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8화
차장님은 화나서 방방 뛰는 나에게 고생했다는 말만 했다.
그런 말은 일상이라는 듯 대수롭지 않은 반응이었다.
아, 차마 입이 안 떨어진다.
그래도 말해야 해.
평생 말 안 할 수는 없잖아.
그래. 지르자. 미안하더라도 지르는 거야.
“차장님, 저…….”
입을 여는 순간 갑자기 회의실이 크게 흔들렸다.
몇 숟가락 먹지 못한 죽이 출렁거리며 테이블 위로 마구 튀었다.
차장님이 눈을 가늘게 떴다.
“지진?”
흔들림과 동시에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간간이 비명도 들린다.
불길한 느낌에 몸을 움츠리는데, 차장님이 자리에서 일어나 문고리를 잡았다.
“차장님?”
“무슨 일인지 잠깐 보고 올게요. 머리 조심하고 테이블 아래에 숨어있어요. 금방 올 테니까.”
차장님은 내가 대답할 겨를도 주지 않고 문 밖으로 뛰쳐나갔다.
혼자 남은 나는 안절부절못하며 일단 죽을 퍼먹기 시작했다.
버릴 수는 없잖아.
그나저나 이렇게 있어도 되나?
나도 밖으로 나가야 하는 거 아냐?
잠깐 보고 온다던 차장님은 내가 죽을 다 먹을 때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혼자 회의실에 앉아 있기에는 너무 불안했기 때문에 나는 견디지 못 하고 밖으로 나가기로 했다.
그리고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간 순간,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이해했다.
차장님이 왜 돌아오지 못한 건지도.
공간이 일그러지고 있었다.
실력 없는 화가가 대충 그린 그림처럼 아주 멀리서부터 온갖 풍경이 뒤섞였다.
보통 사람이라면 풍경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몰랐겠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던전.
던전의 내부 풍경과 이곳이 뒤섞이고 있다.
이곳에 새로운 던전의 입구가 열리고 있었다.
이제야 이해가 된다.
내가 휘말렸던 불규칙 균열은 새로운 던전이 생겨나는 전조증상이었던 것이다.
마치 지진처럼, 던전이 이곳으로 침투하면서 그에 의한 충격으로 발생한 것이었다.
도망도 소용없다.
내 발보다 저게 훨씬 빠를 거다.
그 순간, 번개처럼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지금 여기에 던전 입구가 생기고, 사람들을 던전으로 빨아들이고 있는 거라면.
탈출석을 구해야 해.
나는 다급하게 마켓을 열었다.
가지고 있는 돈을 모두 써서라도 탈출석을 살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건 불가능했다.
마켓에 지금 올라와 있는 것 중 가장 저렴한 1인용 탈출석의 가격이 50억 원이었다.
여기서 2년 정도 일하고 저걸 살 정도로 돈을 벌어가는 마켓 관리자는 대체 얼마를 받는 거야.
그리고 그것이 내가 던전 밖에서 한 마지막 생각이었다.
다음 순간, 나는 아주 익숙한 공간에 서 있었다.
바로 오늘 새벽 탈출한 그 던전에.
두 번씩이나 이 거지 같은 던전에 들어오다니!
이 던전을 탈출한 지 반나절도 지나지 않았는데!
미칠 듯한 후회가 몰려왔다.
그냥 전화로 퇴사한다고 할 걸.
그랬으면 지금쯤 25억과 함께 즐겁고 행복한 하루를 보내고 있었을 텐데!
상황이 상황이라 후회는 길게 이어지지 못 했다.
컴컴한 굴속.
사방에서 아우성치는 비명과 외침이 난무한다.
동시에 그들을 빠르게 추격하는 익숙한 소리가 들렸다.
차칵, 착, 착, 착, 착.
여기저기 뚫린 구멍 사이로 충왕류가 달리는 그림자가 보인다.
그들로부터 뛰어 달아나던 누군가의 비명이 길게 이어지다 뚝 끊긴다.
이곳은 완전히 인간 사냥의 현장이었다.
나 혼자 휘말렸던 새벽녘과는 분위기가 완전히 다르다.
충왕류들은 침입자가 있음을 명백히 알고 있었고, 그들을 찾고 죽이며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상황이 훨씬 안 좋다.
게다가 무슨 영문인지 여기에는 빛을 내는 식물도 없었다.
그나마 천장에 발광 이끼가 약간 있어 희미하게 형태는 분간할 수 있는 수준이다.
“살려주세요, 도와줘! 도와…… 아아악!”
도움을 요청하던 누군가의 목소리가 또 비명으로 끝맺어졌다.
섬뜩함에 굳어 있던 나는 얼어붙은 다리를 애써 추슬러서 비명이 들린 쪽의 반대편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내가 서 있는 곳은 굴 한복판인듯하니, 일단 벽에 붙을 생각이었다.
내가 그렇게 움직이는 동안에도 비명이 몇 번이나 들려왔다.
너무 어두워서 온몸의 감각이 한계까지 곤두선다.
잠깐 사이 온몸이 식은땀으로 흠뻑 젖은 듯했다.
그러다 문득, 바지 뒷주머니에 넣어둔 휴대폰이 떠올랐다.
플래시를 켜는 게 현명한 생각일까?
괜히 주의를 끌어봐야 일찍 죽을 뿐이다.
어차피 도와줄 사람도 없잖아.
잠깐, 도와줄 사람이 있다.
마켓 관리자들.
아무리 싹수없는 성격 파탄자들이라고 해도 사람이 죽어 나가는데 설마 외면하지는 않겠지?
지금으로서는 믿을 건 그들밖에 없다.
각성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데다 실전 경험도 없긴 하지만 이 던전에는 적어도 열 명의 각성자가 있다.
아예 절망적인 상황은 아니다.
하지만 플래시를 켠다고 해도 주변에 마켓 관리자가 없으면 헛일이다.
오히려 관리자들이 오기 전에 충왕류에게 먼저 발견되어 죽을 수도 있었다.
망설이는 사이 내가 가려던 방향에 사람의 그림자가 보였다.
누군가가 충왕류에게 쫓기다가 이곳으로 들어선 것이다.
그와 눈이 마주쳤다고 생각하는 순간, 뒤에서 기다란 앞발이 튀어나와 그를 가로로 베어버렸다.
“흐윽!”
놀라 다급하게 숨을 들이켜는데 무언가가 나를 확 잡아끌었다.
너무나 놀란 나머지 비명도 나오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내 손을 잡아 끈 건 사람이었으니까.
만약 비명을 질렀다면 둘 다 죽었을 거다.
무모하리만큼 위험한 짓이었기 때문에 나는 일단 상대가 이끄는 대로 따라가기로 했다.
날 살리기 위해 자신의 위험도 감수했는데, 믿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를 따라 정신없이 달려 그 자리를 도망친 후에야 나는 간신히 나를 잡아 끈 사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차장님?”
방금 전까지 나와 회의실에 함께 있던 차장님이었다.
“헉, 헉. 모아 씨. 빨리 이리로.”
한 손에 휴대폰을 꺼내 들고 액정 불빛으로 사방을 확인하며 차장님은 무언가를 찾아 움직이고 있었다.
갑자기 희망적인 가설이 떠올랐다.
마켓 관리자와 합류하신 걸까?
애석하게도 그런 건 아니었다.
차장님이 나를 데려간 곳은 근처 굴의 어느 벽이었다.
다른 곳과 별다른 것 없는 평범한 벽이었다.
하지만, 한 가지 특별한 점이 있다면 사람 세 명 정도가 몸을 숨길만한 좁은 틈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가 좀 있어 보였다.
선객이 있었던 것이다.
오늘 아침에 봤던 1, 2팀 팀장과 김 대리님이 벽 틈을 두고 대치중이었다.
“어떻게 된 거예요?”
차장님이 김 대리님에게 정황을 물으며 다가섰다.
혼자 있는 김 대리님을 일방적으로 몰아붙이던 팀장들은 차장님과 내가 나타나자 낭패 어린 기색을 띠었다.
“두 사람이 쫓기고 있더라고요. 급하게 여기 숨겨주고 보니 팀장님들이셨어요.”
김 대리님은 무척 후회하는 듯했다.
대충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알 것 같다.
틈은 3인용, 사람은 다섯 명.
저 팀장들에게 목숨을 구해준 은인에 대한 고마움을 느낄 양심 같은 게 있을 리가 없었다.
팀장들은 김 대리님을 끌어내고 이 은신처를 차지하려던 것이다.
“여기는 차장님이랑 제가 찾은 곳이니 다른 곳을 찾으라고 해도 막무가내여서…….”
김 대리의 목소리에 분위기가 불리하게 돌아가는 걸 느꼈는지 1 팀장이 나섰다.
“아니, 죽을 마당인데 내 자리 네 자리가 어디 있어? 다른 데 찾아보면 될 거 아냐. 이미 한번 찾았으니 또 찾을 수 있을 거야.”
그래그래, 신 차장. 지금 밖이 얼마나 위험한데. 윗사람을 사지로 몰아서야 되겠나?”
아니, 이 인간들은 구해준 은혜도 모르나.
평소에도 사람새끼가 아니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순간 열이 확 치밀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차장님이랑 대리님이 찾으신 곳이잖아요, 물에 빠진 사람 구해주니 보따리 내놓으라는 거나 마찬가지 아니에요?”
내가 쏘아붙이자 오히려 2팀장이 정색했다.
“어허, 말조심해, 모아 씨. 나 모아 씨 팀장이야.”
이런 마당에도 이따위 소리나 하고 있다니.
어처구니가 없어 입이 벌어지는데, 우리 차장님과 김 대리님도 비슷한 소감인지 질린 표정이다.
그때, 이 잠깐의 틈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충왕류의 걸음소리가 들렸다.
차칵, 차칵, 차칵.
무언가를 쫓는 빠른 걸음은 아니고 탐색하는 듯한 걸음이다.
소리가 들리자 두 팀장은 실랑이를 팽개치고 은신처로 몸을 날렸다.
김 대리님이 뒤늦게 막아서려고 했지만 오히려 거칠게 밀쳐져 바닥을 뒹굴었을 뿐이다.
“김 대리!”
쓰러진 대리님을 감싸며 차장님이 벽 틈을 노려보았다.
두 팀장은 이미 깊게 들어갔는지 틈의 그림자에 가려져 잘 보이지도 않는다.
“다쳤어요?”
“좀 까졌는데, 그보다 어서 숨어야 해요. 한 사람 정도는 더 숨을 수 있을 거예요.”
말을 마침과 동시에 두 사람이 나를 돌아보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었다.
“저요? 아니에요. 저는……."
“모아 씨, 실랑이 할 시간 없어요. 어서 들어가요.”
차장님이 지시하고 김 대리님이 나를 은신처로 밀어붙였다.
걸음소리는 이제 거의 근처까지 온 상태였다.
이 상황에, 두 사람만 밖에 남겠다는 소리는, 자신들을 희생하겠다는 뜻이겠지.
그러나 나를 은신처로 숨기려는 김대리님의 소망과 달리 이미 숨어 있는 두 팀장은 생각이 다른 것 같다.
은신처 안에서 팔이 튀어나와 나를 강하게 밖으로 밀쳐냈던 것이다.
“당신들이 그러고도 사람이야?”
김 대리님이 따졌지만 은신처에서는 아무런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우리가 죽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작은 바위 하나를 발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