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12화 (12/231)

012화

충왕류 시체였으면 좋았겠지만, 그건 아니었다.

바로 오늘 하루 종일 한 포기도 안 보이던 에비타니스가 피어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도 전투가 있었는지 벽에는 구멍이 무성했다.

그래서 대부분의 에비타니스가 짓밟힌 상태였지만 살아남은 것들도 있었다.

이쯤 되자 조금 갈등된다.

그냥 여기서 에비타니스를 채집해서 알아서 충왕류를 죽이고 탈출할까?

무섭긴 하지만, 한번 한 거 두 번 못하겠어?

만약 서지한을 만나지 못 하게 될 경우도 대비해야 한다.

나는 잠시 멈춰 서서 에비타니스를 되는 대로 채집하기 시작했다.

간간이 한두 개씩 핵을 집어먹으며 채집하는 속도를 올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여기서 시간을 너무 끌어서 서지한을 완전히 놓치고 싶지도 않았기 때문에 적당히 채집한 뒤 이동하기로 했다.

그리고 그곳을 떠나 서지한의 뒤를 쫓으면서 나는 무수한 에비타니스를 만났다.

지금까지는 하나도 안 보이던 에비타니스가 여기에는 이렇게 많다니.

통로를 지나 들르는 굴마다 에비타니스가 잔뜩 피어 있었다.

따라가면 갈수록 점점 더 무성해지는 것 같다.

견물생심이라, 그 비싼 에비타니스가 지천으로 깔려 있는 걸 보자 슬그머니 물욕이 치솟았다.

좀 더 뜯어갈까?

으음. 아니야.

지금까지 뜯은 것들도 충분해.

핵만 먹고 부산물은 팔아 버린다고 해도 백억은 거뜬하잖아.

너무 욕심내지 말자.

욕심내다 망해.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비교적 가벼운 마음이었다.

서지한을 만나기만 하면 지나가던 운 없는 몬스터 하나를 잡아다가 마석을 뽑아내면 된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러나 그 생각은 오래가지 않았다.

통로 모퉁이를 도는 순간 갑자기 눈앞이 확 트였다.

동네 뒷산도 넣을 수 있을 것 같은 거대한 공터가 나타난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는 수많은, 정말로 수많은 에비타니스가 피어 있었다.

꽃밭이라고 해도 좋을 것 같았다.

발 디딜 틈 없이 빽빽하게 자라난 에비타니스의 군락.

그리고 심상치 않아 보이는 거대한 공간.

이 두 개의 조합은 참을 수 없이 불길하게 느껴졌다.

여기는 굴속이다.

마치 개미굴처럼 흙과 암석을 깎아 작은 방과 긴 통로를 잔뜩 지어놓은 것 같은 형태다.

그런 곳에 갑자기 이런 거대한 공터라고?

수상하다. 너무 수상하다.

뭔가, 뭔가 중요한 장소인 것 같다.

내가 아니라 여기 충왕류들에게 아주 중요한 장소.

그런 와중에 그나마 다행인 것은 서지한을 찾아냈다는 것이었다.

마치 천국을 연상시키는 아름다운 에비타니스의 꽃밭에 서지한이 새카만 기운을 풀풀 풍기며 서 있었다.

거대한 낫을 꺼내 들고서.

마치 천국에 서 있는 사신을 연상시키는 모습이었다.

아무튼, 사신이든 오신이든 서지한을 찾아냈다.

이제 고생 끝, 탈출 시작이라는 뜻이지.

“저기요!”

외쳐 불렀지만 서지한은 이쪽을 돌아보지도 않았다.

각성자인 그의 능력치를 생각하면 내가 여기 들어서기 전에 알아챘을 것 같은데, 이건 의도적인 무시라고 봐야 할 것 같다.

뭐야. 안 도와줄 건가?

멍하니 서서 뭐 하는 거지.

쟤가 안 도와주면 어쩔 수 없이 알아서 해야겠다.

여기에는 배가 터지게 먹어도 다 못 먹을 것 같은 에비타니스가 피어있다.

이 정도면 F급 충왕류 정도는 잡고도 남겠다.

그래, 에비타니스가 있으면 나도 알아서 할 수 있어.

무시하려면 무시하라지.

그를 가볍게 외면하고 그 자리에 앉아 에비타니스를 뜯으려는 순간, 갑자기 공기가 무거워졌다.

마치 갑자기 물속으로 들어온 것처럼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곧이어, 오늘 다시 던전에 들어오고 나서는 단 한 번도 본 적 없던 알림 메시지가 떠올랐다.

16619539604193.jpg

충왕 케르기스의 등장으로 ‘상태 이상: 위압’에 걸립니다.

16619539604199.jpg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