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17화 (17/231)

017화

서글픈 그 얼굴에 동정심이 치솟았다.

뭔가 위로를 하기 위해 말을 골랐으나 그는 고개를 가볍게 저어 우울을 털어버렸다.

그리고 이렇게 조언해왔다.

- 적당한 시세를 모른다면 경매로 올려 두는 것도 좋지.

아아, 맞다.

마켓에는 경매라는 시스템도 있었다.

보통 아주 희귀하거나 등급이 높은 아이템을 등록한다고 들었는데 당연하지만 나는 실제로 이용해본 적은 없었다.

애초에 비각성자 고객들이 우리 회사에 구매를 의뢰하는 물건들은 힐링 포션이나 보호 스크롤 같은 용도가 아주 명확한 아이템들뿐이다.

경매는 원하는 아이템을 등록하고 개수로 구매자들을 경쟁시키는 방식이었다.

어쨌든 그가 조언한 대로 에비타니스의 핵을 모두 경매로 등록하고 나머지 부산물도 모두 등록했다.

사실 대부분 에비타니스였고, 등록할 수 있는 몬스터 부산물은 몇 개 되지도 않았다.

서지한이 랭킹 1위 치고는 매우 빈곤한 인벤토리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시신을 통째로 채집했는데도 얻어 온 아이템은 몇 개 없었다.

내 인벤토리에 들어온 것은 그의 옷이나 휴대폰 같은 개인 소지품, 그리고 사자의 낫과 장비 아이템이 대부분이었다.

던전 공략용 능력치 증가 아이템은 전부 사용했는지 하나도 없다.

그건 그렇다 쳐도, 왜 몬스터 부산물이 이것뿐이지?

서지한의 인벤토리에서 얻은 몬스터 부산물은 기껏해야 c급 충왕류 갑각 2개와 E급 충왕류 다리 6개, B급 충왕류 다리 1개뿐이었다.

분명 던전을 쓸어버리다시피 몬스터를 학살하고 다녔을 텐데 아이템이 왜 이거밖에 없어?

보스 방으로 가는 길에 있는 몬스터만 잡아서 그런가?

그래도 좀 적은 거 같은데.

참고로 내가 케르기스에게서 획득한 아이템만 해도 뿔, 마석, 갑각, 다리 12개, 날개 4개, 심장 1개다.

그걸 생각하면 서지한이 가진 몬스터 부산물은 좀 심각하게 적은 편인 것 같았다.

으음.

- 왜?

내가 뭐 마려운 표정으로 보고 있었는지 서지한이 의아해했다.

“아이템이 몇 개 없으시네요……."

- 루팅을 한다고 늘 아이템을 얻을 수 있는 건 아니야.

나는 문화 충격을 받았다.

나처럼 아이템을 우수수 얻는 수준까지는 아니더라도 늘 한두 개는 꼭 얻는 줄 알았는데 아예 하나도 얻을 수 없을 때도 있는 거야?

- 나는 운이 그렇게 좋은 편은 아니라서. 그리고 정식으로 던전 공략을 하러 들어간 게 아니라, 보스에게 가는 길목을 지키는 놈들만 잡아서 얼마 죽이지도 않았어.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렇군.

그래서 몬스터를 알뜰살뜰하게 다 루팅 해가며 돌아다닌 거였어.

어쨌든 마켓 등록을 모두 끝내고 창을 닫은 후 나는 다시 잠을 청했다.

물건이 다 팔리면 그걸로 탈출석을 사야지.

그전까지는 좀 불안하게 사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그런 내 마음이 얼굴에 드러난 모양이다.

- 불안한가 보군.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 괜찮을 거다.

가물가물 끔뻑이는 시야 너머로 그가 조용히 읊조렸다.

그가 그렇게 말하자 정말 괜찮을 것 같았다.

이게 랭킹 1위의 카리스마인가.

사실, 막상 그런 사태가 터지면 영혼 상태인 서지한은 아무 도움이 안 될 텐데도 그냥 막연히 든든한 느낌이었다.

- 내가 보스를 잡아서 던전이 소멸된 이상, 같은 장소에 두 번 열리지는 않을 거야. 여기는 안전하다. 새로운 던전이 열리려면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할 테니, 안심하고 자도 괜찮아.

“네……."

그의 낮은 목소리 때문인지 아니면 몸 위에 덮은 이불의 온기 때문인 지급 속도로 수마가 덮쳐왔다.

나는 졸음에 푹 절어 든 채 충동적으로 질문했다.

“그런데 왜 혼자 보스 방으로 갔어요?”

서지한은 이번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조용히 내 반지하방의 작은 창문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그 모습이 무척 쓸쓸해 보인다고 생각하다가 어느 순간 까무룩 잠이 들었다.

* * *

곤히 자고 있는데 갑자기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었다.

몇 시지?

손만 뻗어 휴대폰을 집고 보니 알람이 아니라 전화가 온 거였다.

발신자는 낯선 번호.

“여보세요?”

꽉 잠긴 목으로 웅얼웅얼 전화를 받자 수화기 건너편에서 꼬장꼬장한 목소리가 들렸다.

상당히 다급한 기색이었다.

- 손모아 씨 휴대폰 맞나요?

“맞아요. 누구세요?”

재난 관리실입니다. 긴급하게 전달 드릴 사항이 있습니다. 침착하게 들으세요.

재난 관리실?

거기서 나한테 무슨 볼일이지?

잠이 덜 깬 머리로 멍하니 다음 말을 기다리는데 그가 충격적인 사실을 전해왔다.

- 어머니께서 던전 생성 폭발에 휘말리셨습니다.

“네?”

- 현재 상황을 파악 중입니다만, 손모아 씨 어머니의 거주구역에 신규 던전이 생성되어 해당 지역의 모든 민간인이 던전에 진입당한 상태입니다.

머리가 하얗게 비었다.

그 이후로도 구조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거나, 이런저런 안내 사항을 말해왔지만 귀에 들리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어떻게 전화를 끊었는지 모르겠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서둘러 집을 나서는 중이었다.

휴대폰과 카드 한 장만 달랑 들고 현관을 헐레벌떡 나가는데, 문턱에 발이 걸렸다.

손을 뻗으려는데 손발이 어디에 묶인 듯 제대로 움직여지지가 않았다.

이대로라면 중심을 잃고 앞으로 쓰러져 돌바닥에 얼굴을 처박을 판이었다.

눈을 꽉 감고 충격에 대비하며 움츠리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아프지 않았다.

뭐지?

어리둥절하게 눈을 뜨자 나는 아직 이부자리 위에 누워 있었다.

베개에 얼굴을 파묻은 상태로.

엥? 뭐야.

한참 동안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아서 나는 눈곱 붙은 눈만 깜빡였다.

그러니까, 꿈이었어?

얼떨떨하게 휴대폰을 들자 오전 1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통화 목록은 어젯밤 엄마와 안부를 나눈 내역이 전부였다.

그러니까, 재난 관리실이니 뭐니 하는 부분이 전부 꿈이었다는 거군.

하. 다행이다.

“깜짝 놀랐네……."

구시렁거리며 가슴을 쓸어내리는 순간 누군가가 불쑥 말을 걸었다.

- 뭐가?

“네?”

목소리가 들린 방향에는 비스듬하게 서서 나를 내려다보는 서지한이 있었다.

어제는 밤에 봐서 그런지 귀신같았는데 낮에 보니까 무슨 요정 같네.

반투명하고 잘생긴 요정.

“아, 안녕하세요……."

꾸벅 고개를 숙였더니 그가 또 고개만 까딱했다.

몇 번 이야기를 나눠서 그런지 그게 처음처럼 싹수없는 행동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그냥 원래 성격이 저런 모양이지.

“그냥 잠자리가 좀 사나워서요.”

- 그래? 그럴 만도 하지.

서지한은 더 캐묻지 않았다.

나는 한쪽에 오도카니 서 있는 그를 내버려 두고 일단 휴대폰 문자 내역을 확인했다.

자는 사이 장문의 문자메시지가 몇 통 도착해 있었던 것이다.

예상대로 어제 있었던 던전 생성 폭발에 대한 정부 정책 문자와 회사에서 보낸 단체 문자였다.

정부 정책은 던전 생성 폭발로 장애나 심각한 부상이 생겼을 경우 지원받을 수 있는 복지부서 관련 내용 안내였고.

회사에서 보낸 메시지도 그 비슷한 내용이었다.

정리하자면, 우리 회사는 잠정적으로 공중분해된 것이나 다름없어졌다.

굳이 퇴사하지 않았어도 아마 실업자가 되었을 거다.

던전 생성 폭발로 사장을 비롯해 임원 대부분이 사망했고, 계약한 마켓 관리자도 다수 죽었다.

게다가 어제 택시를 타고 오며 보니 회사가 있던 일대의 모든 건물이 너덜너덜해져 있었는데, 아마 우리 사무실도 반파된 거나 다름없을 것이다.

문자메시지에서는 추가 연락을 할 때까지 무급 휴직 상태이고 이후 절차를 다시 안내하겠다고 적혀 있었다.

하지만 원한다면 폐업으로 인한 실업자로 처리해주겠다는 내용도 있었다.

폐업.

한마디로 이 사람들이 앞으로 뭔가 한다고 해도 우리 회사를 회생시키는 방향이 아니라 없애는 방향으로 간다는 거지.

그럼 실업자가 된 김에 내 전 재산이 얼마나 되었는지나 확인해볼까?

흐뭇하게 웃으며 헌터 마켓을 열어보는데, 찜찜한 표정의 서지한이 나를 흘끔거리고 있었다.

왜 그러냐고 물어보고 싶지만, 내가 좀 소심한 관계로 넘어가자.

그보다, 이거 진짜야?

내 소지금이 300억 원이라고?

정확히는 299억 원 정도지만 대충 300억이라고 치자.

사람들이 갑자기 던전 아이템을 사들였는지 물품들의 가격이 무척 올라가 있었다.

덕분에 내 아이템도 비싸게 팔린 것이다.

에비타니스의 핵도 S급이라 그런지 기대 이상의 가격에 팔렸다.

괜히 경매시간을 6시간으로 지정했나.

오랫동안 경쟁시키면 더 비싸게 팔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아무튼 나는 300억대 부자가 되었다.

인벤토리를 보면서도 도무지 현실감이 들지 않았다.

1억, 2억 정도면 모르겠지만 300억이라니.

꿈을 꾼다 해도 이것보다는 현실감이 있을 것 같다.

300억.

와, 정말. 뭐라고 해야 할지.

아니, 이러고 있을 게 아니지.

애초에 돈이 필요했던 이유가 있잖아.

탈출석을 사야지.

붕 뜬 마음으로 탈출석을 검색하니 하룻밤 사이 시세가 더 뛰어서 130억 원이었다.

이게 말이 돼?

300억이라는 거금도 헌터들의 금전 감각 앞에서는 푼돈이 되어버리는구나.

던전 들어가서 잔뜩 벌어온다고 해도 탈출석 값이 이렇게 비싸면 남는 것도 없겠다.

일단 탈출석을 하나, 아니, 두 개사자.

아무래도 방금 꾼 꿈이 찜찜했다.

하나는 내가 가지고, 나머지 하나는 엄마에게 줄 생각이었다.

260억 잘 가.

그렇게 마음먹고 나니 갑자기 남동생이나 차장님, 김 대리님, 친구들도 마음에 걸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중에 케르기스 부산물을 팔거나 하면 몰라도 지금은 돈이 부족하다.

안타깝지만 그냥 넘어가는 수밖에.

탈출석 두 개를 사고 나니 남은 돈은 다시 40억 원 남짓한 금액.

그래도 엄청난 거금이었다.

인벤토리에 40억의 거금을 가지고 있으니 저절로 바보 같은 웃음이 홀러 나올 지경이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