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6화
물론 어딘가에는 그런 사람들이 있으니까 헌터 사회가 유지되고 던전들이 공략되는 거겠지만.
적어도 나는 아니다.
생각을 해보라고.
던전에 가서 100억을 더 얻는다고 해도 죽으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이야?
내 사랑스러운 25억을 뒤로하고 죽으면 억울해서 어떡하냐고.
앞으로 절대 위험한 곳에 안 가고, 위험한 일도 안 하고.
내 예쁘고 깜찍한 25억과 함께 건강하고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 거다.
그런데, 벌써부터 내 행복을 깎아먹는 사람이 나타났다.
“어, 모아 씨. 어제 아팠다며?”
아침부터 회사 출입구를 가로막고 농담 따먹기를 하던 관리 1팀 남자 팀장이 번들거리는 얼굴로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네, 좀…….”
다들 내가 갑자기 아팠던 것으로 아는 것 같다.
대충 장단을 맞춰 주는 게 낫겠지.
어색하게 대답하며 재빨리 지나가려는데 내가 속한 2팀 팀장이 비열하게 웃으며 재빨리 앞을 막아섰다.
“아팠는데 얼굴색이 왜 이렇게 좋아? 어디 놀다 온 거 아냐?”
둘러선 사람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흥미진진한 먹잇감을 발견한 표정이었다.
그리고 거기에 앞장서서 자기 팀 팀원을 씹기 좋은 제물로 바치는 사람이 바로 우리 팀장님이시다.
“좀 부었나 봐요.”
얼굴색이 좋다고?
힐링 포션 때문인가?
컨디션이 좋긴 하다.
퇴사할 생각 때문에 마음이 가벼워서 그런 줄 알았는데.
“그래? 많이 아팠나 보네. 그래도 연락은 줘야지. 사람이 경우가 없이…….”
아프다가 출근한 사람 앞을 떼로 막아 서고 있는 건 경우가 바른 일이냐 따져 묻고 싶었다.
하지만 일단 무단결근을 한 건 맞아서 나는 고개만 꾸벅 숙이고 얼른 자리로 향했다.
어차피 퇴사할 마당이라 확 들이받고 싶은데.
남은 팀원들이 고생할 걸 생각하면 그렇게는 못 하겠다.
안 그래도 내 무단결근으로 어제 많이 힘들었을 텐데.
게다가 내가 퇴사하고 나면 남은 사람들의 일이 더 힘들어질 테니 이 이상 민폐를 끼치지 말자.
“모아 씨, 몸은 괜찮아요?”
익숙한 책상에 앉아 컴퓨터를 켜는데 옆자리 김 대리님이 말을 붙였다.
“아, 네, 이제 괜찮아요. 연락 못 드려서 죄송해요.”
실제로 배에 구멍이 났던 건 사실이라 딱히 거짓말은 아니다.
연락도 일부러 안 한 것도 아니고.
“그럴 수도 있죠. 오늘은 너무 무리하지 말아요.”
들었냐, 팀장아.
사람이 아프다가 출근했으면 이렇게 말해줘야 하는 거야.
우리 팀은 모두 사람이 좋다.
팀장 빼고.
“어제는 병가처리했어요. 서류 제출은 끝났으니 걱정하지 말고.”
"아, 오늘 제가 출근해서 내려고 했는데…….”
대리님은 대답 대신 어깨만 으쓱했다.
“그리고 차장님 오늘 오후 출근하실 거예요.”
“네? 차장님 어디 아프세요?”
"어제 모아 씨 결근한 부분 메꾸느라 오늘 새벽에 퇴근하셨거든요.”
으윽.
출근하시면 퇴사한다고 이야기해야 하는데.
이 말을 듣고 나니 마음이 엄청 무거워졌다.
아냐,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나는 퇴사를 해야 해.
그리고 행복을 찾아서 떠날 거야.
하지만 그건 일단 나중에 할 일이고, 지금은 다른 일을 해야 한다.
나는 눈에 힘을 주고 모니터를 응시했다.
하루 빠졌다고 일거리가 잔뜩 밀려있었다.
차장님이 몇 개 급한 건을 처리해주셔서 그나마 좀 낫지만 빨리 안 하면 오늘은 야근할 것 같다.
어디 보자. 헌터 마켓 물품 구매 요청서?
이건 건수가 좀 많네.
이걸 처리하려면 아래층에 있는 헌터 마켓 관리자에게 가야 한다.
그에게 필요한 물건을 구매해 달라 요청하고, 회사 자산 사용 장부와 물품 거래 기록 등등.
번거로운 서류 작업을 마친 뒤 받은 물건을 잘 포장해서 발송 처리를 하는 일이다.
양을 봐서는, 품목이 많아서 네 시간은 걸리겠는데?
점심 건너뛰고 해야 할 분위기다.
이건 김 대리님한테 미리 말해둬야지.
“대리님, 저 오늘 점심 못 먹을 거 같은데 저 기다리지 말고 드세요.”
죽을 것 같은 얼굴로 모니터를 보고 있던 대리님이 고개만 끼리 돌려 나를 응시했다.
저건 뭔가 마음에 안 드는 소리를 들었을 때의 버릇인데.
“밥 안 먹는다고요?”
“네……. 일이 밀려 있어서……."
“얼마나 밀려 있는데요?”
대답 대신 방금 프린트 해온 물품구매 요청서 목록을 들어 올리자 대리님이 인상을 구겼다.
“3시간은 해야겠는데?”
"저는 4시간도 넘게 걸릴 것 같아요. 게다가 이것 말고도 밀린 게 많아서…….”
그녀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면서 뭔가 가늠하더니 결국 한숨을 푹 내쉬었다.
“도와주고 싶은데 나도 손이 없네. 그래도 굶지는 말고요. 김밥? 샌드위치? 아니면 죽?”
“네?”
“사다 줄게요. 그래도 먹으면서 해야죠.”
날카롭게 자른 단발머리에 도회적인 외모라서 김 대리님을 처음 본 사람은 모두 그녀가 매우 깐깐하고 냉정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가까이 지내본 결과 이 사람은 주변인이 밥 굶고 잠 안 자는걸 제일 싫어하는 사람이다.
“그래도…….”
“죽. 소고기 죽. 좋죠? 그럼 그런 걸로 알고 있을게요.”
“대리님, 그럼 제 카드 드릴게요. 이걸로…….”
“아, 바쁘다면서요. 어서 가요. 아침 회의 끝나면 마켓 관리자들 엄청 바빠지는 거 알죠? 그거 기다리게 되면 오늘 안에 다 못 해요. 어서 가요. 빨리.”
대리님은 더 할 말 없다는 듯 딱 자르곤 고집스럽게 모니터를 응시했다.
더 말해봐야 먹히지도 않을 것 같고.
실제로 마켓 관리자들의 피크타임이 가까워지고 있기도 했기 때문에 나는 일단 자리를 옮겼다.
마켓 관리자들이란 우리 회사에 소속되어 헌터 마켓에 물품 등록을 관리하는 헌터들을 말한다.
이들은 마켓에서 물건을 사고파는 일을 대신해주는 것만으로 억대 연봉을 받아간다.
대부분 각성한 지 얼마 안 된 헌터들인데, 던전 탈출석을 살 때까지 이런 식으로 돈을 버는 것이다.
던전 공략에 참여해서 부산물을 얻거나 아이템을 얻기 시작하면 이 회사에서 주는 억대 연봉 같은 건 우스운 수준으로 돈을 벌어들였다.
그러니 실전을 뛰고 있는 헌터들은 이런 일거리에 관심이 없다.
그리고 대부분은 탈출석이 없더라도 던전에 뛰어들고 보기 때문에 마켓 관리자를 구하는 건 꽤 힘든 일이었다.
마켓 관리자 구인이 얼마나 어려운지 인사팀장이 회식자리에서 구구절절 하소연하는 걸 자주 들어 알고 있지.
만약 나중에 예상치 못한 일로 전재산을 다 날리게 되면 이쪽에서 일해봐야지.
사실 아직 고민 중이다.
각성한 사실을 밝힐지 말지.
눈 뜨고 바로 출근했으니 따로 말할 사람이 없기도 했고, 이 부분에 대해 깊게 생각할 시간이 없기도 해서 일단은 감추는 것으로 결정했다.
각성을 했어도 상태치가 거의 일반인에 가까운데, 이렇게 상태치가 낮으면 보통 강한 치유 스킬이나 제작, 보조 계통의 헌터가 된다.
하지만 나에게 있는 건 채집 스킬 하나뿐.
히든 스킬이 있긴 하지만.
‘저 그거 할 수 있습니다’라고 나섰다가 한 달 내내 야근을 해야 했던 내 직장인으로서의 경험이 경고한다.
각성했다는 사실을 밝히면 장난 아니게 귀찮아질 거라고.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나는 결심을 굳혔다.
당장 돈이 없는 것도 아니고, 당분간은 숨기자.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되면 그때 밝히는 걸로.
그래.
장수의 비결은 힘숨찐이지.
자고로 능력을 숨기고 죽은 듯이 사는 사람이 오래가고, 나서는 사람이 먼저 사라지더라고.
다년간 회사 회의실에서 익힌 지혜다.
아이디어를 내며 열정적으로 회의에 임하는 사람이 가장 빨리 퇴사하게 된다.
스스로 불러온 야근에 짓눌려…….
그 과장님 좋은 사람이었는데.
아무튼 각성을 했을 뿐이지 사실 나는 채집밖에 없는 민간인이나 다름없다.
달랑 채집 스킬 하나 있는 헌터?
아무 데나 막 끌고 다니면서 굴려먹기 너무 좋겠네.
상태치도 낮아서 힘으로 압박하면 거부할 수도 없고.
위험한 데 막 끌고 다니기 만만하고.
죽을 때까지 B급 포션 재료나 캐다가 죽는 거 아냐?
아직 그런 비인간적인 범죄가 일어난 적은 없다지만.
내가 모르는 어딘가에서는 벌어지고 있는 일일지도 몰라.
그래, 숨기자.
편안하고 안락한 생활을 위해서.
재차 다짐하는 사이 마켓 관리실 앞에 도착했다.
안으로 들어가자 작은 사무실이 늘어선 복도가 나타났다.
일찍 온 덕분에 줄을 설 필요는 없어 보였다.
마켓 관리자에게는 모두 개인 사무실이 지급된다.
우리 회사에 있는 관리자는 열두명인데, 원래는 스무 명이었다가 사람을 구하지 못해서 줄어든 것이다.
인사팀장의 말로는 각성자를 구하기가 나날이 더 힘들어지고 있다고 했다.
아마 나중에는 헌터를 전혀 구할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며 이직 준비를 하라고 반 농담을 하기도 했다.
얼마 전부터 거대 길드에서 대대적으로 헌터들을 모집하면서, 점점 마켓 관리자를 구하기가 힘들어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원래대로라면 던전 공략에 큰 도움이 안 되는 약한 헌터는 받아주지 않았는데.
요즘은 2군이나 3군이라는 형태로 데리고 있으면서 중개업무 같은 걸 시킨다고 한다.
그러다가 공략 팀에 빈자리에 슬쩍 끼워 넣어주기도 한다나.
2년 일하고 탈출석받기 vs 거대 길드에서 눈도장 찍다가 던전 공략 참여하기.
어떻게 보나 후자가 더 이득이잖아.
덕분에 우리 같은 중소기업은 살아남기가 점점 힘들어지고 있었다.
지금 계약 중인 마켓 관리자들도 계약 기간이 종료되면 연장하지 않을 거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헌터를 한 명도 구할 수 없게 되면 결국 회사 문을 닫는 수밖에 없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