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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9화 (9/231)

009화

워낙 어두컴컴해서 있는지도 몰랐는데, 세 사람의 몸을 가려줄 만한 바위가 은신처 건너편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몸을 완전히 숨겨주는 벽 틈과 달리 허술하기 짝이 없는 바위였다.

하지만 그래도 이렇게 아무것도 없는 곳에 있는 것보다는 낫다.

아니, 오히려 더 좋을지도 모른다.

확신은 없지만, 만약 내 생각대로라면…….

오히려 저 틈에 숨는 게 더 위험할지도.

“차장님, 일단 숨어요!”

바위를 가리키자 두 사람은 알아들은 듯 서둘러 뛰었다.

이제 정말로 시간이 없었다.

바위까지 가기 전에 충왕류가 나타날 것 같았지만 다행히 들키지 않고 몸을 숨길 수 있었다.

“이렇게 허술한데…….”

앞을 제외하고 사방이 뚫린 바위에 김 대리님이 불안한 듯 중얼거리자 차장님이 쉿 하고 신호했다.

몇 초 지나지 않아 충왕류가 모습을 드러냈다.

내가 새벽에 죽인 것과 같은 종류의 고급 충왕류 노말 타입이었다.

차칵, 차칵.

충왕류가 가까워지자 바짝 붙어 있는 두 사람이 덜덜 떨고 있는 게 느껴졌다.

두려움에 질린 눈동자 세 쌍이 충왕류의 움직임을 쫓았다.

놈의 더듬이가 동굴 벽을 빈틈없이 더듬었다.

우리가 숨어 있는 바위 바로 옆을 지나칠 때는 소리를 참기 힘들었다.

김 대리님도 마찬가지인지 두 손으로 자신의 입을 틀어막고 있었다.

눈물 맺힌 시선이 마주치고 견디기 힘든 시간이 이어졌다.

놈의 더듬이는 바위 앞쪽과 그 뒤의 벽을 더듬었다.

그래도 다행히 우리가 숨어 있는 바위 뒤쪽까지 뻗어오지는 않았다.

일종의 등잔 밑이다.

여기가 사각지대이기 때문에 새벽에 나도 살아남았던 것이다.

더듬이는 이제 우리 건너편 벽을 착실하게 수색하고 있었다.

벽을 차근차근 훑던 더듬이 끝이 마침내 두 팀장이 숨어든 은신처를 발견했다.

더듬이 한 짝이 은신처 틈으로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충왕류의 걸음이 멈췄다.

“이, 이거 뭐야!”

은신처 안쪽에서 당황한 목소리가 들리더니 곧 비명으로 뒤바뀌었다.

꼬챙이처럼 변한 더듬이가 은신처를 푹 찔렀다.

“컥, 커억…….”

곧 더듬이에 꿰뚫린 두 팀장이 나란히 끌려 나왔다.

우리가 숨어 있는 바위 쪽으로 뭔가 손짓을 하는 듯했지만, 곧 충왕류의 앞발에 공격당해 절명했다.

차마 지켜보지 못 하고 눈을 돌리자 뺨까지 소름이 오른 김 대리님이 보였다.

만약 저 은신처에 숨었다면 우리가 저런 꼴이 되었겠지.

충왕류가 죽은 두 팀장을 데리고 어딘가로 가버리는 동안 우리 세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바위 뒤에 숨어있었다.

“운이 좋았네요.”

정적 끝에 김 대리님이 조용히 말했다.

차장님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얼굴로 고개만 끄덕였다.

평소에는 원수처럼 싫어하던 두 팀장이지만 막상 눈앞에서 저렇게 죽는 모습을 보니 기분이 씁쓸했다.

그러나 마냥 남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씁쓸함보다는 두려움이 더 컸다.

쓸데없는 감상에 빠져 있을 때가 아니었다.

고비를 넘기긴 했지만 계속 여기에 숨어 있을 수는 없다.

김 대리님의 말대로 운이 좋았을 뿐이다.

혹시라도 변덕스러운 충왕류 한 마리가 다시 나타나 바위 뒤를 수색하면 그걸로 끝장이었다.

바로 옆 사람의 얼굴도 알아보기 힘든 어둠 속에서 간간이 들려오는 누군가가 죽는소리, 그리고 계속해서 들려오는 충왕류의 걸음소리를 들으며 숨어 있는 건.

죽을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다.

두 사람도 비슷하겠지.

나는 지금 살아남을 수 있을 확률이 가장 높은 방법을 고민하고 있었다.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다.

첫 번째는 마켓 관리자를 찾아내서 그의 도움을 받아 탈출하는 것.

두 번째는 내가 새벽에 했던 그 방법을 한번 더 시도하는 것.

애석하게도 둘 다 성공 확률이 그리 높지 않고, 운이 따라줘야 가능한 일이었다.

첫 번째 방법의 문제는, 마켓 관리자가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게다가 마켓 관리자를 찾아 나섰다가 그를 만나기 전에 충왕류와 먼저 마주치면 끝장이다.

물론 마켓 관리자가 우리를 외면할 가능성도 있지만, 그래도 그도 사람인데 그러지는 않을 거야.

에이, 설마.

그리고 두 번째 방법도 문제가 좀 있었다.

위기에 빠진 충왕류는 소리를 질러 주변의 동료를 끌어 모은다.

새벽녘의 싸움에서 바글바글 몰려온 충왕류들이 아직 기억에 선했다.

그것들을 상대로 싸우고 살아남는 건 불가능하다.

에비타니스의 핵을 잔뜩 먹고 한 마리는 어떻게 해치운다 해도 그 이후로는 방법이 없었다.

우리는 세 명이니 마석도 최소 F급 마석 세 개가 필요하다.

그럼 세 마리를 해치워야 하는데, 우리가 그걸 어떻게 해?

게다가 두 번째 방법은 초반부터 난관이었는데, 이곳에서는 도무지 에비타니스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새벽에 들어왔을 때는 그렇게 흔하게 피어 있던 에비타니스가 단 한 포기도 보이지 않았다.

이래서야 충왕류와 싸울 만큼의 에비타니스를 손에 넣는 건 불가능하다.

하지만 몇 개라도 얻는다면 급할 때 나눠먹고 도망칠 수 있겠지.

어쨌든 일단 여기를 벗어나야 했다.

가면서 주변에 에비타니스가 있는지 찾아봐야 한다.

내가 바위를 벗어나려고 하자 차장님이 다급하게 내 팔을 붙잡았다.

“모아 씨? 어디 가요?”

"여기 계속 있을 수는 없어요.”

충왕류들의 순찰 소리가 계속 어렴풋이 들렸기 때문에 우리는 최대한 작은 목소리로 대화했다.

어둠 속에서 긴장한 속삭임이 새어 나왔다.

“어쩌려고요? 지금은 별다른 방법이 없어요. 참기 힘든 건 알겠지만…….”

차장님은 내가 두려움을 견디지 못 하고 어디론가 도망치려고 한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계획을 세우는 데에 너무 몰입한 나머지 설명하는 걸 잊었다.

“차장님, 일단은…….”

에비타니스가 피어 있는 곳을 찾아볼 생각이라는 걸 설명하려는데 차장님이 먼저 내 말을 잘랐다.

“모아 씨. 김 대리. 내 말 잘 들어요.”

팔을 뻗어 대리님과 내 어깨를 단단히 움켜쥔 차장님의 박력에 나는 하려던 말을 삼키고 엉겁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다 살아나갈 거예요. 지금이 상황, 견디기 힘든 거 알아요. 침착하게 기다리면……."

“기다리면요?”

“구조대가 올 거예요.”

기대 어린 눈으로 차장님의 말을 기다리던 김 대리님이 맥이 빠진 듯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차장님……. 지난번에 생성된 던전 구조작업도 일주일이 지나서야 겨우 팀이 꾸려졌잖아요. 게다가 던전 생성 폭발 당시 빨려 들어간 사람 중 생존자는……."

0명.

공식적으로, 생존자는 없었다.

“일주일이나 여기서 살아남긴 힘들 거예요.”

“그때와는 달라요. 지금 같이 휩쓸린 사람 중에는 각성자도 여럿 있잖아요. 민간인 주거지에서 발생했던 그때와는 다르니까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이 있을 거예요.”

이런 위기 상황에서는 희망이 중요하다.

가능성이 낮은 희망이더라도 좌절하지 않는 게 중요했다.

그리고 차장님의 말대로, 마켓 관리자들이 있잖아.

나도 있고.

앞으로의 계획을 설명하기 위해 각성한 사실을 밝히기로 결심했다.

어쩌면 나중에 이걸 후회할지도 모르지만, 지금 당장 사는 게 우선이지.

“저, 두 분에게 드릴 말씀이 있어요.”

모든 걸 말하고 에비타니스를 찾아 탈출하는 거야.

큰 맘먹고 비밀을 털어놓으려는데 김 대리님이 갑자기 손을 들어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저……."

“저도 들었어요.”

네? 차장님, 뭘 들으셨어요?

저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영문 모를 일에 어리둥절해하고 있자 차장님이 손을 들어 어딘가를 가리켰다.

그리고 귓바퀴 근처에서 손을 모으고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그 행동을 따라 하자 아주 희미하게 어떤 소리가 들렸다.

처음에는 무슨 소리인지 분간하기가 힘들었다.

뭔가 부서지는 것 같기도 하고, 잡음 같은 느낌도 들고.

그러나 곧 깨달았다.

“싸우는 소리예요.”

김 대리님이 정답을 말했다.

비명과 죽음, 살려달라는 아우성만 가득한 이 현장에서 누군가가 싸우고 있다면 주인공은 단 하나뿐이다.

“마켓 관리자겠죠?”

내 말에 차장님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에비타니스를 찾아 이 던전을 배회하는 무모한 계획을 즉시 폐기했다.

마켓 관리자의 위치를 확인한 이상 최우선 목표는 그 각성자와 합류하는 거다.

각성했다는 사실을 밝히겠다는 생각도 꿀꺽 삼켜버렸다.

의미가 없지.

어차피 전투계 각성자도 아니고 치유계 각성자도 아닌데.

게다가 나는 제작계 각성자도 아니네.

하하. 진짜 아무것도 아니네.

“합류해야 해요.”

차장님의 결론에 동의하는 바이다.

하지만 우리는 바위 뒤에서 꼼짝 도하지 않았다.

비교적 안전한 장소를 떠나 언제 충왕류와 마주칠지 모를 어두운 굴로 이동해야 한다.

이건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차장님과 김 대리님 모두 섣불리 움직이지 못 하고 있었다.

여기를 떠나는 게 옳은 결정일까?

차라리 기다려 보는 게 낫지 않을까?

하지만 그랬다가 마켓 관리자가 더 멀리 가버리면?

소리라도 들리는 지금 이동하는 것이 옳은 결정이 아닐까.

우리는 아마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을 거다.

하지만 이건 답이 없는 고민이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잘못하면 기껏 잡은 이 기회를 놓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가요.”

내가 벌떡 일어서서 바위 밖으로 나서자 두 사람은 깜짝 놀랐다가 결국 결연한 얼굴로 따라나섰다.

어두컴컴한 데다 비명까지 들리는 저 굴로 들어가는 건 정말 너무 싫었다.

하지만 저 안에는 우리를 구해줄 마켓 관리자도 있으니까.

희미한 이끼의 빛에 의지해 목숨을 운에 맡기고 던전을 걷는 시간이 시작되었다.

혹시 숨소리가 커서 충왕류를 끌어들일까 봐 우리는 숨도 크게 쉬지 못 했다.

얼마나 걸었을까.

갑자기 충왕류의 걸음소리가 들렸다.

차칵, 차칵.

숨을 곳도 없는 좁은 이동통로다.

피가 식는 것 같은 두려움이 밀려들었다.

“뒤쪽이에요. 앞으로 좀 더 빨리 걸어요. 뛰지는 말고.”

차장님이 입술도 거의 달싹이지 않고 흐르듯 지시했다.

금방이라도 충왕류가 나를 낚아챌 것 같았지만 우리는 꾹 참고 빠른 걸음을 유지했다.

우리가 뛰면, 소리를 듣고 놈도 뛸 것이다.

그 작전이 주효했는지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돌과 벽이 깨지고 사방이 어수선하게 어질러진 장소에 도착했다.

충왕류에게 잡히지 않고.

한눈에 봐도 크게 싸운 흔적들이다.

몬스터의 시신은 보이지 않았다.

이미 루팅을 끝낸 모양이다.

하긴, 마석이 나올지도 모르는 마당인데 루팅을 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이미 떠난 것 같아요.”

몬스터뿐만이 아니었다.

여기에는 아무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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