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1화
우리가 미처 묻기도 전에 서지한은 등을 돌리고 어디론가 떠나버렸다.
여기에 있는 누구도 감히 그를 붙잡지 못 했다.
붙잡을 틈도 없이 가버리기도 했고, 무언가 찾고 있는 듯 너무 바빠 보였기 때문이다.
그가 떠나고 나자 서민수 사원이 들뜬 얼굴로 입을 열었다.
“실물로 보는 건 처음인데, 소문도 믿을 게 못 되네요. 그냥 모른 척할 줄 알았는데.”
“근데 얼굴이 진짜. 어우, 무슨 연예인 같네. TV에서 볼 때도 느꼈지만, 각성자가 되고 나면 외모도 잘생겨진다면서요?”
김철수 대리님, 그게 무슨 말이세요?
저는 금시초문인데요?
나 예뻐졌나?
아침에 거울 봤을 때 그런 느낌은 없었는데.
뭐야, 또 나만 각성자 혜택 예외인가?
채집 스킬 달랑 하나만 받은 것도 서러운데 외모 보정까지 못 받았다고?
내가 억울해하는 사이 우리 김 대리님이 장단을 맞췄다.
“그러게요. 잘생기고 소문보다 착하네. 우리 같은 민간인은 거들떠도 안 볼 것 같았는데 이렇게 탈출석도 챙겨주고. 차장님, 그거 탈출석 맞죠?”
“네, 다인용 탈출석이네요. 수용인원이……."
탈출석을 만지작거리며 세공된 글자를 읽던 차장님이 멈칫했다.
그녀가 갑자기 입을 다물어버리자 모두 불안해하며 뒷말을 보채기 시작했다.
“왜 그러세요?”
“수용인원이 왜요?”
“무슨 문제 있습니까?”
마지막으로 질문한 마켓 관리자는 힘겨운 기색이 역력했다.
피도 많이 흘렸고, 정신이 가물가물한 모양이었다.
그 얼굴의 간절함을 읽었는지 차장님이 딱딱하게 대답했다.
“5인용 탈출석이에요.”
아.
마켓 관리자, 김철수 대리, 서민수사원, 차장님, 김 대리님 그리고 나.
여기에는 총 여섯 명이 있었다.
나는 그제야 나머지 일을 알아서 하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깨달았다.
5인용 탈출석이니, 여섯 명 중 한 명은 이곳에 남아야 한다.
누가 남을지는 우리가 결정해야 하는 것이다.
불편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모두 살고 싶어서 이곳까지 왔다.
죽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지금까지 너무나 많은 죽음을 보며 살아남았다.
죽고 싶지 않았다.
충왕류에게 잡아먹히는 건 싫었다.
“이리 주세요.”
결연한 얼굴로 김철수 대리가 나섰다.
“어쩌려고요?”
차장님이 경계하자 그는 창백한 얼굴로 누워 있는 마켓 관리자를 흘긋보더니 무언가 결심한 얼굴로 성큼성큼 다가섰다.
“시간을 더 끌 수는 없어요. 이대로 더 있으면 이분은 죽을 겁니다.그러면 자연스럽게 다섯 명이 되겠죠. 그걸 노리고 지금 일부러 시간을 끌고 있는 게 아니라면, 당장 주세요.”
맞는 말이었다.
마켓 관리자의 목숨은 시시각각 꺼져가고 있었다.
그가 없었다면 우리는 c급 충왕류의 공격을 버티지 못했을 거다.
생명의 은인을 희생시킬 생각은 없었다.
죽어가는 마켓 관리자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던 차장님은 무언가 결심한 듯 얼굴을 굳혔다.
그리고 손에 든 탈출석을 발동시켰다.
조막만 한 돌에서 강렬한 빛 무리가 터져 나오더니 이내 일렁이는 푸른색 빛의 문으로 변했다.
탈출 게이트다.
그 문을 앞에 두고 차장님은 오히려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가세요. 제가 남을게요.”
"네?”
차장님이 문을 발동시키고 우리 팀끼리 먼저 들어갈 거라 생각했는지 잔뜩 경계하던 김철수 대리가 얼빠진 소리를 냈다.
이어서 우리 김 대리님이 펄쩍 뛰었다.
“무슨 소리예요. 차장님!”
"가요. 이거 마냥 계속 열려 있는 문 아니에요.”
길어야 5분.
어쩌면 더 짧을지도 모른다.
김철수 대리는 차마 말을 잇지 못하겠다는 듯한 표정으로 차장님을 응시하더니 고개를 꾸벅 숙였다.
“죄송합니다.”
“죄송할 것 없어요.”
시간이 없었기 때문에 대화는 거기서 끝이었다.
김철수 대리와 서민수 사원이 마켓 관리자를 챙겨 게이트 안으로 사라지고, 결국 나와 차장님, 김 대리님만 남았다.
“두 사람도 어서 가요.”
"하지만, 차장님……."
김 대리님이 울먹이며 차장님을 붙잡았다.
하지만 차장님은 단호했다.
“문 닫히겠어요.”
그 말대로 게이트가 불안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닫힐 것 같다.
그래도 대리님이 게이트에 들어가지 않고 눈물만 뚝뚝 흘리고 있자, 결국 한숨을 쉰 차장님이 대리님을 보듬고 안아줬다.
“괜찮다니까……. 이제 정말 가요.”
대리님은 여기가 첫 회사였다고 한다.
지나가는 말로도, 그리고 술자리에서도 차장님이 없었다면 퇴사했을 거라고 자주 말하곤 했다.
나도 동감이었다.
그리고 나는 이렇게 대답했었지.
‘대리님도요.’
‘네?’
‘대리님 없었으면 저도 이렇게 오래 못 다녔을 거예요.’
부둥켜안은 두 사람을 보자 지난 기억들이 떠오른다.
마켓 관리자의 폭언에 화장실에서 울고 나오면 슬쩍 어깨를 두드리던 손.
앞에 놓이던 달달한 음료들.
업무 지시를 잘못하곤 나에게 뒤집어씌우는 팀장에게 조목조목 따져가며 나를 감싸주던 차장님.
싱싱한 신입이 왔냐며 회식자리에서 몸을 더듬는 1팀 팀장을 밀쳐내고 나를 끌고 나오던 김 대리님.
그리고 본인들도 무서울 상황에서 나를 먼저 벽 틈에 숨겨주려던 그 모습들.
일렁이던 게이트는 이제 금방 꺼질 듯 서서히 빛이 약해지고 있었다.
그래, 결심했다.
나는 옳은 일을 할 것이다.
나는 온몸의 힘을 다 모아서 달렸다.
그리고 껴안고 있는 두 사람을 확 밀쳐 게이트 안으로 밀어 넣었다.
손모아 선수의 몸통 박치기가 작렬합니다!
“모아 씨!”
단말마 같은 차장님의 비명을 마지막으로 두 사람을 삼킨 게이트가 닫혔다.
남은 것은 적막과 나뿐이다.
비로소 혼자 남자 갑자기 두려움이 확 밀려왔다.
하지만 후회는 하지 않는다.
어떻게든 되겠지.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든 차장님 혼자 여기 남는 것보다 내가 남는 게 훨씬 나은 게 당연하잖아.
나는 각성자니까.
그래, 나는 각성자다.
비록 전투력은 민간인 수준이라고 해도, 비각성자보다는 내가 낫지.
훌륭하다, 손모아.
씩씩하다, 손모아.
애써 기운을 북돋아보려고 노력해도 역시 무서운 건 어쩔 수 없다.
기분 탓인지 멀리서 ‘그어어’ 하는 기괴한 울음소리까지 들리는 것 같았다.
할 수 있다.
안 무섭다. 진짜 안 무섭다.
괜찮다. 정말이다.
안 무섭다. 안 무섭다…….
역시 무섭다.
혼자 남아 있으니 금방이라도 몬스터가 여기로 들이닥칠 것 같았다.
서지한이 나간 저 구멍으로 차칵차칵 걸어 들어올 것 같다.
아냐, 안 올 거야.
서지한이 저기로 나갔잖아.
나가면서 주변의 몬스터 다 죽였겠지.
봐, 조용하잖아.
정말 조용하다.
조용하니까 더 불안해.
하지만 마냥 불안해하고 있기만 하면 아무것도 안 된다.
아무 생각 없이 혼자 남은 거 아니잖아. 나름대로 계획을 세우고 남은 거라고.
지금은 혼자지만 이 던전 안에는 랭킹 1위 서지한이 있다.
그를 찾아서 몬스터 한 마리 잡아달라고 한 다음 채집 스킬로 마석을 뽑아내고 마석을 부숴서 탈출하면 되잖아?
깔끔한 계획 아니야?
쉽다, 쉬워.
그러려면 일단 서지한을 찾아야 한다.
과연 내 부탁을 들어줄까?
음, 그렇게 나쁜 사람 같지는 않았어. 탈출석도 줬잖아.
마냥 나 몰라라 하지는 않겠지.
진짜 문제는 그게 아니다.
그의 앞에서 내 히든 스킬을 드러내도 괜찮을까?
각성한 걸 알리는 건 채집하게 해달라고 부탁하려면 어쩔 수 없을 것 같으니 패스.
하지만 히든 스킬을 들키는 건 좀 안 좋은데.
아니, 많이 안 좋은데.
채집 한 번만 하게 해달라고 부탁하기에 하게 해 줬더니 마석을 뽑아낸다?
와, 제가 운이 좀 좋은 편이라서요, 하고 얼버무릴 수 있을 리가 없다.
분명 인과관계를 눈치챌 거다.
채집 셔틀로 코 꿰이는 건 아닐까 갑자기 오싹해졌지만 더 좋은 계획이 생각나지 않으면 이렇게 해야지 어쩌겠어.
그리고 랭킹 1위잖아.
알고 지내서 나쁠 것 없지 않을까?
그와 던전에 들어가면 크게 위험할 일도 없을 것 같고, 서지한이 사냥을 마치면 나는 뒤에서 채집만 하면서 일정량의 아이템을 상납하는 거다.
으음, 괜찮은 것 같은데.
김칫국을 항아리채로 들이마시면서 나는 아무도 없는 이 장소를 벗어났다.
막상 찾아간다고 해도 어디로 가야 하나 암담했는데, 다행히 그를 추적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서지한은 사방에 자신의 흔적을 남기고 갔던 것이다.
그가 지나간 길의 벽과 바닥에는 마치 타공판을 연상시키는 작은 구멍이 빽빽하게 나 있었다.
C급 충왕류가 죽을 때 그랬던 것처럼. 몸에 구멍이 숭숭 난다 싶더니 확 사라졌지.
아마 그 충왕류는 구멍이 뚫린 순간에 이미 죽었을 것이다.
그리고 바로 채집을 당해서 시신이 사라진 거고.
이건 서지한의 전투 흔적이 분명하다. 이 흔적을 쫓아가면 그를 만날 수 있을 거다.
구멍 난 바닥과 벽을 따라 걷는 내내 사방은 고요했다.
이제는 비명도, 충왕류의 걸음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죽을 사람은 다 죽고, 나갈 사람은 모두 나간 텅 빈 던전.
사실 길을 따라가다 보면 서지한이 루팅 하지 않고 남겨둔 몬스터 시체 한 둘을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기대했다.
하지만 얼마나 꼼꼼하게 루팅 했는지 전투 흔적 외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랭킹 1위니까 돈도 많고 아이템 욕심도 없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알뜰한 성격이구나.
그나저나 그가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쫓아왔는데 그 사이 대체 얼마나 멀리 간 건지.
아무리 걸어도 전투 흔적이 끝날 기미가 안 보였다.
어림잡아 거의 한 시간은 걸은 것 같은데.
처음에는 도둑처럼 살금살금 걸으면서 사방을 곤두선 눈으로 홅으며 걸었는데 워낙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상태가 지속되니 긴장감도 많이 풀린 상태였다.
서지한, 놀라울 정도로 깨끗하게 몬스터를 청소했다.
“앗.”
한참 동안 걷다가 뜻밖의 물건을 만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