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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5화 (15/231)

015화

수백억짜리 복권에 당첨되고 도박과 스포츠카를 서로 폭발시키는 놀이를 하며 몇 년 만에 거지로 돌아가는 사람도 있으니 이건 나쁜 게 아니라 좋은거다.

휴대폰을 사고 데이터를 옮기는 걸 기다리는데, 그제야 내 모습에 관심이 갔는지 남자 직원이 흘긋거리기 시작했다.

“그, 병원에서 오시는 길이세요?”

"네.”

“아, 혹시 던전에 휘말렸어요?”

질문이긴 했지만 확신하는 눈치였다.

“네.”

내키지 않는 기색으로 대답했는데도 남자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기쁜 표정을 지었다.

재밌는 화젯거리를 발견했다는 듯 싱글거리는 얼굴이 영 맘에 안 든다.

바로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거기는 지옥이었다.

지금도 TV에서는 사망자 명단이 발표되고 있었다.

“사람 많이 죽었다면서요?”

어제 드라마 그 부분 재밌지 않았느냐 묻는 듯한 말투였다.

갑자기 몹시 환멸감이 들어서 나는 대답 없이 휴대폰을 턱짓했다.

“다 된 거 같은데, 주세요. 개통된 거죠?”

“아, 네.”

휴대폰을 받아 가게를 나오면서도 더러워진 기분이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다른 가게 갈 걸.

집에 가기 위해 버스 정류장에 서있다가 나는 또 이럴 필요가 없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택시를 타면 되는데.

다행히 택시 기사는 백미러로 나를 흘끔거리긴 했지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마침내 나의 궁색한 반지하방으로 돌아오자 마른 피로 더러워진 이부자리가 나를 반겼다.

가급적 깨끗한 이불에 눕고 싶었는데, 새 이불을 사 올 기력이 없어서 나는 대충 더러운 요 위에 널브러졌다.

아, 집에 왔다.

피로가 물밀 듯 밀려와 그대로 한숨 자고 싶었지만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었다.

먼저, 엄마에게 안부전화.

“여보세요?”

- 모아? 모아니?

엄마는 시간이 꽤 늦었는데 벨이 울리기가 무섭게 전화를 받았다.

내내 휴대폰을 쥐고 마음을 졸이고 있던 모양이었다.

“나 집에 와서 이제 자려고 누웠어.”

태평한 내 목소리 덕분인지 엄마는 급격히 안심하는 기색이었다.

- 다친 데는 없고?

“아, 좀 긁히긴 했는데 멀쩡해. 병원에서도 그냥 집에 가라고 해서 온 거야.”

- 밥은?

“졸려서 자고 내일 아침에 먹으려고. 너무 피곤해.”

- 그래, 그래. 그럼 내일 이야기하자. 목소리 들었으니까 엄마는 이제 괜찮아.

“응응, 엄마도 자. 내일 전화할게.”

간단하게 통화를 마무리하고 휴대폰을 적당히 근처에 던져버렸다.

이제 두 번째 문제를 마주 할 때였다.

나는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인벤토리에서 영혼석을 꺼내 들었다.

내 주먹 반의반만 한 작은 흰 돌.

별로 특별하게 보이는 부분은 없다.

약간 흐린 수정처럼 생겼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안쪽에 안개 같은 것이 어른거리고 있었다.

이거 혹시 음, 그러니까.

그…….

영혼인가?

말하고 나서도 너무 현실감이 없어서 머리를 긁적이게 된다.

“생각보다 희고 깨끗한 영혼인데?의외네.”

사탄도 피할 것 같은 새카만 영혼을 가지고 있을 줄 알았는데.

아니지, 날 구해준 걸 보면 사실 본성은 착한 걸지도 몰라.

근데 왜 날 구해준 거지?

거슬린다는 이유만으로 사람을 반죽음으로 만들기로 유명한 사람이.

아무튼 나는 영혼석을 손에 들고 고민에 빠졌다.

이게 시신 대신이란 말이지.

이걸 어떻게 한담?

집에 오는 길에 택시에서 영혼석을 검색해봤다.

메모리얼 스톤, 소울 스톤이라는 이름으로 반려동물을 화장시키고 남은 유골을 돌로 만들어주는 서비스가 있었다.

메모리얼 스톤 전용 납골당도 있었지.

그거랑 이건 좀 다르긴 하지만…….

“일단 납골당을 검색해볼까……."

그렇게 중얼거리는 순간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 별로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군.

화들짝 놀라 돌아보자 방의 벽에 기대어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서지한이 있었다.

그러니까, 반투명한 서지한이.

유령이야!

머릿속에 그 단어가 떠올랐지만 나는 입 밖으로 내지 못 했다.

솔직히, 너무 놀라서 소리도 못 내고 굳어버렸다.

뭐야, 이거 진짜인가?

서지한은 살아생전의 모습 그대로였다.

평소에 입는 것 같은 편안해 보이는 셔츠와 바지 차림에 신발까지 제대로 갖춰 신었다.

긴 다리를 꼰 채 벽에 기대 선 모습은 무슨 모델처럼 잘 빠졌다.

좀, 투명하다는 것만 빼면.

“서, 서……."

- 서지한이다.

대답한 그는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러다 문득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더니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 내가 왜 유령이 된 거지?

“저도 잘……."

눈을 피하며 얼버무리자 그는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그, 짚이는 게 있긴 한데요.”

- 뭐지?

“돌아가시고 나서 제가 그쪽 시신에 채집 스킬을 시전 했거든요. 그, 아이템 욕심이 났다거나 그런 건 정말 아니고요. 시신을 인벤토리에 담아 가서 장례라도 치러 드릴까 해서요.”

- 그래서?

“그랬더니 인벤토리에 그쪽 영혼석이 들어와 있더라고요. 그, 헌터한테 채집을 시전 하면 영혼석이 생기나요? 저는 정말 몰랐어요.”

죽어서 유령이 되었는데도 서지한의 위압감은 여전해서 나는 나도 모르게 저자세로 굽실거렸다.

사실 그 외에도 내가 서지한에게 굽실거릴 이유는 많았다.

어쩌면 내가 거기에 없었다면 서지한이 나를 감싸느라 움직이지도 않았을 거고, 죽을 일도 없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얼룩처럼 마음 한구석에 달라붙어 있었다.

그리고 나이도 나보다 많고, 은인이고, 랭킹 1위 헌터였고…….

- 헌터에게 채집 스킬을 쓸 수 있다고?

서지한은 금시초문이라는 표정이었다.

앗, 저만 되는 거였나요.

그 히든 스킬의 영향인가.

- 그랬더니 영혼석이 나왔다? 처음 듣는군. 지금까지 그런 사례는 못 봤는데.

뭔가 곰곰이 고민하던 그가 나를 똑바로 응시했다.

- 그러고 보니, 각성자였군.

“네, 전투계는 아니지만……."

- 스킬 영향일 수도 있으니 일단 짚이는 게 있으면 설명해봐.

원래 헌터들은 대부분 자신의 스킬 효과를 남에게 알려주지 않는다.

거짓말을 하더라도 확인할 방법이 없기도 하고, 힘이나 민첩성, 마력 같은 수치는 장비를 이용해 측정할 수 있지만 스킬은 측정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스킬은 헌터들의 비장의 한 수였다.

그러므로 스킬에 대해 알려달라는 것은 엄청나게 친하지 않은 이상 무척 실례되는 요구였다.

하지만 그는 아무래도 내 스킬의 피해자인 것 같았으므로 나는 그에게만큼은 모두 이야기하기로 했다.

게다가 유령이니까 어디 가서 말하지도 못 할 거라는 계산도 깔려 있었다.

어, 이거 꽤 좋은 상담 상대가 생긴 거 아냐?

나는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불규칙 균열에 휘말려서 각성한 것, 그리고 스킬을 얻은 것, 충왕류를 죽이고 탈출한 것, 그리고 내 스킬의 효과와 그가 죽은 후 내가 한 일까지.

“그래서, 저는 채집 대상에게서 얻을 수 있는 아이템을 확률과 관계없이 전부 획득할 수 있는 것 같아요.”

이야기를 마치고 나서 나는 가만히 그의 눈치를 살폈다.

말을 하고 나니 정말로 내가 원인인 것 같았다.

서지한도 그렇게 결론 내렸는지 나에게 질문을 던졌다.

- 나를 어떻게 할 생각이지?

경계심이 가득 묻은 어조였다.

뭔가, 내가 굉장한 흑심을 가지고 그의 영혼석으로 아주 나쁜 짓을 하기라도 할 것처럼.

“그, 딱히 뭘 하겠다는 생각은 없는데요……."

- 그걸 믿으라고? 애초에 왜 내 시신에 채집 스킬을 쓴 거야? 그저 가져가고 싶었다면 인벤토리에 담았으면 되는 거 아니야?

그런 방법도 있었구나!

“정말로 나쁜 의도는 없었어요. 보스 몬스터 시신을 채집하고 돌아보니 서지한 씨 시신이 보여서. 그, 의식의 흐름으로.”

쩔쩔매며 변명했지만 서지한의 의심 어린 눈초리는 풀릴 기미가 안 보였다.

하긴 나라도 그러겠다.

죽었다가 눈 뜨니까 왠 녀석이 내 영혼을 채집했다는데.

게다가 채집은 채집 대상물을 쓰기 좋게 가공해주는 스킬이다.

즉, 나는 서지한을 손질, 가공하여 아이템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걱정하지 마세요. 서지한 씨한테 해코지할 생각 진짜 전혀 없어요.걱정하시는 대로 막 이상하게 영혼석을 사용할 생각도 없고요.”

- 진짜야? 내 영혼을 마켓에 팔아버린다거나…….

나는 격렬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의 영혼석을 계속 가지고 있을 생각은 없었다.

이렇게 본인이 나타난 이상, 괜히 여기저기 수소문할 필요 없이 가족의 연락처를 물어보고 그들에게 인계하면 되겠지.

“가족 분 연락처 알려주시면 그쪽 통해서 전달드리고 모시라고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 나에 대해서 잘 모르는군. 가족은 없어.

아니, 갑자기 이렇게 무거운 소리를?

깜빡이 좀 켜고 말하세요.

돌연 숙연해진 분위기에 나는 다음 말을 찾지 못 하고 고개를 떨궜다.

가족이 없다고?

그럼 어떡하지?

아!

“친구 분이나……

- 다 죽었어.

“그, 그럼 같이 일하시는 헌터 분……."

서지한의 얼굴이 무섭게 굳었다.

대답을 듣지 않아도 헌터를 정말 싫어한다는 걸 알겠다.

가족, 친구, 직장동료. 그중 아무도 없다니.

인간적으로 좀 불쌍한데.

갑자기 동정 어린 시선을 받자 서지한이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노려봤다.

나는 헛기침을 한 뒤 방금 한 결심을 조심스럽게 입 밖으로 꺼냈다.

“혹시 원하시는 제사상이 있으신가요?”

- 뭐?

“생명의 은인이시기도 하고, 제가 제사 정도는 지내드릴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던 서지한이 다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왜 한숨을?

한국에서 혼백을 기리는 최고 대접인데?

각성자에게 채집 스킬을 쓴다고 해서 영혼석이 뽑히는 건 아니라고 했으니.

어쩌면 그가 이승에 미련을 가져서 떠나지 못한 것을 내가 영혼석의 형태로 얻게 된 게 아닐까?

그러면 제사를 지내서 달래줘야지.

- 필요 없다.

“아, 혹시 기독교……."

- 아니.

“그래도……."

- 필요 없다고 했을 텐데. 혹시 얼빠졌다는 소리 많이 듣지 않나?

기껏 생각해줬더니 이놈이 막말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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