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7화
그런 이유로 회사 사람들은 되도록 마켓 관리자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려고 조심했다.
뭐, 마켓 관리자도 어지간하면 민간인을 건드리지는 않지만.
애초에 급이 다르다고 생각하기 때문일까?
아무튼, 마켓 관리자는 정말 신의 직장이다.
일도 쉽고, 딴짓도 얼마든지 할 수 있고, 사장까지 눈치를 보는 데다, 회사를 그만두려고 하면 재계약해달라고 인사팀장이 매달리는 삶.
와, 끝내준다.
갑자기 각성했다는 사실을 밝히고 싶은 유혹이 치솟았지만 간신히 참아냈다.
나중에, 나중에.
방 안에 들어서기 전 일단 한껏 싹싹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었다.
나도 이제 헌터인데 하는 생각이 잠시 들었지만 내가 깽판 놓으면 우리 팀원들이 고생하니까.
“안녕하세요, 2팀에서 왔습니다.”
안으로 들어서자 무언가를 읽고 있는 마켓 관리자가 보였다.
그는 읽고 있는 책에서 눈도 떼지 않은 상태로 고개만 까딱했다.
들었다는 표시였다.
싸가지…….
화내기도 새삼스럽다.
어이구, 난 저렇게 되지 말아야지.
“아침 드셨어요? 오늘 물품이 좀 많은데, 잘 부탁드립니다.”
가볍게 스몰 토크를 시도했지만 그는 아까와 마찬가지로 흘긋 보더니 내가 내민 종이만 받아갈 뿐이었다.
이런 반응이 돌아올 줄 알고 있었지만 안 할 수가 없었어.
쟤가 싸가지 소실증을 앓고 있지 내가 앓고 있는 건 아니잖아.
“왜 이렇게 많아? 아침부터, 에이씨. 좀 걸린다.”
잠시 뒤, 갑자기 기대도 안 했던 대답이 돌아왔다.
아침부터 쌍소리라니.
지극히 보통의 마켓 관리자로군.
근데 왜 오래 걸린다는 거야.
마켓 나도 써봤는데.
그냥 검색하고 끄집어내면 그만이잖아.
하지만 그런 말을 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잠시 뒤, 복도가 슬슬 소란스러워지자 어렴풋이 이유를 깨달았다.
이놈, 농땡이 치는구나.
이러니 마켓관리팀 복도에 늘 줄을 서 있지.
하, 야근 확정인가.
그냥 서 있기도 어색해서 여기저기를 둘러보다가 문득 관리자가 계속 읽고 있던 책을 발견했다.
몬스터 공략집.
올해 던전 관리청에서 발행한 공략집이었다.
내가 만났던 그 충왕류도 저 책에 있을까?
그 충왕류는 얼마나 강한 놈이었을까?
아직도 기억난다.
바위를 과자처럼 부숴버렸지.
“관심 있어?”
마켓 관리자였다.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리자 나를 빤히 보고 있는 그와 눈이 마주쳤다.
“네?”
이런, 너무 대놓고 보고 있었나 보다.
“이거 보고 있었잖아. 내 책.”
마켓 관리자는 생각보다 온건한 말투였다.
가능한 한 말을 섞고 싶지 않은데.
괜히 꼬투리 잡히기도 싫고.
에이, 어차피 퇴사할 거.
이참에 궁금한 거나 물어보자.
“그냥, 좀 궁금한 게 있어서요.”
"어떤 거?”
뭐야. 왜 이렇게 적극적이지?
관심분야에 대한 화제가 나와서 그런가?
하긴, 마켓 관리자들은 서로를 재수 없어하니까 자기들끼리는 이런 이야기 안 하나 보다.
그리고 시간 끌려고 이러는 게 분명하다.
진짜 일하기 싫은가 보네.
별로 어려운 일 하는 것도 아니면서.
“혹시 앞다리를 이렇게, 사마귀처럼 굽히고 다니는 몬스터 알아요?”
"충왕류는 대부분 그런 앞다리잖아. 몰라?”
무시하는 태도를 숨기지도 않고 마켓 관리자가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헌터도 아닌데.
“더듬이를 채찍처럼 휘두르고, 크기는 한 3미터 좀 넘나? 배가 개미 같아요. 엄청 크고.”
내 설명을 듣고 잠시 생각하더니 그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F급 충왕류 노말 타입이네.”
"이름이 뭐예요?”
“F급 충왕류 노말 타입.”
"……그게 이름이에요?”
"보스나 이름을 가지고 있지 그렇게 약한 건 이름도 없어. 그냥 비행 타입, 독 타입, 노말 타입 이런 식으로 나누고 놈이 주는 아이템에 따라서 등급 매기는 거지. A급 충왕류의 갑각 같은 걸 주면 A급 충왕류로 취급하는 거고, B급 갑각 주면 B급 충왕류 되는 거고.”
약하다고?
나는 그거에 죽을 뻔했는데?
“민간인한테나 위험하지, 헌터한테는 뭐.”
그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오만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앗,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아.
직장인의 날카로운 감이 외쳤다.
지금 딸랑거리지 않으면 귀찮아진다고.
“와, 정말 대단해요. 저는 마주치기만 해도 겁나서 못 살 것 같아요.”
"어차피 민간인은 마주칠 일 없어.”
어제 마주쳤다, 이놈아.
아무튼 이야기를 듣고 나니 결심이 더욱 강해졌다.
절대, 절대 던전에 다시는 안 들어가.
그리고 딱 좋은 타이밍에 목록의 마지막 물건이 카트 안으로 떨어졌다.
“아, 물건 다 처리해주셨네요. 감사합니다. 저는 이만 가볼게요.”
고개를 꾸벅 숙이자 그는 내가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고개만 까딱였다.
그래도 얘가 이 마켓 관리자 중에 그나마 성격이 좋은 편이다. 인사는 받아주잖아.
어차피 이 생활도 얼마 남지 않았다.
인벤토리의 현금을 생각하자 기분이 확 좋아졌다.
아무도 내 기분을 상하게 할 수없다.
난 25억이 있는 부자니까!
와, 돈이 좀 있다는 것만으로 회사가 이렇게 다닐 만하게 느껴지다니.
언제든 그만둘 수 있다고 생각하니 어떻게든 버텨야 한다고 생각하며 다니던 때와는 스트레스의 강도가 전혀 달랐다.
평소에는 하기 싫어서 미쳐버릴 것 같던 서류 작업도 재미있을 정도다.
어차피 길어봐야 한 달.
이 정도는 이후의 휴식시간을 더욱 달콤하게 만들어줄 약간의 쓴맛이 아닐까.
커피를 마시고 먹는 케이크가 더 단 것처럼 말이야.
그런 생각으로 실실 웃고 있는데 누군가가 내 옆으로 슬쩍 다가왔다.
“괜찮아요? 정신이 좀 혼미한 것 같은데.”
한 손에 비닐봉지를 들고 있는 김대리님이었다.
둘러말하긴 했지만, 서류 작업할 때마다 미쳐버리겠다고 앓던 직장동료가 결국 진짜 미쳐버린 건 아닌가 걱정하는 눈빛이다.
대리님, 아닙니다.
그런 거 아니에요.
“그냥 갑자기 재밌는 생각이 나서요.”
머쓱해져서 둘러대자 어쩐지 안쓰러워하는 눈으로 나를 보던 대리님이 가지고 있던 비닐봉지를 내밀었다.
“소고기죽. 먹고 와요.”
코앞에 들이밀어진 봉투에서 맛있는 냄새가 확 풍겼다.
점심시간이 좀 지난 덕분에 마침 배가 고프던 참이었다.
“앗, 감사합니다. 이거 다 끝내고 먹을게요. 어차피 얼마 안 남았어요. 그리고 계좌 주시면…….”
내 말을 끊고 대리님이 작업이 끝난 서류를 집어 들었다.
“발송 단계만 남았죠? 먹고 오면 끝나 있을걸.”
“아니에요, 대리님. 너무 미안해서…….”
“알죠? 나 발송 쪽 베테랑인 거. 30분도 안 걸려요. 진짜 별거 아니니까 밥 먹어요.”
“진짜 괜찮아요, 대리님.”
제가 할게요,라고 대답하고 싶었는데 내 위장은 의견이 좀 달랐던 것 같다.
꼬르륵.
힘차게 아우성치는 뱃소리에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대리님은 웃음기를 감추지 않고 비어 있는 회의실을 턱짓했다.
“먹고 와요.”
결국 나는 소고기죽과 함께하기로 했다.
회의실로 들어와 죽 뚜껑을 열자 방 안에 고소한 냄새가 확 퍼졌다.
위에 뿌려진 참기름을 적당히 섞고 후후 불어서 한 입 먹는데, 누군가 회의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모아 씨, 잠깐 괜찮아요?”
"차장님!”
숟가락을 놓고 일어나려 하자 차장님이 손으로 나를 만류했다.
그리고 내 앞에 마주 앉았다.
“바로 외근 나가야 해서. 밥 먹는데 불편할 거 알지만 양해해주세요. 시간이 없어서…….”
“아뇨, 불편하긴요!”
“고마워요. 몸은 어때요?”
안부를 묻는 차장님이 오히려 안색이 더 안 좋았다.
이 죽은 차장님 앞에 놓여 있어야 하는 거 아냐?
아까 기록 보니 새벽 6시에 퇴근하셨던데.
지금 출근했으면 대충 7시간 만에 회사에 다시 돌아오신 셈이다.
“쌩쌩해요. 무단결근해서 죄송해요. 어제 야근하셨다면서요?”
"누가 말했어요?”
“김 대리님이요.”
“그걸 왜 말해. 후,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그리고 회사에 무단결근이 아니라 내가 연락받았다고 말했으니까 말 맞추고요. 무단 결 근인거 우리 팀만 알아요.”
역시 차장님.
하지만 애석하게도 나는 이 말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침에 팀장님이 저 무단결근 했다고 다른 팀장님들 앞에서 말하셨어요…….”
차장님은 잠시 침묵했다가 길고 긴한 숨을 내쉬었다.
솔직히, 지금 진짜 팀장보다 그녀가 더 팀장 같다.
팀에서 일을 가장 많이 하는 것도, 팀원을 챙기는 것도, 가장 능력이 있는 것도 차장님이다.
다들 올해 차장님이 팀장으로 승진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올해 인사발령에 그녀의 이름은 없었다.
모두 의외라는 눈치였지만 막상 차장님 본인은 이미 예상하고 있었는지 담담했지.
“그럼 어쩔 수 없네. 아무튼, 지금은 괜찮아도 나중에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안 좋으면 말해요. 일정 조정할게요.”
차장님이 그렇게 말해주셨지만 나는 마음이 무거웠다.
오늘따라 더 마르고 가늘게 보이는 차장님의 어깨와 어두운 눈 밑, 혈색 없는 입술이 눈에 들어온다.
외근을 간다고 하셨으니 퇴사한다고 말하려면 지금 말해야 한다.
아니면 내일 말하거나.
그런데 이 분위기에서 어떻게 말하냐고.
그런데 뭔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는지 차장님이 먼저 운을 띄웠다.
“뭔가 할 말 있어요? 힘들면 어려워말고 말해요. 일정 조정할게요.”
"차장님이 욕먹잖아요.”
"그게 일인데요, 뭐.”
차장님은 어깨만 으쓱했다.
저 팀은 하는 것도 없으면서 힘든 척만 한다고.
사실 한가한데 바쁜 척한다고.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닌데 대단한 일 해내는 양 한다고 욕하는 소리를 얼마나 많이 들었는지 모른다.
전에 한번 차장님이 자리를 비웠을 때 차장님을 대행한 적이 있는데 ‘아, 그렇게 바쁘세요? 뭐가 그렇게 바쁘실까?’ 하고 비아냥거리는 소리를 들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