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화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살아서 나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식었던 몸이 흥분으로 뜨겁게 달아올랐다.
나는 애써 침착하려고 노력했다.
경솔하게 움직였다가 모처럼 잡은 기회를 날려먹으면 끝장이다.
기회는 단 한번.
내가 알기론, 던전에서 나갈 수 있는 방법은 세 가지가 있다.
하나는 그 던전의 보스를 죽이고 던전이 무너질 때 생기는 동시다발적 게이트를 이용해 탈출하는 것.
이건 꿈도 못 꿀 방법이니 패스.
수많은 헌터들이 팀을 꾸려 도전했지만 보스 공략에 성공한 던전은 지금까지 단 한 곳 밖에 없었다.
그나마도 공략팀 절반이 사망하는 희생 끝에 이루어진 거였다.
날고 기는 경험 많은 헌터들이 떼로 도전해도 불가능했는데.
나 같은 채집 헌터가 혼자 도전한다고? 그것도 갓 각성한?
재고할 가치도 없는 방법이다.
두 번째는 가장 흔히 사용되는 방법이었다.
마석으로 만든 탈출석이라는 아이템을 사용하는 것.
탈출석은 관련 스킬을 가진 제작계 헌터가 마석 등의 재료를 사용해서 만드는 것이다.
잘 가공하면 마석 하나로 수십 명 분량의 탈출석을 만들 수 있다.
물론 탈출석을 가지고 있지 않고, 탈출석 제작 스킬도 없으므로 이 방법도 해당사항이 없다.
마지막 하나는 탈출석 재료로 소모되는 마석 자체를 부수는 것이다.
사실 마석은 그저 탈출석의 재료로만 인식되었다.
마석을 부수면 탈출 게이트가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아무도 몰랐지.
괜히 부쉈다가 마석만 날아가면 수십, 수백억을 손해 보는 건데.
하지만 그런 미친 짓을 한 사람이 한 명 있었다.
최초로 마석을 부숴서 그 게이트로 탈출한 사람.
이 이야기는 당시에도 영웅담처럼 화제가 되어서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뭐, 본인이 워낙 유명한 헌터이기도 하고.
아무튼 그 사건 덕분에 마석을 부수면 그 등급에 따라 일정 인원이 이용할 수 있는 게이트가 만들어진다는 사실이 발견되었다.
하지만 어지간히 급한 상황이 아니면 사용하지 않는 방법이었다.
너무나 효율이 나쁜 방식이기 때문이다.
한 명을 탈출시킬 수 있는 마석을 탈출석으로 가공하면 수십 명이 사용할 수 있게 만들 수 있는데 왜 그런 아까운 짓을 하겠어?
그 사람도 나처럼 혼자 던전에 고립되는 상황이 아니었다면 절대 하지 않았을 것이다.
다만 그는 불규칙 균열에 휘말린 게 아니라 공략을 위해 정식으로 입장했다는 것과 엄청 강한 전투계 헌터라는 부분이 나와 다르지만.
던전에 입장하는 헌터들은 모두 탈출석을 필요로 했다.
그리고 탈출석의 재료인 마석은 극히 한정된 수량만 얻을 수 있다.
마석을 탈출석으로 가공하면 사용할 수 있는 게이트 개수가 좀 늘어나긴 하지만 수요를 따라가기엔 턱없이 부족한 공급이었다.
덕분에 탈출석은 돈 많은 헌터들도 쉽게 사용할 수 없을 정도로 높은 가격을 형성하게 되었다.
가끔 매물이 전혀 나오지 않을 때도 있어서 돈이 있어도 구하지 못 하는 경우도 빈번했다.
그러다 보니 사기 매물이 기승을 부렸다.
지금은 가짜 탈출석과 진짜 탈출석을 구별할 수 있는 방법이 널리 알려져서 당하는 사람이 드물어졌지만 초창기에는 비극적인 일이 정말 많았다.
어쩐지 시중가보다 저렴한 탈출석을 운 좋게 손에 넣었는데 알고 보니 가짜 탈출석이더라하는 이야기가 괴담처럼 떠돌았지.
게다가 막 각성하고 ‘나는 되는 놈이다’라고 믿으며 무작정 던전에 뛰어드는 헌터도 많았다.
적당히 공략하다가 다른 헌터의 탈출석을 훔치거나, 다른 사람이 연 게이트에 뛰어들어 날치기 탈출을 하려 드는 사람도 많았다.
심지어 그냥 ‘어떻게든 되겠지’ 하고 던전에 들어가는 사람도 있었다.
나같이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시멘트를 부은 다음 건너가는 사람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사고방식이지만.
어쨌든 저런 사람이 꽤 많았다.
그래도 그나마 안전한 방법은 길드를 통해서 입장하는 방법이었다.
던전 아이템을 원하는 돈 많은 사업가가 공략 능력이 있는 길드에 ‘다인용 탈출석’을 사서 투자하면 헌터들이 던전을 돌고 그 수익금을 투자자에게 배분하는 일종의 펀드가 성행했다.
결국 많은 헌터들이 이렇게 다인용 탈출석에 의지해 던전에 뛰어들었다.
이게 그래도 그나마 안정적인 방법이라 시간이 좀 지나자 대부분 이런 형태로 던전을 공략하게 되었지.
그러나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를 던전에서 불운한 일은 항상 일어나기 마련이다.
예를 들어, 의욕이 너무 과다한 나머지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낙오된 헌터라든가.
마석 하나 없이 혼자 남은 헌터의 운명은 정해져 있다.
죽음.
하지만 그걸 부정하고 마침내 살아 돌아온 최초의 인물이 있다.
현 랭킹 1위 서지한.
지구에서 가장 많은 던전 몬스터를 죽인 사람.
그는 사흘 밤낮을 먹지도 자지도 않고 닥치는 대로 몬스터를 잡다가 간신히 마석을 하나 손에 넣었다.
처음에는 기뻤지만, 어차피 던전을 못 나가면 부질없다는 생각에 부숴버렸는데, 우연히도 게이트가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이것도 인터뷰에서 나온 말이지만.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나는 서지한처럼 수천 마리의 몬스터를 때려잡을 무력 같은 건 없다.
하지만 수천 마리를 때려잡을 필요도 없지.
일반적인 헌터들이야 마석이 나올 때까지 던전의 몬스터를 수십, 수백 마리 잡아야겠지만.
내 히든 스킬〈없었는데요, 있었습니다〉라면 단 한 마리만 잡아도 마석을 얻을 수 있다.
단 한 마리.
계획은 간단하다.
방금 충왕류가 지나갔으니 다음 녀석이 순찰을 돌기까지 어느 정도 시간이 남아 있다.
그동안 가능한 한 많은 식물을 채집한 뒤 핵을 먹고 능력치를 증가시킨 후 충왕류를 쓰러뜨린다.
그리고 마석을 획득한 뒤 그걸 이용해 이곳을 탈출한다.
내가 할 수 있을까?
내 덩치 다섯 배는 넘는 괴물과 싸워서 이길 수 있을까?
아니야.
할 수 있을까가 아니다.
해내야 한다.
이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
나는 두려움을 애써 억눌렀다.
무서워도 해야 해.
할 수 없을 것 같더라도 해야 해.
막상 해보면 할 만할지도 몰라.
떨리는 마음을 가다듬으며 나는 부지런히 손을 움직여 가능한 한 많은 식물을 채집하려고 노력했다.
민첩성이 약간 오른 덕분인지 아까보다 식물을 채집하는 속도가 살짝 올라간 것 같았다.
에비타니스, 핌토피스, 라니아드 등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기도 하고, 생소하기도 한 식물의 잡다한 부산물들이 인벤토리에 차곡차곡 쌓여갔다.
처음에는 에비타니스만 먹을까 했지만 핵을 먹고 능력치가 오른다고 해도 내가 무기 하나 없는 맨몸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빨라져 봐야 대미지를 입힐 수 없으면 말짱 도루묵이다.
나는 매달릴 수 있는 모든 확률에 매달리기로 했다.
핵이 능력치를 증가시켜준다면, 먹을 수 있는 핵은 다 먹어보고 최대한 도움을 받는 게 좋을 것 같다.
핌토피스의 핵을 한 알 꺼내 들었다.
굉장히 찜찜한 느낌의 탁한 보라색 열매다.
독이 있으면 어쩌지.
아니야, 없을 거야.
독이 있으면 내가 이름을 알 만큼 그렇게 흔하게 거래될 리가 없어.
애써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 노력하면서 신중하게 핌토피스의 핵을한 알 씹었다.
섭취한 핌토피스의 핵으로 인해 일시적으로 힘이 1 증가합니다.