게 말이 없지.
사람 불편해지게.
“그, 왜 자꾸 쳐다보세요.”
혼잣말하는 미친 사람으로 보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손으로 입을 슬쩍 가리고 소곤소곤 묻자 서지한이 턱을 괴었다.
- 아까 들은 말을 생각하고 있어.
마침 입안 가득 잡채를 후루룩후루룩 빨아먹고 있던 참이라 나는 볼이 빵빵해진 상태로 한참 우물거렸다.
갑자기 무슨 소리람.
“들은 말 뭐요?”
- 하루 이틀이 아니라는 말. 저런 일이 흔한가?
“아아. 그쪽한테는 좀 낯선 일이죠?”
나는 이번에는 육회를 국수처럼 빨아들이며 서지한의 약력을 떠올렸다.
어릴 때부터 무술을 오래 했고, 군대도 특수부대를 제대하고 난 후 각성자로 각성.
입대 전에도 온갖 청소년 체전에서 메달을 휩쓰는 삶을 살았다던가.
와, 전투계 헌터 중에서도 엘리트코스네.
만약 서지한 앞에서 경찰이 저런 태도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니, 애초에 경찰서에 갈 일도 없었겠지?
그의 입장에서는 아까 같은 일에 상대를 혼쭐 내주지 않는 것이 이해가 안 되겠군.
“보기에 좀 답답하시겠지만, 어쩔 수 없죠.”
별생각 없이 한 말인데 서지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리고 무언가를 말하고 싶은 듯 입술을 달싹이다가 곧 회피하듯 질문을 툭 던졌다.
- 앞으로 어떻게 할 거지? 그런 히든 스킬을 가지고.
“글쎄요. 일단 엄마한테 탈출석 주고, 남은 돈으로 해외여행이나 하면서 살까 싶어요.”
- 던전은?
“에이, 전투 스킬도 없는데 무슨 던전이에요. 길드에서 받아주지도 않을걸요. 전투에 도움도 안 되니까.게다가 혼자 가면 자살행위고. 그냥 돈 가지고 유유자적 행복하게 살래요.”
- 음.
“그래도 돈은 좀 더 있었으면 싶네요. 그러면 남동생이나 친구들이랑 신세 진 사람들한테도 탈출석 선물할 수 있으니까요. 내가 겪어보니까 너무 무섭더라고요. 적어도 내 주변 사람한테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해요.”
히든 스킬을 가지고도 이렇게 사는걸 한심하게 생각하려나? 하지만 어쩔 수 없는걸.
뭔가 한 마디 들을 줄 알았는데서지한은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아주 조심스럽게, 굉장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 힘을 가지고 싶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