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13화 (13/231)

013화

게다가 서지한이 들고 있는 저 낫은 최초이자 마지막으로 공략에 성공한 던전 보스 악령 왕 실라기스의것이다.

악령 왕 실라기스를 죽이고 그의 무기인 사자의 낫을 계승한 자.

보통은 공격만 가지고 있거나, 방어만 가지고 있거나 하는 식으로 둘 중 하나에만 특화되어 있는데 서지한은 공격과 방어 둘 다 가능했다.

치유나 보조계 스킬이 없어서 그렇지, 전투계 헌터 중에서는 정말 독보적인 존재다.

갑자기 두려움도 잠시 잊을 만큼 부러운 감정이 솟았다.

쟤만큼은 아니더라도 보통 최소 스킬 세 개 정도는 가지고 있던데.

나는 대체 왜 채집밖에 없는 거지?

케르기스가 서지한에게는 물리 공격도, 마력 공격도 크게 효과가 없다는 것을 확인한 후.

전투는 다시 지루한 공방을 이어가는 방향으로 바뀌었다.

안 좋은데.

지구전이 되면 여기가 홈그라운드인 케르기스가 더 유리하다.

나도 하는 이런 생각을 서지한이 못할 리는 없었다.

빠르게 움직이던 그가 돌연 그 자리에 우뚝 멈췄다.

그리고 인벤토리에서 무언가를 마구 꺼내 부수고 찢더니, 빛무리에 휩싸였다.

척 보기에도 엄청나게 등급이 높은 능력치 상승 아이템인 것 같았다.

뭔가 큰 한 방을 주고받을 것 같다는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케르기스도 나와 같은 생각을 했는지 바짝 긴장하는 것이 느껴졌다.

거대한 날개가 바르르 떨리고 게의 주둥이 같이 겹겹이 형태를 이룬 입이 꾸물거렸다.

도망쳐야 해.

지금 도망치지 않으면 못 버틴다.

휘말리기만 해도 죽을 거다.

나는 일어서지 않고 엎드린 상태 그대로 천천히 기어서 이동하기로 했다.

가급적 이 싸움이 끝날 때까지 케르기스가 나를 인식하지 못했으면 하는 소망이 있었다.

그러나 옆으로 30센티미터 정도 이동하는 순간, 머리 위에서 거대한 압박감이 느껴졌다.

고개를 들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케르기스가 내 존재를 알아챈 것이다.

놈이 여기를 인식한 것뿐인데 숨을 쉬기 힘든 압박감이 느껴졌다.

이럴 줄 알았어!

이럴 줄 알았다고! 그냥 숨죽이고 있을걸!

아니, 그래도 어차피 죽었을 것 같아. 이게 최선이었어.

실패했을 뿐.

죽는다.

서지한의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날카로워진 케르기스가 변수를 살려둘 리가 없었다.

지이잉 하는 소리가 들렸다.

한번 들은 것이라 알 수 있었다.

케르기스가 뿔에 마력을 모으는 소리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상상하고 싶지 않았지만, 온몸이 꿰뚫린 채 죽어가는 내가 떠오른다.

감은 눈 위로 사방이 확 밝아지는 것이 느껴졌다.

이어서 무시무시한 고통이…….

느껴지지 않았다.

뭐야?

무슨 일?

슬그머니 눈을 뜨자 나와 케르기스 사이를 가로막은 서지한이 보였다.

그에게서 뻗어 나온 검은 기운이 내 주변에 서려 있었다.

지켜준 건가? 진짜로?

그냥 죽게 내버려 둘 줄 알았는데 정말 뜻밖이었다.

믿기지가 않지만, 서지한이 민간인 하나를 구하려고 몸을 날렸다.

매체에서 떠드는 그의 이미지를 생각하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막아 줄 테니 도망쳐.”

서지한의 의도대로 순순히 풀릴 리가 없었다.

내 위치가 들켰고, 서지한이 나를 지킨 순간 나는 그의 약점이 된 것이었다.

혼자 싸우는 것보다 무언가를 지키며 싸우는 것이 월등히 어려운 법이니까.

뒤돌아 뛰려는 내 앞에 거대한 빛줄기가 박혔다.

나를 보내지 않겠다는 케르기스의 의사표현이었다.

“이 새끼, 여유만만하네.”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씩 웃은 서지한이 나를 흘긋 보더니 낫을 고쳐 잡았다.

“이래도 여유 있을지 볼까?”

그의 말과 동시에 지금까지 본 적 없을 만큼 진한 기운이 뭉클뭉클 뻗어 나왔다.

기분 탓인지 그가 든 낫이 점점 커지는 것 같았다.

사방에 요기를 뿌리는 그 심상치 않은 모습에 충왕 케르기스는 서둘러 두 앞다리를 모아 서지한을 향해 강하게 찔렀다.

그리고 서지한의 몸이 그대로 꿰뚫렸다.

“아프네.”

아니, 당연히 아프겠지!

나는 눈이 튀어나올 것 같은 기분으로 서지한의 등을 뚫고 나온 케르기스의 앞발을 보고 있었다.

덩치 크기 차이 때문에 그냥 찔린 것만으로 서지한은 반 토막이 날 것 같았다.

지금이라도 뛰고 싶지만, 케르기스가 보내줄 것 같지가 않다.

“좋은데.”

그의 몸에서 흘러나오던 검은 기운이 더욱 강렬해졌다.

낫은 점점 덩치를 불려서 이제 기분 탓이라고 할 수 없을 만큼 확연하게 커져 있었다.

아니, 지금도 점점 커지고 있다.

“키이익!”

서지한에게 박힌 앞발을 뽑아내려던 케르기스가 당황해서 울부짖었다.

그러나 앞발은 검은 기운에 싸인채 꿈쩍도 않았다.

흡사, 제 몸으로 케르기스를 잡아둔 것처럼 되어버렸다.

이쯤 되자 케르기스의 뿔에도 새파란 기운이 서렸다.

서지한이 준비하는 공격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정면으로 맞부딪치겠다는 뜻 같았다.

덕분에 케르기스가 나에게서 신경을 거둔 듯했다.

나는 그 빈틈을 노려 최대한 현장에서 멀어지려고 노력했다.

으아아. 살려주세요.

저는 이 싸움이랑 관계없어요.

정신없이 달려가는데 갑자기 뒤쪽이 확 밝아지더니 굉음과 함께 충격파가 덮쳐왔다.

바닥에 몸을 갈아가며 나뒹굴다가 간신히 정신을 차렸는데, 온몸의 고통을 잊을 만큼 놀라운 모습이 보였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반토막이 난 채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는 케르기스였다.

케르기스의 무언가에 파 먹힌 것 같은 거대한 상처에 검은 어둠이 달라붙어 있었다.

어둠이 놈을 좀먹어감에 따라 케르기스의 존재감이 조금씩 옅어지기 시작했다.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앞에는 몸의 중심부가 증발한 서지한이 아무렇게나 나뒹굴고 있었다.

그의 상처도 케르기스의 푸른 기운이 좀먹고 있는 상태였다.

어떻게 봐도 치명상이다.

너무나 엄청난 광경에 넋을 빼고 있던 나는 허겁지겁 서지한에게 달려갔다.

“아……."

가까이서 본 서지한은 더욱 처참한 상태였다.

오른쪽 가슴과 복부가 없었고 낫을 들고 있던 팔도 떨어져 나갔다.

다리도 무릎 아래가 없었다.

살아 있는 게 신기한 상태였다.

이건, 힐링 포션으로도 안 된다.

애초에 보스 몬스터의 공격을 치료하려면 얼마나 높은 등급의 힐링 포션이 필요한지도 모르겠다.

나는 급히 그를 안아 들었다.

손이 피에 더러워지는 것 따위는 신경 쓰이지 않았다.

그저, 그가 이런 돌바닥에 나뒹굴게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알림 메시지가 떠올랐다.

16619539662492.jpg

충왕 케르기스가 사망하였습니다.

잠시 후, 케르기스의 힘으로 유지되는 공간의 연결이 해제됩니다.

16619539662496.jpg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